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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6

   EP.96

     

   성장통이라는 말이 있다.

     

   사춘기를 겪을 즈음, 갑자기 키가 크면서 무릎이 쑤셔본 적 있다면 그게 대충 성장통.

   하지만 그것은 사람의 성장과 함께 오는 시련과 고통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성장에는 다양한 고통이 수반된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던 일을 끝마치고 얻게 되는 지식과 경험들.

   그리고 탑은, 그런 지식과 경험을 재료로 플레이어들의 격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탑은 그들의 정신력을 시험했다.

   사람을 보는 안목과 근성을 시험했고 그들이 가진 힘을 어떻게 더욱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를 시험했다.

     

   하지만 5층만큼 오로지 그들의 전투 능력만을 시험하는 장소는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서걱!

     

   “후우, 확실히 만만치가 않군요.”

     

   5층의 사냥터.

   비틀거리는 고블린의 목을 쳐 낸 박조철이 검을 갈무리하며 말하자 옆에 있던 한가민이 격하게 동의를 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요. 깃발 뺏기는 전략이라도 세웠지…”

     

   옆에 있던 남궁천호 또한 그녀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저 사냥에 사냥을 반복해야 하는 임무. 물론 기발한 방법이 어딘가는 존재하겠지만, 임무를 받는 순간 그런 편법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목표가 확실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있기는 해요.”

     

   널브러진 괴물들의 시신을 보며 서세영이 던진 말.

   그런 와중에도 모두가 부정적으로만 현재의 상황을 바라본 건 아닌 모양이었다.

     

   “언니 말이 맞긴 하죠…”

   “그게 주변에 있는 모든 괴물을 소탕하라는 내용만 아니면 저도 동의할 수 있을 것 같군요.”

     

   한가민과 남궁천호의 반응에 박조철은 다시 한 번 그가 받았던 임무에 대해 확인했다.

     

   —

   『5층 – 부지런한 사냥꾼』

     

   주제 : 사냥

   난이도 : ?

     

   설명 : 이곳에서 당신은 이세계에서 온 용사입니다. 동료들과 함께 마왕의 하수인들을 물리치고 마왕이 본신의 힘을 되찾기 전에 그를 처치하십시오. 만약 그가 본신의 힘을 되찾는다면 그가 당신들을 찾을 것입니다. (단, 살아남은 마왕의 하수인이 적을수록 마왕의 힘이 약화됩니다.)

     

   임무 : 제한 시간 내에 마왕 처치, 혹은 마왕의 진군을 저지

   제한 : 10일 이내로 마왕을 처치하지 못할 시, 마왕이 모든 군대를 이끌고 세계를 침공합니다.

     

   보상 : 6층으로 진입

   실패 페널티 : 마왕을 처치하지 못하면 이곳을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

     

   여느 판타지 속 용사가 되어 마왕을 처치하고 세상을 구한다는 진부한 이야기.

   그리고 그런 이야기의 특성에 맞게 마왕성은 더럽게 멀었다.

     

   게다가 특이점이라면…

     

   [‘이명이 없는 붉은 눈의 짐승’의 화신 4/4]

     

   같은 성좌와 계약을 맺은 사람들끼리 임무를 진행하게 된다는 것.

   그리고 문제는 이곳에 있는 네 사람은 모두 서세영의 전언에 따라 토끼와 계약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죄송합니다. 저도 이렇게 될 줄은……”

   “괜찮습니다. 도우미도 알려주지 않은 것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언니 신경 쓰지 마요. 저는 오히려 저희 넷이라서 편해요.”

     

   그녀의 사과에 한가민이 손사래를 치며 말을 잇는다.

     

   “게다가, 모든 괴물을 소탕하라는 말은 없잖아요. 그냥 제한 시간을 넘기면 걔네들이 다 쳐들어오는 거지.”

   “가민아 내 생각엔 그거나 그거나 똑같단다.”

     

   나름 위로랍시고 던진 한가민의 말에 남궁천호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한 시간 안에 플레이어들이 함께 마왕을 잡아야 한다는 조건.

   그쯤 되니 그동안 가만히 몬스터들의 사체를 바라보던 박조철이 첨언했다.

     

   “가민아, 나도 트라우마 이후로 어지간하면 네 편을 들어주고 싶기는 한데 이건 천호 씨 말이 맞아.”

     

   메인 임무는 마왕을 처단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마왕성까지 가는 모든 길목마다 괴물들이 포진되어 있는 게 문제일 뿐.

     

   “게다가 우리는 제대로 된 성좌랑 계약을 한 게 아니라서 다른 그룹에 비해 전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어.”

     

   다른 성좌의 화신들처럼 물량이라도 많았다면 하수인을 덜 잡더라도 마왕성을 힘으로 밀어 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들은 고작 네 명. 마왕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게 최종 보스인 이상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도…… 나쁘게만 볼 건 아니야. 길게 보면 결국 성장에 밑거름이 되는 건 사실이니까.”

     

   박조철의 말마따나 정말 장기적으로 본다면 소수의 인원으로 전투를 한다는 게 더욱 이득일지도 몰랐다.

   나쁘게 말하면 독박을 쓰게 되었다는 개념이지만 좋게 말하자면 독식을 할 수 있다는 의미였으니.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합시다. 그리고 저희에게만 있는 메리트도 있잖아요.”

     

   박조철의 가벼운 미소에 서세영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이 반쪽짜리 성좌인 토끼와 계약을 한 이유.

     

   “서로의 합의가 없어도 언제든지 계약을 파기할 수 있다. 그리고 상하관계가 아닌 동등한 입장으로 서로의 이득을 위해 힘쓴다.”

     

   성좌는 격을 올리고 화신은 힘을 빌리기 위해 이뤄지는 계약.

   일반적으로 모든 성좌와의 계약은 단방향이지만 놀랍게도 토끼와의 계약은 양방향이었다.

     

   ***

     

   도시라고 부르기에는 소박하지만 마을이라고 부르기에는 거창한 거주지역.

     

   띠링.

     

   [새로운 임무가 도착했습니다.]

     

   사람들을 돌아보던 나의 눈앞에 5층의 메인 임무가 떠올랐다.

     

   이곳에서 동료와 함께 마왕을 처단하라는 내용.

   허나, 임무의 설명이 무색하게도 성좌와 계약을 진행하지 않은 나에게는 딱히 동료라고 할 만한 누군가가 나타나지 않았다.

     

   [성좌가 없는 플레이어 1/1]

     

   ‘뭐 당연한 건가?’

     

   목숨이 걸린 일에 힘을 얻을 기회를 미룬다는 것.

   나 같은 특이 케이스가 아니라면 그런 선택을 하는 사람은 없는 게 정상이었고 만약 있다고 해도 다른 의미로 정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도우미들이 말하기를 탑은 플레이어들에게 시련을 줌으로서 우리를 성장시킨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탑이 우리에게 성장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까놓고 말해 성장은 스스로가 하는 것이었으니까.

     

   탑은 우리가 성좌들의 화신이 될 재목인지 선별할 뿐이었고 도우미들이 말하는 시련이니 성장이니 하는 것들은 싹 다 가스라이팅에 불과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주객이 전도된 거지.”

     

   시련을 통해 성장을 ‘얻는’ 것이 아닌, 시련을 통과하지 못하면 죽으니 어떻게든 ‘성장’할 수밖에 없는 것.

     

   그리고 그 말인 즉, 성좌와의 계약처럼 힘을 얻을 기회가 생겼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건, 탑의 선별 작업에서 도태될 수 있음을 의미했다.

     

   도태된 자는 죽는다.

   자비나 두 번째 기회 따위는 없었고 그것은 튜토리얼에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바뀌지 않은 불변의 진실이었다.

     

   “슬슬 시작해볼까?”

     

   억울하다고 말해도 결국은 내가 선택한 길.

   오롯이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고 억울하다며 중얼거릴 시간이 있으면 주변 정찰이라도 한 번 더 해보는 게 옳았다.

     

   나는 임무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마왕의 하수인을 처치해 마왕을 약화시키고 놈이 침공을 시작하기 전에 처단한다.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아주 단순한 규칙이었지만, 탑이 이렇게 순진한 사람을 원할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 순수하게 전투 능력을 시험한다는 건가?”

     

   지금껏 지나온 각 층의 시련들에서 전투가 필요하지 않은 적은 없었지만, 순수한 전투력으로만 플레이어를 평가한 적은 없었다.

     

   3층의 전략과 전술, 하나 못해 무공을 배워야 하는 2층에서도 스승이 제시하는 꾸준한 수련만 따라갈 수 있다면 충분히 클리어가 가능한 임무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지금 5층의 마왕 사냥은…

     

   “힘이 없으면 침공 당하고 죽어라?”

     

   몬스터 사냥이 5층의 필수 요소긴 했다. 마왕의 사냥이 최종 목적인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다시 읽어도 임무의 문장 하나가 거슬리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마왕이 본신의 힘을 되찾기 전에 그를 처치하십시오…]

     

   본신의 힘을 되찾기 전.

   그 말은 곧, 내가 입장한 직후의 마왕은 본신의 힘을 되찾지 못한 상태라고 밖에 이해되지 않았다.

     

   “그럼 지금이 적기라는 거 아닌가?”

     

   지금이 마왕을 처단하기 가장 좋은 시기라는 것.

   마왕이 본신의 힘을 되찾는 타이밍에 우리를 찾을 것이라는 말만 봐도 현재의 마왕이 플레이어보다 강하지 않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이세계의 용사라……”

     

   나는 게임 회사의 직원이었다.

   인사팀이라 기획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지만, 어지간한 일반인보다 스토리와 관해서는 훨씬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대부분의 이야기를 돌아보자면 용사가 성장하는 사이에 마왕 또한 성장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그렇게 내려진 결론은 속전속결.

   나는 곧장 마왕성으로 직행하기 위해 필요한 물건들을 구비하기로 했다.

     

   웅성웅성.

     

   주변에 보이는 작은 상점으로 들어가니 다양한 물건들이 나의 시야에 들어왔다.

     

   손 한 뼘쯤 되는 정말 작은 단검부터 2m는 족히 넘을 것 같은 거대한 검까지 줄줄이 나열되어 있었고, 구석에는 활 같은 장거리 무기나 철퇴, 망치 같은 둔기들도 즐비해 있었다.

     

   하지만 나의 시야를 떠나 귀를 거슬리게 한 것은 이미 상점 내부에 있던 몇몇 NPC들의 대화였다.

     

   -자네들 그거 들었는가? 마왕이 침공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

   -예끼 이 사람아! 불길한 소리 말게!

     

   사람들은 마왕의 침공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몬스터의 강화, 잦은 빈도를 가지기 시작한 몬스터 웨이브, 그리고 가장 중요한 용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말도 안 되네!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슬슬 용사들도 소환이 될 텐데 그런 기미가 없지 않은가? 너무 심려치 말게! 용사가 수두룩하게 나타나면 그때부터 긴장하자고!

     

   그들의 대화를 들으니 아무 잘못도 없는데 괜스레 죄를 지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앞선 말에 따르자면 용사가 나타난다는 것은 마왕의 침공이 준비되기 시작했다는 의미였고 보통 용사는 십수 명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것이 관례인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미안합니다. 아쉽게도 저 밖에 없어요.’

     

   그들이 의지할 용사도 나 하나밖에 없다는 것.

   솔직히 말해서 엄청 부담스러웠다. 아무리 강제라지만 누군가의 미래를 책임졌다는 무게감은 상상을 초월하는 힘으로 나의 어깨를 짓눌러 왔으니까.

     

   ‘물건이나 빨리 보고 나가자.’

     

   하지만 부담스럽다고 머리만 감싸쥐고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차피 마왕은 잡아야 하고 여기 있는 NPC들은 도와줄 것도 아니면서 입만 나불거릴 것이었으니,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어서 옵쇼!

     

   그리고 그때 들리는 상점 주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제 왔어요? 생각보다 늦었네요!”

     

   낯선 장소에서 익숙한 분위기로 인사를 건네는 상점 주인.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순간부터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토…끼?”

     

   도우미 토끼…… 아니.

   녀석과 똑같은 목소리와 똑같은 기운을 가진 ‘인간’이 계산대 앞에서 나를 보며 양손을 흔들고 있었다.

     

   “히힛, 제가 조만간 볼 거라고 했죠?”

     

   기다란 흰색 장발에 루비를 박은 듯한 영롱한 붉은 눈동자.

   깐죽거리는 말투와 함께 나타난 녀석은 나와 격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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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Threatening To Climb The Tower?

Who Is Threatening To Climb The Tower?

Who Is Threatening You to Climb the Tower? 누가 탑 오르라고 협박함?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A sudden message arrived, heralding the end of humanity.

[Climb the tower. If you refuse, you will die.]

We are being threatened by a mysterious be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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