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97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살리에르 백작이 보인다.

         

        그의 눈가에 자리잡은 다크서클이 현재 영지의 상태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그 또한 공무원인 것이다.

         

        “바쁘신 와중에도 시간 내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뭘, 로테 친구인데 딱딱하게 굴 필요 없어. 편히 있으렴.”

        “그럼….”

        “아, 그 전에 말이다.”

         

        살리에르 백작은 눈동자를 굴려가며 나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이 주로 향하는 곳은 내 머리였다.

         

        내 윗머리는 왜 쳐다보는 거야. 설마 탈모라도 왔나?

         

        에이, 그건 아니겠지. 스트레스 받았던 일이 많긴 했어도 금안족의 몸인데 뭔 머리가 빠져.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고 있자니 살리에르 백작이 눈가를 좁히며 물어왔다.

         

        “염색은 언제 풀었니?”

        “네?”

         

        또다. 아까 전 메이드가 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이다.

         

        여기 사람들이 왜 이럴까. 저택 사람들이 느닷없이 날 상대로 트루먼 쇼를 벌일 이유는 없을 텐데.

         

        몰레카메라 같은 게 아니라면 답은 하나다. 내가 없는 사이에 나와 관련된 일이 뭔가 있었다는 것. 뭐 머리색만 다른 도플갱어라도 나와서 설치고 다녔거나… 응,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얼마 전에 말이다. 카밀라 아주머니네 미용실에서 탈색하고 왔다고 하지 않았니.”

        “전 그런 적 없는데요? 그 미용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요.”

        “이상하다.”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멀뚱거렸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적어도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뭐, 그건 나중에 천천히 얘기해보도록 하고.”

         

        찝찝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당장 급한 일은 아니었다. 지금은 수인족 건부터 처리하는 게 급선무였다.

         

        나와 살리에르 백작은 집무실 한쪽에 자리한 접객용 테이블에 마주보고 앉았다. 때마침 메이드가 홍차 두 잔을 내어왔다. 백작은 내가 보낸 예의 편지를 꼼꼼히 읽어보며 찻잔을 들었다.

         

        “신기한 일이구나. 금안족이 수인족 신경을 다 써주다니.”

         

        백작의 의문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찻잔에 입을 가져갔다.

         

        그러게 말이다. 프레이만 아니었더라면 수인족에 관심 가지는 일도 없었을 텐데. 여길 떠날 때까지 요호족이 뭐하는 종족인지도 몰랐겠지.

         

        “수인 중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니?”

        “네, 옛 친구를 만나러 서쪽으로 가던 중 수해가 발생했거든요. 그때 그 친구가 하는 얘기를 들었어요. 태풍으로 부족이 먹을 게 부족해졌으니 뭐라도 해야 한다, 그렇게요.”

         

        그 친구가 프레이라는 건 숨겨야 한다. 제국 모두가 살리에르 백작처럼 수인에게 관대한 건 아니니까. 꼬맹이가 아카데미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도록 정체를 숨겨주는 게 상책이다.

         

        “음, 이맘때쯤 몇몇 부족이 약탈이나 구걸을 하러 내려오는 경우가 종종 있단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

         

        오, 유능해. 이러면 대화가 한결 쉬워지지.

         

        “그때마다 어떻게 대처하셨나요?”

        “말이 통하면 먹을 걸 나눠주고, 그게 안 되는 부족이면 막아서 내쫓았어. 수인족은 부족마다 성향이 제각각이라서 때에 맞게 대처해야 한단다.”

        “요호족은 어떨까요?”

        “요호족이라.”

         

        백작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까다롭지. 어떨 땐 말이 통하기도 하고, 또 다른 해에는 다짜고짜 기습을 해 오기도 하거든. 잘 지내다가도 뒤통수를 치려고 한 적이 있는가 하면, 어느 해는 저번에 약탈했던 물건을 도로 돌려주고 떠나기도 하지.”

         

        진짜 뭐 하는 종족이야. 갈피를 못 잡겠는데. 

         

        “말 그대로 여우라는 거지. 가능한 한 자기들에게 이득이 되는 쪽으로 움직이려고 해, 걔네들은.”

        “이번에는 지원을 하는 게 나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니?”

         

        나는 일부러 발언 강도를 높였다. 백작에게 경각심을 세우게 해 협상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기 위함이었다.

         

        “수해로 먹을 게 없어졌으니까 눈에 뵈는 게 없겠죠. 먼저 회유하지 않으면 이번 달 내로 약탈해 올 게 분명해요. 안 그래도 태풍으로 영지도 적잖은 피해를 입었는데, 여기서 요호까지 쳐들어오면 경제적인 손해가 더 심해질 게 뻔하겠죠.”

        “꽤나 안목이 있구나.”

        “백작님께서 말씀해주신 대로 한 번 유추해봤을 뿐입니다.”

         

        어쨌건 살리에르 백작도 이 문제를 시인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협상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래서, 이쪽 부근에 사는 요호족 전체에게 내년 봄까지 물자지원이라. 이건 이것대로 손해가 크겠는걸.”

         

        살리에르 백작은 턱을 괴며 짧은 비음을 흘렸다.

         

        이번 태풍으로 피해를 입은 건 살리에르 영지도 마찬가지다. 방비를 잘 해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손실이 생긴 것이다.

         

        영지에 돈을 쏟아부어도 부족할 지경이다. 여기서 식량 제공을 위해 영지민이 아닌 이들에게까지 돈을 써야 한다면 주민들의 불만이 생길 게 분명하다. 의도를 말해줘도 세금 낭비라고 하는 이들이 꼭 나오겠지.

         

        더구나 아직은 흑사병의 여파도 채 가시지 않은 상태. 인플레이션과 전쟁으로 인해 제국 경제는 당장이라도 위태로운 상황이다. 재정 안정성을 위해서라도 지금은 긴축을 해야 했으니.

         

        “어쩔 수 없군. 이자를 조금 높게 받아야겠어.”

         

        살리에르 백작은 공문서에 필요한 내용을 적고 인장을 찍어 마무리했다.

         

        “감사합니다. 빠른 시일 내에 전할게요.”

         

        나는 문서를 받아들고는 인사와 함께 집무실을 나왔다.

         

        어디 보자. 이쯤하면 90퍼센트 정도는 의뢰를 완료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 공문서를 요호족에게 전해주고 동의를 받은 뒤 다시 살리에르 백작에게 오면 계약은 성사된다.

         

        그러고 나서 나는 요르문간드에게 가면 된다. 가서 텔러-울람 설계의 첫 단계를 완료하면 끝.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가면 될 일이다.

         

        “일단 꼬맹이가 와야곘지.”

         

        프레이가 오기 전까지는 여기서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짐도 싸야 한다. 요호족의 마을로 향했을 때 무거워서 여기에 두고 갔던 물건들을 찾아 마차에 실어야 한다. 대표적으로 가져오기만 했지, 애물단지라도 된 듯 창고에 처박아만 뒀던 토카막이라던가.

         

        -철컥

         

        “뭐야. 열려있네?”

         

        원래는 도난방지를 위해 잠겨 있어야 정상인데. 메이드가 청소라도 하려고 열어놓은 모양이다.

         

        아무렴 어때. 난 내 것만 찾아서 나가면 그만인데.

         

        “뭔데 시발.”

         

        창고 스위치를 내리자마자 있어야 할 게 사라졌다. 플레어 만드는 동안 같이 제작했던 간이 토카막이 에탄올마냥 증발해버린 것이다.

         

        “저기요. 여기 있던 커다란 철제 기계 못 봤어요?”

        “저, 저는 모르는 일인데요….”

         

        지나가는 시녀들에게 붙잡고 물어봤지만 하나같이 모른다는 얘기 뿐이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몇몇 메이드는 날 보자마자 기함까지 하며 덜덜 떨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말이다. 일부는 제 눈을 몇 번이고 비비면서 나를 멀뚱히 쳐다보다가 슬쩍 자리를 피했다.

         

        빗자루를 들고 초고속으로 꽁무니를 빼는 시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짐짓 한숨을 내쉬었다.

         

        “왜들 저래?”

         

        [주인님 닮은 도플갱어라도 돌아다니나 보죠.]

         

        농담도 좀 그럴싸하게 치면 안 될까.

         

        그나저나 아까부터 저택을 꽤 싸돌아다녔는데 로테가 안 보인다. 오빠랑 같이 수해복구라도 하러 갔나?

         

        하기야 로테라면 그럴 수 있겠다. 귀족의 의무니 뭐니 하면서 쏜살같이 튀어나갔겠지. 돌아왔으니까 적어도 돌아왔다는 말은 해 줘야 한느데.

         

        “혹시 로테 어디있는지 아시나요?”

        “그… 친구분이랑 같이 서, 서재에 계세요….”

        “친구분?”

        “저, 저는 모르는 일이에요!”

         

        그냥 이렇게 결론내리기로 했다. 어제 메이드들이 단체로 뭐 잘못 먹은 거라고.

         

        메이드 중 한 명이 했던 말을 들어 서재를 찾아가보기로 했다. 저택 별관까지 가야하는지라 거리가 꽤 됐다. 그런데 뭔가, 서고에 가까워질수록 익숙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 익숙하다는 분위기가 뭔지는 잘 모르겠다. 과학적인 증거라고는 댈 수 없는 육감이었다.

         

        ─ 이상한 일이란 말이야. 난 백작에게 편지 같은 거 보낸 적 없는데. 애초에 같은 저택에 있는데 뭐하러 서면으로 말을 전해?

         

        그리고 문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투나 음색을 들어봤을 때 로테가 내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나와 소름 돋을 정도로 비슷하다. 왜인지 모르게 서고 문을 열고 들어가기가 두려워졌다.

         

        ─ 어, 잠깐만. 비 그친 것 같은데?

        ─ 그래? 오랜만에 나가봐야겠다.

         

        서재에는 최소 두 사람이 있다.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가 로테의 목소리였다. 그러더니 얼마 후, 탁탁탁 하는 발소리가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숨거나 도망칠 이유는 딱히 없다. 나는 그들이 나오기 전에 먼저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앞으로 젖혀진 문 앞으로 로테와 함께 또 다른 소녀가 서 있었다. 랩코트 비슷한 걸 걸치고 있는, 이형적이고도 동질적인 외모의… 금안족이었다.

         

        “…어?”

         

        누군가의 입에서 터져 나온 탄식. 내가 내뱉은 건지, 로테가 내뱉은 건지. 그도 아니면 또 다른 소녀가 내뱉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셋이 동시에 한 것일수도.

         

        세 소녀의 얼굴이 동시에 멍청해졌다. 그리고 나는, 나는.

         

        정말로.

         

        알 수 없는 이유에서.

         

        “……카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었던,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다음화 보기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