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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7

     

    느낌이 좋다.

    손이 신속하면서도 부드럽게 움직인다.

     

    세밀한 핀셋이 잡은 실이 찢어진 장기를 꼼꼼하게 봉합해갔다.

     

    수술에 집중하며, 나는 수간호사를 불렀다.

     

    “클로에.”

     

    “네.”

     

    “환자 진단 내리고 초동 처치할 수 있어?”

     

    내 질문에 클로에가 긴장했다.

     

    “하, 할 수 있어요.”

     

    “환자 데려와. 순환계 담당만 남기고 2수술실에 준비시켜.”

     

    “그럼 여기는…”

     

    “기본적인 봉합만 남았어. 여기부터는 눈 감고도 할 수 있어.”

     

    완다 공주의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중간에 심정지가 일어날 뻔했지만 위험한 고비는 간신히 넘겼다.

     

    “다들 지쳤어? 연속 수술은 힘들겠어?”

     

    내 질문에 치유사들이 즉답했다.

     

    “할 수 있습니다.”

    “따르겠습니다.”

    “환자의 목숨이 우선이니까요.”

     

    수술팀이 든든하게 대답했다

     

    “준비해놓을게요!”

     

    순환계를 담당할 간호사 한 명을 제외하고 클로에가 팀원들과 함께 준비실로 나갔다.

     

    남은 간호사 한 명의 서포트를 받아 수술을 마무리한다.

     

    흘긋 창 너머를 바라본다.

     

    아까까지 알베리치가 절규하던 곳이다.

     

    소독을 위해 준비실과 수술실의 이중 구조로 만들어놔서 감염 위험은 없다.

     

     

    조금 있으니 준비실에서 클로에 반이 분주하게 다음 환자를 옆 수술실로 데려갔다.

     

    알베리치의 아내인가.

     

    그는 여태 내 방해를 해오긴 했어도 머리가 조금 굳은 늙은이일 뿐, 악인은 아니다.

     

    애초에 환자를 살리는 일에 개인적인 감정을 섞을 생각은 처음부터 없다.

     

    “끝났어. 회복실로. 이제 치유주문을 써도 되니까 손 남는 사람 전부 붙여.”

     

    “예!”

     

    수술을 마치고 밖으로 나선다.

     

    손을 닦고 새 수술복으로 갈아입으며 공주가 실려 나가는 장면을 지켜봤다.

     

    “완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황제였다.

     

    황제가 수술실의 문을 열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여유가 없었기에 약식으로 예를 표했다.

     

    “고트베르크, 완다는.”

     

    “위기는 넘겼습니다. 이제 경과를 보면 되겠습니다.”

     

    “…후우.”

     

    황제가 눈을 감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내게 진중한 톤으로 말했다.

     

    “고트베르크, 그대에게는 충분한 포상을 내리겠다.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그 질문에 즉답하지는 않았다.

     

    편안한 미소를 살짝 지어주었다.

     

    “일단은 환자의 곁에 있어주십시오.”

     

    황제가 나를 따라 입꼬리를 올리고는 공주를 보러 몸을 옮겼다.

     

     

    내가 다음 수술실로 향하니 휴고가 말을 걸어왔다.

     

    “선생님, 혹시 시간을 보셨습니까.”

     

    “봤어. 네 시간 삼십 분 걸렸지.”

     

    “이미 약혼식을 준비하셔야 할 시간이십니다. 더 지체되면 본 식에 늦으십니다.”

     

    여섯 시 부터였지.

     

    현재 시간은 오후 세시.

     

    생각해보니 밥도 못 먹어서 배가 고팠다.

     

    나는 사탕을 꺼내 입에 물고는 이빨로 깨며 대답했다.

     

    “아셀라에게 늦어도 꼭 갈 거라고 전해줘.”

     

    “으음… 알겠습니다.”

     

    휴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트베르크 선생!”

     

    수술실 밖에서 외치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는 수술실 안으로 함부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건 이해했는지 문지방 건너편에서 무릎을 꿇고는 나를 향해 말했다.

     

    “부, 부탁이오. 선생, 아내는 내 전부요. 제발, 제발 목숨을…!”

     

    그의 얼굴은 십 년은 늙어 있었다.

     

    나는 알베리치의 어깨를 두들겼다.

     

    “걱정 마십쇼. 제가 누굽니까.”

     

    아셀라가 즐겨 하는 말을 따라해 보며, 나는 마스크를 썼다.

     

     

     

    ***

     

     

     

    “라스가 늦는다고?”

     

    파티 준비를 마친 아셀라가 내의원에서 들려온 소식에 인상을 구겼다.

     

    “왜 하필 오늘…!”

     

    급한 환자 때문에 라스의 발이 묶여버렸다.

     

    쌍둥이 공주는 아셀라에게 고모이지만 제대로 인사 한 번 나눠본 적 없는 사이다.

     

    황족의 부상은 주치의가 먼저 담당하고, 그가 요청해야 다른 치유사가 맡게 되는 것이 규칙이다.

     

    주군의 진료 내역은 담당 주치의만이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기에, 다른 치유사가 일반적인 치유주문을 넣었다가 부작용이 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보나마나 오지랖 부려 끼어들었겠지.”

     

    라스다운 행동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 원망이 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주치의니까 나를 가장 우선해야 하잖아.’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 날인지는 수도 없이 강조했다. 환자는 다른 치유사에게 맡기고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게 상도가 아닌가.

     

     

    아셀라가 초조하게 창밖을 내다보았다.

     

    벌써 월광궁에는 손님이 모여들고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젊은 귀족들이다.

     

    슈바르츠슈바이크 서부 공작 영애가 라우가와 깔깔대며 입궁한다.

     

    그들 주변에 자리 잡은 소위 잘 나가는 젊은 귀족들. 오늘 아셀라가 연설로 설득해야 할 대상이다.

     

    텔레포트 게이트 사용 허가를 받아 막 도착한 네리아와 고트베르크 후작도 보였다.

     

    당연하지만 황녀인 아셀라는 그들을 직접 마중하지는 않는다.

     

    이제는 명확한 승계권자로 활동할 예정이니 그에 걸맞는 자세도 필요하다. 행사가 시작하면 위엄 있게 등장할 예정이었다.

     

    당연하지만 먼저 나설 생각은 없었다.

     

    오늘 파티에선 라스도 아셀라만큼이나 주인공이다.

     

    약혼식도 중요하지만 라스의 성인식이기도 했다. 그가 먼저 등장해 분위기를 띄우는 것이 아셀라의 계획이었다.

     

    “황녀님, 내려가실 시간입니다.”

     

    시녀장이 안내했다. 준비는 진작 끝났다.

     

    “알았어.”

     

    아셀라는 복도를 걸어 귀빈실로 내려갔다.

     

    창문 아래로 연회장이 보였다.

     

    벌써 모여서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은 사교를 의무라 생각하지 않고 즐기는 이들이다.

     

    아셀라는 그 자리에 끼고 싶은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어떤 이야기가 도는지는 나중에 시종을 통해 확인하면 그만이었다.

     

     

    사람과의 교류는 피곤하다.

     

    상대방의 시선, 어조 등 사소한 것부터 단서를 얻어 생각을 파악해야 한다.

     

    그를 통해 대화를 이끌고, 원하는 목적을 이뤄낼 수 있다.

     

    사소한 행동도 정치적 의미로 귀결될 수 있는 사교계, 특히나 황실에서는 단어 하나하나에 주의해야 한다.

     

    아셀라는 누구보다 잘 할 자신이 있었지만, 교류가 즐겁지는 않았다.

     

    즐거운 건 마법.

     

    ‘그리고 라스.’

     

    그와 대화할 땐 의미 없는 이야기나 하찮은 소리도 얼마든지 해도 된다.

     

    라스도 얼마나 자신에게 쓸모없는 소리를 많이 하는가.

     

    하지만 그와 하찮은 대화로 시간 낭비를 할 때는 그다지 부담이 안 간다.

     

    지금껏 라스와 편하게 잘 수 있었던 건 그가 자신이 아플 때 해결해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편안함이 일상에도 이어져 왔다고 아셀라도 이제는 자각했다.

     

    애초에 파고들기 힘든 남자라서 분석을 관두기도 했지만.

     

    ‘또 라스 생각을.’

     

    아셀라가 고개를 저어 정신을 환기했다.

     

    “아셀라! 여기 있었구나!”

     

    혼자서 생각의 물꼬를 트고 있으니 라우가가 귀빈실로 들어와서 세상 반갑게 인사를 해왔다.

     

    “파티는 아직이야, 라우가. 내려가서 간식이라도 즐기고 있어.”

     

    “세상에, 지금 우리 막내가 언니를 배려해준 거니? 감동적이야.”

     

    혼자 있고 싶으니 나가라는 뜻이었건만.

    물론 라우가도 모르지야 않았겠지.

     

    얼굴에 철판을 깐 여자였다.

     

    “드레스 이쁜 것 좀 봐. 후후, 약혼식 미리 축하해? 이리 와, 얼마나 컸나 안아보자.”

     

    “건드리면 쫓아낼 줄 알아.”

     

    “쌀쌀맞기는. 고트베르크한테도 그러니?”

     

    “당연하지.”

     

    너무 빠르게 대답했다. 라스와의 일을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 서툴게 거짓말을 해버렸다.

     

    “미리 좀 알려주지. 나 진짜 깜짝 놀랐잖아. 언제 그렇게 걔랑 사이가 좋아졌어? 정치 혼약이 연애 혼약으로 발전하는 일이 황실에서 일어날 줄이야. 로맨틱해라!”

     

    역시 라우가의 머릿속은 꽃밭이었다.

     

    혹은 꽃밭인 척하는 것인지.

     

    대놓고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다른 승계권자들에게 어필한다면 차기 황제가 누가 되든 라우가를 적대하진 않을 터다.

     

    어쩌면 라우가가 고심 끝에 선택한 생존법일지도 모르겠다고 아셀라는 생각했다.

     

    여태 자신도 황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많은 선택을 해온 것처럼.

     

    이번 혼약도 마찬가지고.

     

    ‘어라, 마찬가지가 맞나?’

     

    젊은 귀족들을 불러낼 명분으로 사용했다고 믿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약혼식은 아셀라가 뒷 일 생각 않고 즉흥적으로 일으킨 일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물론 라스 때문이지만 아셀라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그를 더 좋아하는 것 같잖은가.

     

    라스는… 자신을 좋아할 게 분명하고.

     

    …아닌가? 실제로는 어떨까?

     

    그의 생각이 어떨지 아셀라로서는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다 라우가 때문이다.

     

    “그런데 고트베르크는 어디 있어? 결혼도 아닌데 식전에 보면 안 된다는 법도 없잖아. 준비는 다 했대?”

     

    “…하고 있어.”

     

    “어머, 선생님께는 식전에 미리 인사드리고 싶었는데 아쉬운걸요.”

     

    귀빈실에 한 명이 더 입장했다.

     

    화려한 드레스로 자신이 주인공인 양 뽐내는 프레다 공녀였다.

     

    “존안을 뵙습니다, 황녀 전하. 오랜만에 만나네요?”

     

    안 그래도 귀찮은데 하나 더 늘었다.

    아셀라가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지난번에는 죄송했어요. 정식 약혼식을 새로 할 정도로 깊은 관계이신지 제가 눈치가 없었지 뭐예요.”

     

    하여튼 버릇없는 여자다. 아셀라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 마세요. 저는 벌써 고트베르크 가문에 3고백 3차임을 당했다구요? 아버님도 오늘은 전하께 잘 보이라고 당부하셨으니 지키려구요.”

     

    “그 마음가짐 끝까지 가져. 대공과는 잘 연락하고 있으니 망치지 말고.”

     

    “아무렴요.”

     

    프레다가 깜찍하게 치맛자락을 들어올리며 윙크를 했다.

     

    그래도 선을 확실히 그은 덕에 헛짓은 안 할 모양이었다.

     

    ‘…잠깐만.’

     

    프레다를 보니 아셀라는 급격히 불안해졌다.

     

    ‘…혹시 라스가 일 때문에 늦어서 끝까지 나타나지 않으면.’

     

    나도 쟤랑 똑같은 처지가 되잖아.

     

    약혼식에서 혼약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건 차였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그것도 상대 가문에 굴욕을 줄 정도로 좋지 않은 감정이 있다는 의미.

     

    설령 진실이 아니더라도 사교계에는 그리 보이게 된다.

     

    ‘후우.’

     

    아셀라는 속으로 심호흡을 했다.

     

     

     

    여섯 시부터 본격적인 파티가 시작됐다.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고, 연회장에는 화려한 조명과 함께 모든 손님이 모였다.

     

    ‘…라스.’

     

    아셀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도 그가 나타낼 기색은 없었다.

    오프닝을 그의 성인식으로 하겠다는 기획은 진즉에 물 건너갔다.

     

    10분, 20분.

     

    1초 1초마다 애간장이 타들어간다.

     

    한 시간이 지나도 본격적인 식이 시작하지 않자 연회장의 분위기는 확연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금은 본래 식이 끝나고 정찬으로 들어가야 했을 시간이거늘.

     

    그렇다고 순서를 바꿀 수도 없다.

     

    식사 후에 입을 쩝쩝대고 트림을 하는 이들 앞에서 중요한 승계 쟁탈 참전 선언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공자는?”

     

    “아직 내의원에서 못 나오셨다고…”

     

    “그래.”

     

    더 이상은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한 아셀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녀장이 신호하니 웅장한 음악과 함께 조명이 2층 발코니를 비춘다.

     

    관객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아셀라는 눈매를 바로 고치고 당당하게 밝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둠 속에 가려져있던 옥체가 빛을 받아 반짝이니 모든 귀족이 자신에게 예를 표한다.

     

    그들을 내려다보며 아셀라는 당당하게 선언했다.

     

    “묻겠노라. 본녀가 누구인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타루_822님 후원! 저도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더 열심히 하기를 목표삼고 있습니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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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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