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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7

       그 후 며칠이 흘렀다.

        

       그리고 그 며칠 안에 대단히 바뀐 것은 없었다.

        

       여전히 학생들 대다수는 나를 무시했고, 선생들은 내 반응을 보면서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더 심해지긴 했어도, 기존에 나를 대하던 것과 크게 다르게 대하지는 않았다.

        

       이유는 알고 있다.

        

       내가 교내에서 날뛰는 빈도가 눈에 띄게 줄었기 때문이다.

        

       나는 종종 수업 도중에 당당하게 나가서 한가람 팀장에게 가 보고를 들었고, 소희는 여전히 책상을 놓는 자리가 아닌 곳에 책상을 두고 수업받고 있었다. 하늘이는 쉬는 시간이면 내 앞자리를 빼앗아 앉아 나에게 공부를 가르쳐주었다.

        

       딱 이 정도의 민폐를 제외하면, 나는 확실히 얌전하게 지냈다. 적어도 교실 안에서 애정행각을 벌이거나 선생 머리에 물을 뿌리거나, 수업을 방해하는 일은 거의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선생들이 한편으로는 안도하면서도 나를 볼 때는 늘 불안한 눈을 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게 많은 뇌물을 먹어놓고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그런데도 내가 자신들에게 대놓고 불이익을 주지는 않았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

        

       ……사실, 저 사람들이 들으면 기겁할 이야기이긴 하다만, 그 십수억 원은 소희가 무사히 이 학교에 입학하고 내 옆자리를 차지하는 데 쓴 돈이라고 생각하면 크게 아깝지는 않았다. 어차피 뇌물을 가지고 물고 늘어지면 이쪽도 피곤해진다.

        

       학교 안에 확실한 내 편이 늘었다는 것, 그리고 교사들이 함부로 나를 무시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일단은 만족하기로 했다.

        

       아무튼, 그래서 지금 당장은 내 생활에 ‘크게’ 바뀐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뀐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그래, 식당에서 우리가 늘 앉는 둥근 테이블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푸른 머리의 여학생.

        

       손아름이 우리 편에 합류한 것이다.

        

       ……음, ‘편에 합류했다’라는 표현은 조금 그런가? 애초에 여기 있는 우리가 누구 편 가르려고 모여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조금 더 쉽게 말하자면 ‘친구가 되었다’라고 표현하는 쪽이 더 맞겠지.

        

       아무튼, 그 착실한 선도위원은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인지 이틀째 되던 날, 점심을 먹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교내에서 폭력을 행사하거나, 따돌림을 주도하는 것도 명백한 교칙 위반이잖아?”

        

       그렇겠지?

        

       나는 십 대 때 내가 다니던 학교에 ‘교칙’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살았다. 내가 법조차 필요 없을 정도로 착한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애초에 ‘교칙’이라는 것의 존재감이 그만큼 엄청나게 희미하다는 것이다.

        

       그래, 당연히 교내에서 누굴 때리면 교칙 위반이겠지. 학교 내에서 누굴 때려도 된다는 교칙을 만들어 배틀로얄을 벌일 것도 아니고. 당연히 따돌림을 주도하는 것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쓰여있긴 할 것이다. 돈 많은 애들이 다니더라도 여기도 일단은 학교였으니까.

        

       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손아름은 포크로 고기 한 조각을 찍으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교내 따돌림은 단순히 벌점으로 처리할 사안도 아니야.”

        

       그러고 보니 내가 학교 다니던 때에도 가끔 학교 앞에 학교폭력 집중단속 기간 같은 현수막이 걸려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진짜로 단속하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그래서?”

        

       소희가 재촉하듯 물었다.

        

       “무슨 방법이라도 있어?”

        

       “징계 위원회를 열어야지.”

        

       “…….”

        

       그 말에, 나를 포함한 나머지 네 명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눈빛에 회의감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게, 지난번에는 일부러 손아름을 따라갔는데도 완전히 무시당해버렸기 때문이다.

        

       무려 학생회장이라는 사람은 나를 없는 인간 취급해버렸다.

        

       인제 와서는 그럭저럭 익숙해진 취급이었지만, 사실 그렇다고 해서 유쾌한 기분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예사라를 망가뜨린 것도 그런 취급 때문이었고, 나 개인적으로도 기분이 좋은 취급은 아니었으니까.

        

       “아, 이번에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는지, 손아름은 그렇게 말했다.

        

       “벌점을 너희에게 먹이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학생들한테 먹이려는 거니까.”

        

       “그게 그거 아니야?”

        

       나는 되물었다.

        

       어차피 나 관련된 이야기라면 죄다 무시해버리는 학교인데, 다른 학생들이 날 괴롭혔다고 벌점을 먹이려고 해 봐야 그냥 ‘그런 일 없었다’고 하고 넘어가 버리는 거 아닌가?

        

       “당연히 그렇겠지.”

        

       손아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를 괴롭혔다고 했다면, 당연히 그럴 거야.”

        

       손아름이 말한 ‘너’는 당연히 나를 말하는 거였다.

        

       “나 아니면, 누구?”

        

       내 질문에, 손아름은 고개를 살짝 돌려 내 옆에 앉아있는 소희를 바라보았다.

        

       참고로 손아름은 우리와 말을 편하게 하게 된 뒤에도 소희에게 제발 단추 좀 잠그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지만, 소희는 철저하게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했다. 이제는 슬슬 따뜻해지고 있기는 했지만, 날씨가 풀리기 전부터 그런 모습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추위는 별로 타지 않는 모양이다.

        

       ……아니면 정말로 답답하다는 것이 이유일지도 모르고.

        

       “나?”

        

       소희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래.”

        

       “내가 괴롭힘당한 적이 있었던가?”

        

       그러게. 역으로 괴롭혔으면 또 몰라. 소희는 그 이후로도 몇 명에게 시비를 걸었었다. 길 가다가 부딪혔는데 아무 말도 없이 지나가던 학생의 멱살을 잡……지는 않았지만, 거의 그럴 기세로 몰아붙인 적도 있었고, 선생이 출석 체크 중에 내 이름을 부르지 않자 보는 앞에 대놓고 투덜거린 적도 있었다.

        

       누가 봐도 말 안 듣는 양아치의 전형인 행동들이었다. 본인은 별로 신경 쓰지도 않는 것 같지만.

        

       그 와중에도 꿋꿋하게, 눈물이 고이면서도 소희를 무시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지만.

        

       하긴, 돌고 있는 소문들을 들어보면 차라리 양아치한테 몇 대 맞고 끝나는 쪽이 훨씬 다행인 일이긴 했다. 아무리 그래도 소희가 그런 짓을 하지는 않았지만.

        

       “너무 억지 아니야? 나는 그렇게까지 괴롭힘당한 기억이 없는데.”

        

       그래, 남들 시선을 거의 신경 쓰지 않는 소희라면, 관심도 없는 애들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 정도는 별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괴롭힘이라는 것은 보통 피해자가 괴롭다고 생각해야 괴롭힘이라는 인식이 있다. 말해도 콧방귀도 뀌지 않을 텐데.

        

       “그래, 바로 그게 맹점이야.”

        

       하지만, 손아름은 그 말을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괴롭힘당했다고 생각하는지, 아닌지는 가해자가 판단하는 게 아니라 피해자가 판단하는 거니까.”

        

       “…….”

        

       그 말에, 우리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손아름은 우리가 생각하도록 그대로 두었다.

        

       제일 먼저 침묵을 깬 것은 하늘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남들이 그대로 무시해버리면?”

        

       하늘이는 직접적으로 무시당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이 ‘무시하기’를 집단 따돌림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증언도 필요하고, 나름대로 증거도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생각만큼 얻는 것이 쉽지 않다.

        

       동영상이라도 찍어볼까 생각해본 적은 있지만…… 그저 ‘상대가 반응하지 않는 것’을 영상으로 찍는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관심을 둘지 알 수 없다.

        

       게다가 내가 교내에서 벌인 일들은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뀌어 보이기에 충분하기도 했고. 당장 눈앞에 있는 손아름이 그 예시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쟤가 피해자가 되는 거지.”

        

       손아름은 굳이 소희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

        

       이야기를 듣고 있던 수아가, 뭔가 알아차렸다는 듯 탄성을 질렀다.

        

       “무슨 이야기야?”

        

       소희가 그런 수아를 흘끗거리며 물었다.

        

       “……이런 걸 대놓고 물어보기는 조금 그렇지만.”

        

       손아름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너, 이 학교에 들어오면서 큰돈을 썼다면서?”

        

       “뭐, 그렇지.”

        

       소희가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인정하자, 손아름은 이마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너무 쉽게 인정하는 거 아니야?”

        

       “니가 들었을 정도면 내가 감춘다고 감출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게다가 나는 이 학교 온 첫날에 이미 전부 까발려버렸거든.”

        

       그래서 선생들이 소희나 나만 보면 안절부절못하고 있고.

        

       아.

        

       손아름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대충은 알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왜?”

        

       “그런 돈을 썼으니까, 너를 함부로 무시하지는 못할 거잖아. 내가 듣기로는……”

        

       십억 넘는 돈을 썼지.

        

       서민 기준으로는 그건 전 재산이 될 수도 있는 돈이었다. 그것도 사는 집의 부동산 가격까지 합쳐서.

        

       “아하.”

        

       소희는 그제야 그렇게 중얼거린 뒤,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사악하게 씩 웃어 보였다.

        

       “뭐야, 너. 생각보다 똑똑하네?”

        

       “‘생각보다’라니…….”

        

       소희가 한 말에 상처받은 듯 그렇게 중얼거리는 손아름을 보면서, 나도 마음속으로 사과했다.

        

       미안, 나도 조금 그런 식으로 생각했어.

        

       뒤에 쫓아다니는 걸 보고 좀 생각 없는 애가 아닌가 고민했었다. 특히 어디에 숨는답시고 몸을 숨기고 있는 모습을 봤을 때.

        

       ……하긴, 얘도 장학금으로 들어온 외부 입학생이었지. 두뇌 회전은 그렇다 쳐도, 공부는 하늘이 급으로 잘한다는 뜻이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가 이런 방법을 떠올리지 못한 이유가 있다.

        

       학교 내에서 우리 편을 대놓고 들어주는 학교 중추에 소속된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공략 대상으로 추정되는 학생회장마저도 나를 눈앞에 두고 없는 사람 취급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이런 계획을 말해주는 상대는 무려 선도위원이었다.

        

       벌점을 직접 주고 선생에게 징계 건의를 올릴 수 있는 인물.

        

       “뭐, 뭐야? 왜 그런 눈으로 봐?”

        

       우리 네 명이 다시 봤다는 눈으로 손아름을 바라보자, 손아름은 잠시 당황한 듯 그렇게 되물었다.

        

       “아냐, 그냥 꽤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그렇게 말하자, 손아름은 조금 멋쩍은 표정으로 크흠, 하고 헛기침했다.

        

       “……사실, 뇌물이니 뭐니 하는 것들도 원래는 다 따지고 넘어가야 하는 거지만…….”

        

       “흐응.”

        

       소희가 턱을 괴고 앉아 능글맞게 웃으며 손아름을 보며 말했다.

        

       “지금은 친구니까 봐주겠다? 정의로운 선도위원님치고는 너무 부패한 생각 아니야?”

        

       “…….”

        

       생글생글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소희를, 손아름은 찌릿 노려보았지만 별로 무섭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원래 얼굴이 귀여운 상이라서 그런 걸지도.

        

       “지, 지금은 우선 눈앞에 있는 악을 먼저 상대할 뿐이야!”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악이 우리 아니었어?”

        

       소희가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말하자,

        

       “어, 아니, 그러니까…….”

        

       손아름은 나를 보면서 다시 패닉에 빠졌다.

        

       ……애 또 울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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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Q악역 영애가 되긴 싫어
Status: Completed Author:
I fell into the single-player game 'If You Wish' and decided to struggle to avoid becoming a villainess with a terrible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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