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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7

       “……흑왕?”

       “응?”

       “왜 그러는 건가, 아르노?”

       “아, 아닙니다. 아무것도….”

       “??”

       “…….”

         

       불법 도박장을 지키는 귀찮은 번견들을 처리하던 아르노는 쿤타의 물음에도 멍한 기색을 보이며 눈을 끔뻑였다.

       일순 흑발머리의 소년의 뒤에서 검은 사자가 보인 것 같았기에.

         

       ‘북부의 흑왕? …조모님의 말씀대로라면, 계승자가 죽지 않는 한 흑왕을 계승할 수 없는 것으로 아는데…. 착각인가?’

         

       그의 조모. 검공 펠리시아는 어린 그를 무릎에 앉혀두고 무수한 옛 얘기를 들려준 시절이 있었다.

       그중 인상 깊었던 옛이야기가 다름 아닌 라이오넬의 신비, [흑왕].

         

       오로지 라이오넬만이 가질 수 있다는 최상의 신비 중 하나이며, 그 힘은 오러 유저와도 맞먹는다고 전해지는 바.

         

       허나 그 신비를 계승하기 위해선 오로지 당대 계승자가 죽거나, 혹은 강탈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아르노였고, 그렇기에 저것이 허상이라 여겼다.

         

       아니면 전날 보여줬던 검기상인처럼 로엔 공자가 가진 특별함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보며 애써 아르노는 자신의 헛생각을 집어넣었다.

         

         

       흑왕이, 유일해야 할 신비가 어찌 동시에 두 마리나 존재할 수 있겠냐며….

         

       * * *

         

       ……로엔, 그가 ‘답’에 도달한 것은 생긴 것과 달리 감이 좋은 기사처럼 부모의 도리를 따진 덕이 아니었다.

         

       그가 답에 도달한 과정은 우수한 수하가 건네준 정보와, 과거, 그러니까 인생의 1회 차를 통한 ‘기억의 답습’ 덕분에 알아낸 것에 가까웠다.

         

       트리스탄 후작.

       귀족들이 모두 신전과 한 편을 먹고 백성을 탄압할 때, 백성의 편에 선 대귀족.

       그가 합류해준 덕분에 혁명군이 얼마나 큰 힘을 얻었는지 모를 것이다.

         

       그리고 혁명군의 간부 중 한 명이자 대표자 격이었던 로엔이 후작과 우애를 나누게 되는 것도 당연한 과정이었다.

       어찌 됐건 그는 라이오넬이었고, 후작은 트리스탄이었으니까.

       오래 전부터 나눠온 인연이란 것이 있기에 대화가 잘 통했고, 서로 자주 대화를 나누는 게 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게 알게 된 것은.

         

       – 제니미아 공. 제발 부탁이니 혁명군의 여성들을 유혹하지 좀 마시오.

       – 허허, 오해이네 대공. 난 그저 오는 여자 막지 않고, 가는 여자 막지 않을 뿐. 자유롭게 살 뿐이라네.

       – …하아!

         

       존경스럽지만 존경스럽지 않은 어른이란 사실이었다.

         

       골이 아프게도, 제니미아 후작의 말대로 딱히 제니미아 후작은 여성을 먼저 유혹하지 않았다.

         

       …단지 여성들이 먼저 그에게 다가갈 뿐.

         

       50대를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30대 초반에서 중반으로 보이는 동안이며, 중성적인 외모를 가진 그는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사뭇 여성들을 설레게 하는 존재였다.

         

       하여 뜻밖에도 여성들이 먼저 후작을 찾아가 유혹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고, 이 때문에 로엔은 골이 아팠다.

         

       혁명군에서 치정 싸움이 웬 말이냐며….

         

       – 왜 당신이 난봉꾼으로 불렸는지 알겠군.

       – 이상하게 그런 오해가 생기더군.

         

       제니미아 후작이 난봉꾼으로 불린 이유는 딱히 그가 자처해서 생긴 별명은 아니었다.

       그가 말했던 대로 오는 여자 막지 않고, 가는 여자 막지 않는 그의 성정 탓에 생긴 별명이었지.

         

       물론, 제3자가 보기엔 충분히 바람둥이나 난봉꾼의 그것이 맞았지만.

         

       – 차라리 혼인을 치를 것이지, 왜 그리 사는 것이오…. 혹시, 소문대로 아이를 낳으면 불능이 되어서 그런 겁니까?

         

       로엔은 결례임을 알지만 물었다.

       그가 한 명의 여성을 진득하게 사귀지 않고 이토록 방탕하게 사는 이유가 혹, 정말로 불능이 된다는 소문 때문인지.

         

       허나.

         

       – 아, 그 소문 말인가? 그거 헛소문이네.

       – ?

       – 아무렴 헛소문이지. 아이를 낳으면 불능이 된다니…. 그럼 베일 경 같은 방계는 어떻게 태어난단 말인가? 헛소문도 앞뒤가 맞아야지, 원.

       – 그, 그럼….

       – 그 소문은 그냥 날 음해하려는 귀족파 놈들이 뿌린 소문일세. 길드한테도 뿌려서 완전히 진실처럼 굳어져버렸더군. 그래서 딱히 정정하지도 않았네만, 설마 믿는 놈들이 이토록 많을 줄은 나도 몰랐지, 흘흘.

       – …….

       – 그리고 내가 진득하게 한 사람을 사귀지 않거나 아이를 낳지 않은 이유는 별게 아니라네. 아마 대공도 알겠지만, 높은 경지에 이른 기사가 되면 웬만한 여자는 기사가 가진 기운을 버티지 못한다네. 즉, 내 기운을 버텨내지 못하여서 여인들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뜻이지.

       – 그, 그럼 젊을 때는….

       – 변명 같겠지만, 젊을 적에는 정말 여자를 만날 시간이 없었네. 선왕과 항상 전쟁터만 전전하는데, 여자를 만날 시간이 어디 있을까? 뭐, 그 이후 전쟁이 끝나고도 한동안 가문을 다스리느라 바빴다네. 농담이 아니라 귀족파 놈들 때문에 트리스탄이 반으로 쪼개진 상태였거든, 허허.

       – …….

       – 뭐, 어쨌든 아쉬운 일이지. 나와 결혼까지 생각한 그들에겐 미안할 뿐이고. 하지만 난 어느 여인이라도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네. 아이를 설령 낳지 못하더라도 나와 백년해로하겠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했을 게야, …단지 어느 여인이고 후계자를 낳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가버리더군. 결국 그녀들은 나를 원하거나 사랑한 게 아니라, 후작가의 진정한 안주인이 되고 싶었다는 것이겠지, 허허.

       – …….

         

       로엔은 그의 얘기를 들으며 수긍하면서도 차마 수긍할 수 없었다.

       안쓰럽지만 동시에 안쓰럽지 않다고 해야 할까?

         

       – 그러니 자네는 나처럼 되지 말고, 얼른 젊을 때 결혼해서 아이를 낳게.

       – …하, 걱정은 마십시오. 이미 대공가의 핏줄은 충분히 많으니.

       –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네만…. 아, 그래도 충고는 하나 해줄 수 있겠군. 만약 결혼을 할 거면 말일세. 상대가 나를 속이지 않았는지를 봐두게나.

       – 무슨 뜻입니까?”

       – 한때 결혼까지 할 뻔한 여아가 있었는데 말일세, 글쎄 그 여아가 제 집안과 함께 나를 속이고 있더군! 나만 속았다면 모를 일이겠지만, 트리스탄 자체를 모욕한 괘씸한 아이가 아닐 수 없었지!!

       – 어떤 일을 했기에….

       – 그것까진 입에 담지 않겠네. 이미 그 여아는 내가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죗값을 치렀다고 하니. …후우, 나도 더는 그 여아를 모욕해선 안 되겠지.

       – …?

       – 어쨌건, 결혼을 할 거면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와 하게나. 그게 행복으로 가는 길이니까.

       – …다른 사람이 조언했다면 공감이 갈 테지만, 제니미아 공이 그런 조언을 하니 전혀 심금이 안 울리는군요.

       – 뭐야? 이런 건방진 어린놈을 보게, 허허허!

         

       ……이런 대화가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제니미아 후작은 ‘전사(戰死)’했다.

         

       갑작스럽게 쳐들어온 마물의 대군을 홀로 막아내며 혁명군을 대피시킨 그였고, 홀로 나흘을 버틴 끝에 전사한 것이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용병 총수로 취임한 어느 여인을 만나며 후작의 빈자리를 채웠지만, 당시 로엔은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그는 비록 여러 소문이 있을지언정, 믿을 수 있는 연장자임은 분명했기에.

         

       …하여 로엔이 처음 레비 폴트와 후작의 관계를 들었을 때 두 귀를 의심했었고, 레비 폴트가 과거의 제 동료인 ‘용병 여왕’임을 깨닫자마자 조각난 퍼즐이 맞춰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연결 고리.

         

       모든 것은 이어졌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잭이 알아온 정보를 통해 ‘5년 전’만 해도 폴트 가에는 딸이 한 명뿐임을 알게 되는 순간 그의 머리는 마치 극작가마냥 이야기를 하나 만들었다.

         

       복종의 각인에 의해 자신의 모든 것을 숨기고 후작가로 팔려갔을 소녀.

       하지만 후작가는 결코 무능하지 않을 것이며 기어이 소녀의 신상정보와 레이놀 폴트의 음흉함을 알았을 터.

       레이놀 폴트를 죽여도 상관은 없으나, 대놓고 죽이는 건 대귀족의 방식과 맞지 않다.

       아마도, 천천히…. 피를 말리듯이 타락시키고 죽였으리라.

         

       허나 반대로, 소녀는 어찌 됐을까?

         

       정체가 탄로 난 것도 모른 채, 그저 순종적으로 명령을 들을 뿐인 불쌍한 소녀의 삶은 말이다.

         

       ‘……지옥 같았겠지.’

         

       언제 자신의 정체가 들킬지 모른다는 초조함과 두려움, 허나 명령을 거스를 수 없는 현실에.

         

       빠드득!

         

       로엔은 이를 악물었다.

       허나 그런 로엔의 분노도 모른 채.

         

       “우, 웃기지 마라! 대, 대체 내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단 말이냐! 내, 내가 위법을 저질렀다고 해도, 난 귀족이다! 귀족이란 말이다! 그깟 노예 년 하나 팔아넘긴 게 대체 뭐가 죄냔 말이다!!!”

         

       역겨운 사내는 비명을 내지르듯 소리쳤다.

       자신이 대체 뭘 그리 잘못했냐는 듯이.

         

       저 말이 더욱 그의 화를 돋우는 줄도 모르며.

         

       그렇게.

         

       “죄를 알려달라 했나-?”

         

       로엔은 친히 놈의 죄목을 알려주기로 하였다.

         

       “…네놈은 네 개의 죄를 저질렀다. 하나는 국법을 어기고 감히 노예를 사, 한 사람의 인생을 농락한 죄!”

         

       콰직!!

         

       “끄아아악!!”

         

       팔이 으스러졌다.

       뼈가 가루가 되도록 짓밟혔고, 신성력으로도 회복시킬 수 없으리라.

         

       “두 번째는 감히 한 소녀의 인생을 농락해놓고도 죄책감도 없으며, 소녀를 판돈으로 다시금 도박이나 하고 있는 죄!”

         

       싹둑!

         

       “…!!!?”

         

       그의 혀가 잘렸다.

       앞으로 레이놀은 그 더러운 입으로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되었다.

         

       “세 번째는 감히 후작가를, 아니 더 나아가 이 나라에 충성하는 고결한 귀족을 속인 죄!”

         

       서걱!

         

       …레이놀은 더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발목 두 개가 사라졌으며, 그는 더는 이제 제 의지로 일어서지 못할 터,

       그렇게 레이놀은 온몸을 덮쳐오는 고통에 참지 못하며 기절을-.

         

       “그리고 네 번째…. 감히 거짓을 말하고 다닌 죄다! 기사가 되겠다고 했나? 기사 가문으로 재기를 꿈꾼다고 했나! 한데 그런 자의 손이 이토록 깨끗한 게 말이나 되느냔 말이다-!!”

         

       [크르릉!]

         

       레이놀의 손은 고왔다.

       평생 청소 한 번 해본 적이 없으며, 그저 카드놀이나 했을 법한 깨끗한 손.

         

       기사가 되겠다는 자가 저럴 수는 없다.

       굳은살조차 없는 저 손이 어찌 노력하는 자의 손이라고 말할 수 있으랴.

         

       결국.

         

       “네놈의 삶과 언어에는 결국 거짓밖에 없다. 어떠한 진실도 없어!”

         

       남을 속이고.

       농락하며.

       편하게 살 생각밖에 없는 거머리나 기생충과 같은 자.

         

       허면 그런 제 주제를 알고 남에게 피해나 끼치지 말아야지 자신이 가진 것 이상을 원하며 산다.

         

       “…네놈을 죽이고 싶으나, 죽이진 않을 거다. 그건, 너무 자비로운 처사이며, 내겐 너를 심판할 자격이 없으니까.”

         

       하여.

         

       “이 정도로만 끝내도록 하마.”

         

       후욱!

         

       “으으으읍!!”

         

       화르르륵!

         

       혼절 직전이었던 레이놀의 몸이 미치도록 버둥거리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는 불속에 던져졌고, 온몸에 불이 붙고 말았다.

       기절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을 화마의 고통!

         

       “!!?…!!!”

         

       맨정신으로, 도망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몸 상태로 레이놀은 몸부림쳤으나, 로엔은 정말 딱 죽지 않을 때까지만 그를 불에 내버려 둘 마음이었다.

       그도 그럴 게.

         

       “너로 인해 불속에서 몸부림쳤을 내 동료의 고통을, 너도 똑같이 느껴봐라.”

         

       화르르륵!

         

       인과응보.

         

       놈은 지은 죗값을 이제야 받고 있을 뿐이니까.

         

       “잔, 드디어 너를 보낼 수 있겠구나….”

         

       너무 멀리 돌아온 게 아닐까 싶으나, 로엔은 이제야 옛 동료의.

         

       ─다신 볼 수 없을 전우를 위한 애도를 하게 되었음을 깨달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너무 늦어버린 애도에 대한 죄책감과 함께.

         

         

       화르륵!

       

       


           


30 Years After Reincarnation, Turns Out It Was a Romance Fantasy?

30 Years After Reincarnation, Turns Out It Was a Romance Fantasy?

환생 30년, 알고 보니 장르가 로판이었다?
Status: Ongoing Author:
30 years after reincarnation, turns out the genre was romance fantasy? ...Really, how? I lived as a magician's slave, experimented on, then as an assassin, mercenary, soldier, and even a knight. This is a story where I'm in a genre all by my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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