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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7

   발하임의 주천 기사단이 8성급 침식종 아가레스를 쓰러트렸다는 소식이 전 세계에 퍼졌다.

   마경에서 벌어진 사안인 만큼, 세계 각지가 당연히 마경의 상황을 주목했다.

     

   동시에 사람들은 역시 발하임이라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발하임의 직계인 릴리쉬 발하임에 관한 평가가 더더욱 상승했다.

     

   8성급 침식종을 기사단 중 단 한 명의 죽음 없이 잡아내다니.

   누가 뭐래도 그녀의 능력을 증명한 사건이었다.

     

   오죽하면 그녀가 차기 천하십강 중 한 명이 될 거라며 이야기가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 뒤편.

   누구보다 필사적으로 아가레스와 맞선 한 인물이 있었다는 것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본인이 정체를 숨기려 했기에 릴리쉬도 일단은 크라슈가 눈을 뜨기 전까지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신성 왕국은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그렇게 세간의 소란이 잦아들 때쯤.

   신성 왕국의 치료 병실에서 크라슈가 눈을 떴다.

     

   「당신은 혼자 두기 그런 사람이니까. 매일 꿍해 있지만 말고, 좀 나와봐. 여기 바로 앞에 축제하니까. 그거 나랑 흠흠, 둘이서 같이 보러 가자.」

     

   치료 병실의 천장을 크라슈가 잠시 바라보았다.

   꿈에서 스치듯 떠오른 기억이 눈을 떠서도 잠시 아른거린 탓이다.

     

   태양 빛으로 선명히 빛나던 머리카락과 아닌 척하면서도 부끄러움을 숨기지 못하던 여성.

     

   「알아. 또 누가 저주에 걸려 왔잖아. 당신만 봐도 잘 알아. 아는데. 하루 정도는 당신의 삶을 좀 더 우선시할 수도 있는 거잖아.」

     

   그리고 그날 나가지 못했을 때 얼굴에 애써 실망감을 참던 모습까지.

     

   그 뒤로 둘 다 서로 대화하는 일이 적어졌다.

     

   크라슈는 떠오른 기억을 고개를 털어 지워내었다.

     

   그러곤 스르륵 몸을 일으키자 몸에서 느껴지던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진 상태이었다.

   이 느낌, 역시 그 녀석이 치료해 준 거겠지.

     

   [ 아주 살판났구나. ]

     

   크라슈는 들린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햇빛이 내리쬐는 창문가에 앉은 까마귀가 있었다.

     

   크림슨가든이었다.

     

   “살판나지. 숨넘어가는 줄 알았으니까.”

   [ 그걸 아는 주제에 그렇게까지 무리를 한 거냐? ]

   “아가레스를 잡았잖냐.”

     

   크라슈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멸망의 시초 중 하나인 녀석을 죽였으니 속이 다 시원했다.

     

   [ 한 가지만 묻자. ]

     

   그러는 순간 크림슨가든이 크라슈의 앞에 다가왔다.

     

   [ 너는 뭐 때문에 이토록 필사적인 게냐. ]

     

   크림슨가든은 분명 크라슈가 회귀자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눈에도 크라슈의 집념은 비정상적이었다.

     

   크라슈는 광기에 가깝게 모든 일에 필사적이었다.

   그것도 자기 몸을 조금도 아끼지 않으면서 말이다.

     

   크림슨가든은 크라슈가 회귀하게 된 과정을 모른다.

   그렇기에 그에게 물었던 것이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냐고.

     

   크라슈는 그 질문에 아서를 떠올렸다.

   예전에 누군가 아서에게 이처럼 비슷한 질문을 던진 적 있다.

     

   물론 그때 그가 그 질문을 던진 이유는 크라슈와 달리 아서가 너무 냉혹하기 때문이었지만.

   어쨌든 같은 질문을 받았다는 사실은 같다.

     

   거기서 아서는 이렇게 대답했다.

     

   「말해준다 한들 네가 알 수 있을 거 같나.」

     

   어느 사람이든 자신이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을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아서는 말했다.

     

   멸망을 목전에 두고, 회귀해 보지 못한 네가 무엇을 아냐고.

     

   그렇기에 아서는 주위를 소모품으로서 여겼다.

   냉혹하게 사람을 말로써 사용했고, 자신의 옆에는 절대 배신하지 않을 말로만 채웠다.

     

   크라슈도 다르지는 않았다.

   아서보다 조금 덜할 뿐 그 또한 사람을 장기 말처럼 사용했다.

     

   단지, 크라슈의 장기 말에는 자신 또한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크라슈가 살아온 삶에서 그는 자신을 우선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저주를 훔쳐주는 소모품이라는 자각은 자신에게도 있었으니까.

     

   그러니 크라슈는 회귀를 한 지금도 똑같았다.

   살아온 삶 속에 자신조차 장기 말로 여기는 생각이 뿌리 깊게 박혀 버린 것이다.

     

   「하루 정도는 당신의 삶을 우선시 할 수도 있는 거잖아.」

     

   꿈속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크라슈는 크림슨가든을 바라보았다.

     

   과연, 그녀에게 멸망을 알려주면 어떻게 될까.

   자신처럼 필사적으로 변할까.

   혹은, 초연하게 받아들일까.

     

   모르겠다.

   단지, 크라슈는 입을 열었다.

     

   “내가 나로 사는 데 필요한 일이야.”

     

   크라슈가 자신을 위해 살 수 있을 때는 단 하나.

   멸망을 막는 것뿐이었다.

     

   [ ……. ]

     

   크림슨가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크라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내 조용히 한숨을 머금은 그녀가 날개를 펼쳐 창문으로 날아올랐다.

     

   [ 아카데미에 가기까지 반년 조금 안 남았다. ]

     

   침묵하던 크림슨가든의 말이 이어졌다.

     

   [ 가기 전까지 죽도록 단련시켜 줄 테니, 그리 알아라. ]

     

   이윽고, 그녀는 창문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크라슈는 잠시 웃고 말았다.

     

   참, 크림슨가든다운 말이었다.

     

   덜컹-

     

   그 순간 치료 병실의 문이 열렸다.

   거기에는 물수건과 그릇을 들고 있던 비앙카가 있었다.

     

   아직 크라슈를 못 본 듯 조용히 문을 닫던 그녀가 곧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크라슈와 눈이 마주치자.

     

   댕그랑!

     

   물이든 철 그릇을 그녀가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걸 본 크라슈가 멈칫하였다.

     

   비앙카에게 분명 무사히 가겠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심한 꼴로 돌아왔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사이 비앙카가 천천히 다가왔다.

   평소와 같이 무표정한 비앙카는 곧 크라슈 앞에 오더니 양손을 쭉 펼쳤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린 크라슈는 쓰게 웃곤 비앙카의 팔 아래로 자신의 양팔을 뻗었다.

   그러곤 그대로 비앙카의 등을 감싸 안아주었다.

     

   크라슈의 품에 안긴 비앙카가 조용히 몸을 떨었다.

   

   

   

   

     

   “미안.”

     

   크라슈가 사과하자 비앙카는 말없이 그의 품에 더 파고들 뿐이었다.

   그런 비앙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으니 비앙카가 말했다.

     

   “크라슈 님이 말한 선생님 소개해 주세요.”

     

   결국 이렇게 되나.

     

   “그래.”

     

   아카데미 가기 전까지 같이 수련해 보는 것도 괜찮겠지.

     

   끼익-

     

   그러는 순간 또 한 번 문이 열렸다.

   거기에는 면사포를 뒤집어쓴 복숭앗빛 머리카락의 여성과 천구성 블라비가 있었다.

     

   “정말 깨어나는 것만 보고 돌아가겠다니까요. 소녀도 책임이 있는걸요. 여기서는 세피라의 일원으로서, 어, 일어났네요!”

     

   세피라에 연락받은 듯, 손에 든 마법 기기와 대화 중이던 세이랑이 이쪽을 보았다.

   그러곤 이내 기기를 넣고 오다가 크라슈의 품에 안긴 비앙카를 보곤 씁쓸히 웃었다.

     

   “그분, 많이 걱정하고 우셨어요. 좀 많이 달래주셔야 할 거예요.”

   “달래던 도중에 들어온 게 넌데.”

   “이 안쪽의 상황은 점성술로도 안 보이거든요.”

     

   진심이었지만 크라슈는 농담으로 여겼다.

     

   “그보다 발하임 직계인 걸 숨기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요?”

   “안 물어봤잖냐.”

   “그거야…….”

     

   세이랑은 입을 다물었다.

   안 물어보긴 했으니 말이다.

     

   “그보다 호위를 보내줘서 고맙다.”

     

   블라비는 청해 기사단이 마경을 나오기도 전에 아가레스까지 도달했다.

   그것만 봐도 그가 세이랑의 명을 얼마나 충실히 이행했는지 알 수 있었다.

     

   ‘블라비를 좀 기다렸으면 더 쉽게 잡았을지도 모르겠다만.’

     

   그거야 결과론 이야기지.

   블라비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 마당에 체력을 더 소모할 수는 없었다.

     

   “됐어요. 그런 거래였으니까요. 거래가 아니었어도 소식을 들었으면 보내긴 했을 테지만요.”

     

   그녀는 미르비스가 말한 것이 떠올랐는지 몸을 파르르 떨었다.

   크라슈는 그게 뭔지 잘 알았기에 딱히 동정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저 녀석이 바로 에벨아스크가 자주 보던 관능 소설의 집필자였으니까.

   그녀의 세 번째 서랍에 숨겨져 있는 것은 그녀가 집필한 관능 소설이다.

     

   세피라의 공주면서 뒤에서는 관능 소설 집필자라니.

   처음 그녀의 방을 살피다 나왔을 때 어찌나 어이없던지.

     

   ‘그걸 이렇게 이용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크라슈는 이제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그래서 다른 거래 쪽은?”

     

   비앙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묻자 세이랑이 침묵했다.

   수상할 정도로 많은 것을 알고 있는 크라슈다.

     

   그러니 크라슈가 말한 그녀의 죽음 예고도 마냥 거짓이 아니란 걸 그녀도 안다.

   이래저래 고민하던 그녀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애초에 처음부터 저희 쪽에 손해는 없는 거래였으니까요.”

     

   크라슈가 원한 건 천살성이다.

   천살성 하나 없어졌다고 블라비가 세이랑의 곁을 떠날 만큼 그와 세피라의 연은 적지 않다.

     

   그러니 그녀도 선뜻 내줄 수 있었다.

     

   “그보다 당신은 괜찮나요? 소녀에게 그렇게 많은 사실을 알려줘도요.”

     

   크라슈가 스킬을 세 개나 지녔단 사실을 세이랑은 알고 있다.

   거기다가 그중 하나가 스킬을 훔칠 수 있는 스킬이란 것도 말이다.

     

   하지만 크라슈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이렇게 나아가다 보면 결국 알려질 것들이기도 하고.

     

   “네 비밀을 너도 들키고 싶지는 않지 않냐.”

     

   세이랑이 멈칫하고 몸을 굳혔다.

   세이랑이 블라비를 보내준 시점에서 그녀는 그것이 자신의 치부라 인정하고 말았다.

     

   그러니 절대로 어디에다가 크라슈의 비밀을 알리고 다니지 못할 거란 소리였다.

     

   “저희는 비밀 공동체라는 소리네요.”

     

   세이랑이 애써 웃음을 지었다.

   공동체란 말에 왜인지 비앙카가 좀 더 강하게 안는 느낌이 들었지만, 크라슈는 내버려 뒀다.

     

   “블라비.”

     

   세이랑의 부름의 블라비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뭘 하면 되지.”

   “마음속으로 천살성을 주겠다고 허락만 해.”

     

   블라비는 크라슈의 말을 충실히 따랐다.

   그런 그를 향해 크라슈가 손을 들어 올렸다.

     

   대상은 블라비, 훔칠 것은 천살성.

     

   크라슈의 손에서 블랙 후드가 다이얼 없이 발동됐다.

   그 순간 크라슈의 몸이 멈칫하고 굳었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 터무니없는 살의가 즉시 치솟아 올라왔다.

     

   ‘과연, 이런 느낌이냐.’

     

   예전에 도살의 악마라는 저주가 이와 비슷했다.

   그와 동시에 천살성을 따라 눈인형의 효과도 덩달아 강해졌다.

     

   천살성은 저주의 힘을 늘리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치솟은 살의가 한순간에 눈인형에 짓눌리며 사라졌다.

   동시에 자꾸만 새어 나오려던 광증도 덩달아 짓눌렸다.

     

   이번에 세계 침식을 워낙 많이 흡수한 탓에 광증의 제어가 아슬했는데.

   천살성의 효과로 눈인형이 강해진 덕에 문제가 전부 해결됐다.

     

   그뿐만이 아니다.

     

   ‘천살성은 타인에게 살의를 느끼는 대신 그만큼 육체 능력이 올라가니까.’

     

   당장 몸을 써보고 싶어 근질근질했다.

     

   “안 돼요. 안정을 취해야 한다 했어요.”

     

   하지만 그런 크라슈의 생각을 눈치챈 비앙카가 삐죽하고 세운 눈썹으로 말했다.

     

   성녀의 능력은 크라슈도 잘 알기에 분명 완치 판정이겠지만.

   비앙카에게는 죄진 게 있으니 조금 참기로 했다.

     

   “블라비, 어때요?”

     

   그사이 세이랑이 블라비를 돌아보며 물었다.

   블라비는 손을 쥐었다 펴더니 묘한 눈으로 크라슈를 보았다.

     

   “몸을 옥죄던 족쇄가 없어진 기분입니다.”

   “좋은 기분이라는 거네요. 잘됐어요.”

     

   세이랑은 만족한 미소 짓곤 몸을 돌렸다.

     

   “그럼 소녀는 이만 가볼게요. 두 분의 시간을 방해하기도 싫으니까요.”

   “그래, 네 목숨은 그때 지켜주러 갈 거다.”

   “제 목숨 정도는 소녀도 지켜요.”

     

   그녀는 코웃음 치듯 웃곤 그대로 돌아서서 나가려 했다.

   그러다 문고리를 잡은 세이랑이 뒤를 돌아보았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내년에 당신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 잘난 점성술로 알아보면 될 텐데.

   왜 굳이 물어보는 걸까.

     

   크라슈는 의문을 가지면서도 천살성을 받은 대가로 이 정도는 대답해주기로 했다.

     

   “라헬른 아카데미.”

   “흐으응.”

     

   입가의 미소를 그린 세이랑은 곧 면사포 아래 입꼬리만 슬쩍 올렸다.

     

   “그렇군요. 아카데미에서 재밌게 보내시길. 아, 참. 한 가지 말해두고 갈게요.”

     

   그녀는 서비스라면서 말을 이었다.

     

   “신성 왕국에 최근 나타난 가짜 성녀는 과연 가짜가 아닐까요?”

     

   그 말을 들은 크라슈가 곧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예언자인지 아닌지 시험하는 거냐?”

   “그야, 모르는 일이죠?”

     

   점성술사들은 왜 하나 같이 의미심장한 태도를 보이는 걸 좋아하는 걸까.

   크라슈는 도무지 이해 못 하겠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그놈은 가짜가 아니다.”

     

   하물며 진짜도 아니다.

     

   단지, 딱 하나 확실한 사실.

   가짜 성녀는 신성 왕국의 근간을 뒤흔들어 버릴 존재라는 거다.

     

   “그 대답이면 충분하네요.”

     

   세이랑은 그제야 문을 잡아 열었다.

     

   “제 친구 아스트리아를 좀 도와주세요.”

   “점성술로 뭘 본 거냐.”

   “아무것도요.”

     

   크라슈는 믿지 않는 또 솔직한 말을 내뱉은 그녀는 복숭앗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나갔다.

     

   딱 한 가지.

   원래라면 보였어야 할 아스트리아에게도 갑자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은 숨긴 채로 말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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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Thief Who Steals Overpowered Skills

I Became A Thief Who Steals Overpowered Skills

Became a Munchkin skill thief meonchikin seukil dodug-i doeeossda 먼치킨 스킬 도둑이 되었다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 used to think that my stealing skill only worked on what was worthless to a person.

But just before I died, I realized that I could also steal the skills.

So I stole the regr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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