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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8

    원작에서 정령을 활용한 회차는 몇 없다. 강해질 수단이야 정령을 제외하고도 무척 많았기 때문이다.

     

    그 몇 없는 경우마저도 정령술을 주로 사용한 회차는 없었다.

     

    1회차에는 이것저것 잡다하게 건드리다 보니 보조 용도로 정령술을 사용했을 뿐. 애당초 1회차는 무술이건 마법이건 크게 대성한 부분이 없는 잡캐였다.

     

    5회차 〈역마도逆魔道〉

     

    체내 회로 자체를 마법의 술식으로 뜯어고치고, 그를 뒤틀어 일어나는 반발작용을 출력으로 삼은 회차.

     

    여러모로 어중간한 마법사 루트였는데, 워낙 마력이 많이 필요하다 보니 정령을 갈아가며 마력을 보충했었다.

     

    그러고도 마력이 극히 부족했던 데다가, 결국 반발을 제어하지 못해 3회차처럼 폭사했다.

     

    6회차 〈암묘노暗墓奴〉

     

    흔한 사령술사 루트다.

     

    흑마법과 사령술 주로 하여 대량의 군단을 운용하던 회차였다.

     

    가진바 능력의 인식이 좀 그렇다 보니 호감도가 밑바닥을 기긴 했지만, 후반부 회차처럼 막 나가지는 않아 어떻게든 인류의 편에서 싸우기는 했다.

     

    그 과정에서 어둠의 정령을 건드리기는 했지만, 깊게 파고들지는 않았다.

     

    어둠의 정령을 건드려도 별 소득도 없었고, 친화력도 높게 키우지 못했다.

     

    그럴 바에는 그냥 길가에 널린 인간과 몬스터의 시체를 일으키고, 영혼을 뽑아다가 사령을 운용하는 게 효율적이었다.

     

    사령의 탑에서 쏟아지던 군세와 나름 맞불을 놓으며 분전하던 6회차는 도중에 난입한 연옥의 탑주에게 찢겨 죽었다.

     

    이 밖에 정령을 다룬 회차라 해봐야 12회차 혼종소환사인데… 이쪽도 정말 찍어만 보고 크게 파고들지 않았다.

     

    이쪽도 5회차처럼 재료로 쓰거나, 영 급할 때는 포탄으로 쓴 것이 고작이다.

     

    요컨대 어느 회차든 정령술을 주로 삼은 적도 없고, 제대로 찍어 먹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어느 루트던 정령술사와 싸워본 적은 있었기에 기초적인 지식은 있다.

     

    정령을 다루기 위해서는 계약을 통한 연결이 필요하다.

     

    술사의 의사를 전달하기 의해서, 전달받은 의사대로 운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술사와 정령이 연결되어야 한다.

     

    때문에 술사와 정령 간에 ‘계약’이라는 절차는 필수적이다. 계약 없이는 정령의 운용이 불가능하다.

     

    원작의 지식이 그러했고, 이쪽 세상에서 배운 상식도 그러했다.

     

    나도 방금까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뭐야]

     

    그런 상식이 조금 흔들렸다.

     

    지금의 상황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관측의 권능으로 주변을 인식했다.

     

    내 바로 근처에 가지런한 자세로 앉아있던 리아나 교수.

     

    그녀는 평소 단아하고 부드러운 인상이었는데, 지금은 이제껏 본 적 없는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벌어진 입으로 머리카락이 들어갈 것 같아 염려될 정도였다.

     

    주변을 더 인식했다.

     

    제각각 수정구를 쥐고서 수련하고 있던 생도들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넋이 나간 듯한 홍연화도 있었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워하는 백아린과 엘리아도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속속히 박혀들고 있었다.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오색의 빛무리가 휘날리고 있었다.

     

    오색으로 빛나는 정령들이 나를 중심으로 배회하는 모양새였다.

     

    방금 리아나 교수가 열어젖힌 공간에서 추가로 빠져나온 정령들이다.

     

    오색 정령이 주변 환경과 어우러져 무척 신비로운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지만, 나는 그런 감상에 빠질 여유가 없었다.

     

    가뜩이나 어지러운 정신이 더욱 복잡해졌다.

     

    정신을 추스르며 오른손을 들었다. 생각도 함께였다.

     

    방금과 같았다. 목소리나 목걸이의 도움도 없는, 그냥 속으로 중얼거리는 수준의 의사.

     

    – 휙!

     

    그러자 내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주변을 노닐던 빛무리가 하나가 잽싸게 달려들어 손등에 내려앉았다.

     

    빨간색 빛을 뿜어내는 빛무리. 내부에 존재하는 화기를 통해 화염의 정령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따듯해]

    [반딧불이]

    [온기]

     

    화기(火氣)라고는 하지만, 손등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무척 따듯했다.

     

    적의라고는 좁쌀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해를 입을 거라는 생각은 일체 들지 않았다.

     

    본능적인 영역의 생각이었다.

     

    나는 이것에게 해를 입을 수 없다. 영 입고자 한다면 입겠지만, 그를 바라지 않는다면 이들은 내게 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내가 만약 원한다면, 저들은 나의 청을 들어줄 것이다. 내가 부탁한다면 내 의사대로 움직여 줄 것이다.

     

    ‘어…’

     

    잠시 생각하는 사이 주변을 배회하던 빛무리들이 한껏 다가왔다.

     

    정령의 기운이 가까워졌다. 친숙함이 더해졌다.

     

    – 쿵

     

    심장이 울렸다. 박동 소리가 몸에 퍼져나갔다. 몸의 외벽과 부딪히며, 다시금 내부에 울려나간다.

     

    인식의 초점이 외부가 아닌 내부로 향해졌다.

     

    외부의 인식이 옅어졌다. 주변의 풍경이 흐릿해졌다.

     

    그 대신 내부의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낯설기만 한 감각은 아니다. 조금 시간이 지났지만, 분명 느껴봤던 감각이다.

     

    괴물에게 잔뜩 몰아붙여지며 사경을 딛고 있던 당시.

     

    죽음에 가까워지며 점차 사라지는 나를 느끼던 감각과 유사했다.

     

    지금은 사선을 밟고 있지 않지만, 당시와 비슷하게 나라는 개체가 더욱 잘 인지됐다.

     

    나를 이루고 있는 요소 중 유독 거대한 두 가지가 느껴졌다.

     

    팔방미인과 마력친화였다.

     

    그 근처에는 제대로 인지되지 않는 두 가지가 더 있었다.

     

    내 것이 아닌 외부의 힘. 공간과 관측의 권능이다.

     

    대표적인 것이 이 네 가지였다.

     

    이 네 가지가 전부는 아니었다.

     

    그 아래에는 감히 헤아리기 어려운 수의 고유함이 있었다. 제대로 해석이 불가능한 작고 무수한 고유함이 아래에 깔려 있었다.

     

    – 우우웅…

     

    그 무수하고 작은 고유함 중, 어느 하나가 느껴졌다.

     

    몸집이 점차 불어난다. 나를 차지하는 고유함의 지분이 커져갔다.

     

    아직 해석되는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주변의 고유함과는 분명 차이가 날 정도로 크기가 변화했다.

     

    언젠가는 해석할 수 있을 정도로 몸집을 불릴 것이다.

     

    그를 깨닫는 순간, 인식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미약한 안개가 내려앉은 풀밭. 흔들림 한 점 없는 맑은 호수.

     

    다시금 외부의 풍경이 전해졌다.

     

    내 주변을 맴돌던 정령들은 사라진 뒤였다.

     

    보아하니 리아나 교수가 어찌 회수하는 데 성공한 듯하다.

     

    나는 멍하니 손을 까닥였다. 방금까지 올려져 있던 온기가 사라져 뭔가 허전했다.

     

    “방금은 뭐였나요?”

     

    멀뚱멀뚱 주저앉아있자니, 나 못지않게 혼란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리아나 교수가 물어왔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나도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

    .

    .

     

     

    『정령의 이해』 강의의 첫 시간은 흐지부지하게 끝났다.

     

    내가 워낙 어그로를 화려하게 끌어댄 덕분이다.

     

    정신을 차린 리아나 교수와 강의시간 내내 머리를 맞대며 노력을 해봤지만, 유의미한 무언가는 건지지 못했다.

     

    기껏해야 계약도 안한 정령을 끌어다가 다룰 수 있었다는 것?

     

    물론 리아나 교수가 제대로 지배권을 행사하면 떨쳐지는 수준이다.

     

    하지만 계약을 거치지 않고 정령을 다룬 것이다.

     

    놀라운 일이라는 것은 여전했다. 아마 시간이 좀 지나면 또 나에 관한 소문이 추가되지 않을까 싶다.

     

    “이번 일은… 차근차근 알아내봅시다.”

     

    나는 정령에 관해서 아는 바가 없고, 전문가인 리아나 교수도 이런 경우에 대해 알지 못했다.

     

    결국 해답은 리아나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조금씩 파헤칠 수밖에 없단다.

     

    조금씩 알아보자는 리아나 교수는 무언가 짐작이 가는 듯했지만, 어째서인지 내게 알려주지는 않았다.

     

    의아했지만 무언가 뜻이 있겠거니 생각하며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속은 떨떠름할 수밖에 없었다.

     

    고유능력의 유무와 원천이라든가 하는… 나에 대한 비밀을 조금 풀어낼 수 있었는데, 이제 와서 영문모를 것이 추가로 생겨났다.

     

    나에게 가진 의문을 모두 풀어내는 날이 오기나 할까?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결과야 어떻든 강의는 끝났다.

     

    점심은 홍연화와 함께 해결하려고 했는데, 그녀는 어째선지 나를 보자마자 얼굴을 붉히고는 달아나버렸다.

     

    홍연화에게 버림받았다는 크나큰 충격을 받아버렸다.

     

    점심은 혼자서 쓸쓸하게 영양바를 우물거리며 해결해야 했다…

     

    ‘음…’

     

    그렇게 전공강의 시간을 맞이했다.

     

    터덜터덜 목적지에 도착한 나는 묘한 감응을 느꼈다.

     

    발끝으로 흙바닥을 툭툭 두드리자 전해지는 반발감.

     

    찍찍 바닥을 그으면 모레 섞인 흙먼지가 부스스 올라왔다.

     

    온갖 최신 기술이 도입된 시요람에서는 찾기 드문 구식 연무장이었다.

     

    여기서 아트라 교수에게 두들겨 맞고 땅을 구른 게 엊그제 같은데, 일수로 따져보면 과장 좀 보태 한 달은 더 된 일이었다.

     

    묘한 감응… 오늘 아침부터 계속 느끼고 있었다.

     

    분명 거기서 죽을 줄 알았는데, 살아 돌아와 멀쩡히 강의를 받고 있으니 감개가 무량했다.

     

    ‘후우…’

     

    다행히도 아트라 교수는 주말이 끝나기 아슬아슬하기 전에 시요람에 도착했다.

     

    즉, 전공강의를 진행하는 데는 문제없다고 한다.

     

    ‘오늘은 어떠려나.’

     

    대련 내내 얻어맞는 와중 내가 기절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지금은 오히려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진해진 눈 밑의 음영에서 알 수 있다시피, 지금 내 상태가 영 메롱했다.

     

    주말 동안 잠을 자질 못했다.

     

    여러 사유가 있었는데… 부끄러운 이유도 있었고, 잠에 들면 자연스레 꾸는 악몽에 새로운 양식이 추가된 탓도 있었다.

     

    하여 아트라 교수의 혹독한 대련을 이용해 기절할 계획이었다.

     

    생각해 보면 주말 동안 몸을 굴리지 못해 잠에 들지 못한 걸 수도 있다.

     

    몸을 한계까지 굴리고 두들겨 맞다 보면 저절로 기절하듯 잠들 것이다.

     

    잠시 후 아트라 교수가 도착했고, 내 몸을 세세하게 점검한 뒤에야 몸풀기 겸 대련이 진행됐다.

     

    내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제대로 된 실전을 경험하고, 사선을 밟아보면서 그 이전과는 차원이 다르게 성장했다.

     

    하지만 아트라 교수에게는 여전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서서히 올라가는 수준에 내 몸은 따라가주지 못했고, 끝내 내 방어를 슬쩍 걷어낸 아트라 교수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

     

    황금색 강기를 머금은 주먹이 날아들었다.

     

    못 피한다.

     

    이미 수세에 몰린 상황이다. 이전의 공격들은 이미 온몸을 비틀어가며 가까스로 피했다.

     

    그 탓에 지금의 일격은 못 피한다.

     

    이를 악물며 방어를 굳혔다. 강기를 크게 부풀려 공격을 대비했다.

     

    그리고.

     

    ‘?’

     

    아트라 교수는 주먹이 내 코앞에서 멈춰 섰다.

     

    팡! 주먹보다 느리게 몰아친 돌풍이 얼굴을 세차게 두드렸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펄럭였다.

     

    우뚝 몸을 굳혔다.

     

    당연히 얻어맞고 구를 거라고 생각해 각오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되지 않았다.

     

    뭔가 싶어 가만히 있자, 코앞에 멈춰 선 아트라 교수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윽…”

     

    아트라 교수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입술 사이로 고뇌와 망설임이 가득한 침음이 새어 나왔다.

     

    시선도 가만히 있질 못했다. 동공 지진을 일으키는 눈동자가 내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끝내, 차마 할 수 없다는 듯 눈을 질끈 감은 아트라 교수가 몇 발자국 물러나며 주먹을 거둬들였다.

     

    ‘?’

     

    왜 저러시지.

     

     

    * * *

     

     

    [플레이어 보정 시스템:측정도]

    ▶능력치

    ▶고유능력

    ▶심상상태

    「미?」 : ?

    「?정」 : ?

    「불완전」 : 쪼개져 온전하지 못하다.

    「생기실조」 : 생기가 소모되어 비어있다.

    「애정결핍」 : 애정에 몹시 목마르다. 그 정도가 극히 심하다.

    「피로」 : 정신이나 몸이 지치고 힘들다.

    「외로움」 : 홀로되어 쓸쓸한 마음과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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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lham Senjaya 님! 선작과 추천과 댓글은 작가에게 큰 원동력이 됩니다!

    +

    가바가이 님의 7코인 후원! 정말 감사드립니다!
    주말에 받아낸 달콤한 후원! 앞으로도 재미난 작품으로 찾아뵙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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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Academy’s Disabled Student

I Became the Academy’s Disabled Student

아카데미 장애인 전형 생도가 되었다
Score 3.9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 created a game character.
Instead of taking several perks, I added restrictions.

▶Restriction (I): “Curse of Sensory Seal”
─Permanently seals a chosen sense.
─Choice: Sight, Taste, Smell

▶Restriction (II): “Curse of Short Life”
─You are born with a body doomed to a short life.

▶Restriction (III): “Curse of Silence”
─Speaking causes you pain.

When the next day came, I couldn’t see any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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