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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8

     

    “들으라, 이 자리를 선택한 현인들이여!”

     

    아셀라의 연설이 시작했다.

     

    공들여 적었던 연설문은 머릿속에 완벽하게 입력했다. 또박또박 매 글자마다 힘을 주어 강렬하게 외친다.

     

    그녀의 연설이 이어지니 모든 귀족이 혼을 빼앗긴 듯 시선을 집중했다.

     

    누구나 명문가의 자제인 만큼 정치적인 감각에는 민감하다. 그들 누구나가 본능으로 아셀라의 카리스마를 느꼈다.

     

    “하여, 본녀는 뷔르템펠트의 피를 잇는 정당한 승계권자로서 차기 황제를 목표로 주공할 것을 이 자리에서 공표하노라!”

     

    아셀라의 선언에 박수가 쏟아졌다.

     

    누군가는 신뢰를, 누군가는 의심을, 누군가는 평가를 보낸다.

     

    귀족들의 모든 시선을 하나하나 느낀 아셀라는 직감했다.

     

    이들을 휘어잡으려면 지금.

     

    바로 지금 강렬한 인상을 주어야 한다.

     

    “본녀는!”

     

    당당한 아셀라의 외침에 청중이 집중한다.

     

    “제국에 신풍이 불도록 하겠다.”

     

    새로운 바람.

     

    제국의 고위직은 정복 전쟁을 거친 베테랑들로 점철되어있다.

     

    아셀라의 단어는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젊은 귀족들로 세대교체를 이뤄내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담겨있었다.

     

    “재능 있는 자가 파묻히는 것은 제국에 있어서도 손실이다. 제국의 발전에 기여한 능력 있는 이는 마땅히 존중될 것이며, 보상은 합당하리라.”

     

    아셀라의 공약은 젊은 신인이 활약할 무대와 그에 따를 지위를 보장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끝에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제국에 헌신하면 궁극적으로 무엇이 손에 들어올 것인가.”

     

    귀족들이 경청하며 아셀라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슈바르츠슈바이크.”

     

    아셀라가 프레다를 바라보며 호명했다.

     

    생각지 못했던 프레다가 조금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아셀라가 이내 시선을 튼다.

     

    “마켄젠, 아이어베른, 리에베르트, 베린, 트로타, 리스타, 고트베르크.”

     

    그녀는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의 가문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호명될 때마다 그들이 고개를 숙이며 기묘한 소속감에 휩싸였다.

     

    마치 자신이 이미 월광궁의 지지자로서 한배를 탄 듯한 착각이었다.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아셀라의 말은 마법이 걸린 것만 같이 더욱 강렬해진다.

     

    호명된 네리아 역시 당당한 아셀라의 풍채에 넋을 잃고 고개를 숙였다.

     

    빠짐없이 이 자리의 모든 귀족을 부른 아셀라가 잠시 뜸을 들인 후 그 단어를 입에 담았다.

     

    “자유를 주겠다.”

     

    부도 명예도 아닌, 생각지 못한 단어가 나오자 귀족들이 놀랐다.

     

    “우리는 마굿간에 갇혀 있다. 가문에 속박되어, 의무에 속박되어, 성공을 목표로 달려야 하는 경주마다.”

     

    젊은 귀족들 누구나가 공감했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성공가도를 달려야만 하는 부담감.

     

    조금이라도 흐트러진다면 망나니라 폄하당하기 마련이다.

     

    인생의 반려자조차 철이 들기 전에 가문이 정하는 현실이다.

     

    갑갑한 저택을 나서 한 번이라도 자신의 의지로 선택을 해 보고 싶다.

     

    그들의 욕망을 눈치챈 아셀라는 눈을 길게 뜨고는 악마 같은 미소를 지었다.

     

    “충성하라. 헌신한다면 그대들이 원하는 모든 자유를 주리라.”

     

    파격적인 발언이었다.

     

    현재 제국은 중앙통치체제다.

     

    지방 가문은 소유하는 기사단원의 숫자조차 제한되고, 유능한 인재는 제도로 차출된다.

     

    아셀라는 그 체제에 혁신을 가져오겠다 선언한 것이다.

     

     

    자유라는 단어에 많은 귀족이 상상력을 발휘했다.

     

    누군가는 영지의 부를 더욱 키웠고, 누군가는 황실 기사단에 버금가는 수준 높은 기사단을 구성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10대 중반부터 20대 중, 후반까지.

     

    심지어 사교계에 몸을 담던 이들이다.

     

    그들의 최대 관심사는 한 가지로 같았다.

     

     

    ‘연애’였다.

     

    이 자리의 많은 이들이 자유로운 연애를 하지 못했다.

     

    혼약자는 어릴 적 이미 가문이 정했으며, 의무를 다하다 보면 다른 영애나 영식을 만날 틈도 없기 마련이었다.

     

    평민은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가문에 누가 되므로 이성적으로 말을 섞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자유롭게 연애하고 결혼하는 평민들을 남몰래 부러워하던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아셀라는 그 가려움을 긁어줬다.

     

    “가문에 의한 강제적인 혼약은 없어질 것이다. 혼약을 빌미로 한 가문 간의 계약은 무효로 하도록 법을 제정하겠다.”

     

    아셀라의 말에 많인 이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 자리에는 정치적인 혼약으로 장래가 묶여버린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아셀라가 황제가 되면 그녀의 말대로 자유를 얻게 된다.

     

    “당사자 둘의 의지만 확인되면 가문의 동의가 없어도 혼인이 가능해질 것이다.”

     

    아셀라의 말은 그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미래를 그리게 만들었다.

     

    “또한 혼인이 가능한 나이의 제한을 18세로 낮추겠다.”

     

    귀족들은 여태 다른 승계권자에게서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발언에 관심을 보였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젊다. 실효성 있는 공약보다는 자극적인 제안이 보다 효과적이었다.

     

    아셀라는 그 점을 백분 이용했다.

     

    그녀는 그들에게 자유를 주는 척하며 확실하게 옭아맬 자신이 있었다.

     

    “아셀라 폰 뷔르템펠트는 한다.”

     

    아셀라가 확고하게 선언하며 마무리했다.

     

    흥분이 담긴 박수가 쏟아졌다.

     

    방금 월광궁의 지지자가 다수 생겨났음은 틀림없었다.

     

     

    ‘후우.’

     

    아셀라는 속으로 심호흡을 했다.

     

    조금 긴장했지만 실수 없이 해냈다.

     

    ‘문제는…’

     

    지금 아셀라의 연설에는 한 가지 허점이 있었다.

     

    그녀 역시 고트베르크와 정치적인 혼약 관계라는 것이다.

     

    본인이 황실이라는 가문의 속박을 극복하지 못했는데 공약을 이룰 수 있을 리도 만부당하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서 라스와 정식 약혼식을 올리는 일은 중요했다.

     

    자신 역시 그들과 함께 자유를 쫓는 입장이라는 동질감도 살 수 있을뿐더러, 솔선수범하는 자세도 보여줄 수 있다.

     

    아셀라와 라스의 혼약은 그녀의 연설과 더불어 사교계에서 최대의 화제로 떠오를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라스는 아직도 이 자리에 없었다.

     

     

    “전하! 다음 순서는 약혼식인가요?”

     

    한층 밝아진 분위기 속에서 프레다가 아셀라를 향해 외쳤다.

     

    “아아, 이제 본 식을 시작할 차례군요!”

    “혹시 전하께서 말씀하신 공약도?”

    “그 주치의님과 깊은 사랑에 빠지셔서!”

    “세상에, 감동적인 이야기야.”

     

    영애들이 멋대로 아셀라의 러브스토리를 상상하며 꺄륵거렸다.

     

    다른 귀족들도 한껏 기대감이 올라간 눈치였다.

     

    ‘쟤는 몸은 커다란 주제에 입이 뭐 저렇게 왜 가벼워?’

     

    아셀라가 속으로 프레다를 향해 욕지거리를 쏟아냈다.

     

    ‘일단 퇴장하고 시간을 벌 생각이었는데.’

     

    분위기를 탄 귀족들이 악단에게 로맨틱한 곡을 주문했다.

     

    부드러운 선율이 흘러나오자 귀족들이 기품 있게 환호했다.

     

    축제가 될 약혼식인데다 젊은이들이 모여있으니 이런 분위기가 될 것도 당연했다.

     

    아셀라가 시녀장을 잠깐 돌아보지만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라스!’

     

    아셀라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한계가 찾아왔다.

     

    한껏 그렇게 떠들어놓고 바로 약혼식으로 이어가지 않는다면 이상한 소문은 순식간에 생겨날 것이었다.

     

    간신히 끌어올린 분위기를 망쳐버린다면.

     

    아셀라는 허풍쟁이가 될 것이다.

     

    오늘의 연설은 역효과만 나고 끝나버린다.

     

    ‘라스….’

     

    어째서일까.

     

    지금은 분노나 원망보다는 아쉬움이 먼저 몰려왔다.

     

     

    아셀라가 금방 깨달았다.

     

    오늘의 약혼식을 기대하던 건 프레다도, 라우가도, 그 누구도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는 걸.

     

     

    발코니에 서서 행동을 멈춘 채로 무색하게 시간만이 흘러간다.

     

    어느새 배경에 깔린 음악 한 곡이 끝나려 했다.

     

    아셀라의 불안감을 그 자리의 모두가 조금씩 함께 느끼기 시작했다.

     

    부정적인 감정은 슬며시 전염되어가고, 웃음기는 사라진다.

     

    눈치를 보느라 아직 떠드는 이는 없지만 누구나 직감했다.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

     

    그렇지 않고서야 방금까지 그렇게 당당하게 연설하던 아셀라가 멍하니 멈춰있을 리가 없었으니.

     

    ‘여기까지야.’

     

    결국 라스는 오지 않았다.

     

    물론 위급한 상황이고 사정이 있는 건 알고 있지만.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는 서운함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어서 창피함이 몰려오리라 직감한 아셀라가 주먹을 꽉 쥐었다.

     

    ‘…식을 더 미룰 수밖에.’

     

    아셀라의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아래를 향했다.

     

    “…약혼식은.”

     

    추후에 다시 진행하겠다.

     

    아셀라가 그 말을 꺼내려던 순간이었다.

     

     

    ―쾅!

     

    연회장의 정문이 활짝 열렸다.

     

    “아이고.”

     

    들어온 남자가 이마에 가득한 땀을 닦으며 문에 쓰러지듯 몸을 기댔다.

     

    숨이 가쁘다. 급히 뛰어온 모양이었다.

     

    입은 정장은 셔츠 한쪽이 안으로 접혀 엉망진창이다.

     

    얼굴은 화장하기는커녕 씻지도 못했는지 땟국물로 지저분했다.

     

    “하.”

     

    그래도 그가 필사적으로 남은 힘을 짜내어서 걸음을 옮긴다.

     

    아셀라가 있는 발코니로 향하는 중앙 계단.

     

    그곳을 향해 나아가니 모여있던 귀족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길을 만들어 주었다.

     

    한 계단, 한 계단 그가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아셀라의 심장도 함께 쿵쿵 뛰었다.

     

    점점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후우.”

     

    라스가 아셀라의 앞에 섰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아무 말 하지 않는 라스였지만 아셀라는 그의 눈에서 많은 단어를 읽을 수 있었다.

     

    “아셀라 폰 뷔르템펠트 황녀 전하.”

     

    라스가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작은 케이스. 뚜껑을 여니 안에는 수수하면서 존재감이 강한 반지가 들어있다.

     

    “제 인생에 가장 큰 행운이 하나 있다면, 저의 남은 시간을 전부 당신에게 바치리라 약조할 수 있었던 일이겠지요.”

     

    아셀라는 입을 꽉 다물고 대답하지 못했다.

     

    분명 라스와 연습해봤던 혼약 선언이었다.

     

    그의 대사가 즉흥적으로 바뀐 건 자처하더라도, 아셀라에게는 대답할 여력이 없었다.

     

    대신 조용히 라스에게 왼손을 내밀었다.

     

    라스는 대답하듯, 반지를 아셀라의 약지에 끼워주었다.

     

    천천히 허리를 펴고 일어난 라스가 아셀라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부디 용서해 달라는 그의 천연덕스러운 웃음을 본 아셀라는 머릿속이 끓어올랐다.

     

     

     

    아니, 끓은 건 심장 속의 피였을까.

     

    아셀라가 라스의 넥타이를 터프하게 낚아채고는 자신을 향해 잡아당겼다.

     

    라스는 반응할 틈도 없이 고개를 숙이게 됐고, 그런 그의 얼굴을 향해 아셀라도 후퇴 없이 돌진했다.

     

    접촉은 약 1초와 5분의 1.

     

    서로의 끝만 닿은 가벼운 키스 후에 아셀라가 다시 그를 밀어내고는 말했다.

     

    “대가는 됐어.”

     

    관객들의 열렬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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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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