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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8

       …스르륵.

         

       레비가 등을 돌리며 옷을 벗었다.

         

       이한은 움찔했다.

         

       뜬금 그녀가 옷을 벗은 것에 놀란 게 아니었다.

       단지 그녀의 등 뒤에.

         

       “보이시나요?”

       “…문신이라, 요즘 귀족 영애들은 과격하군.”

       “후후, 그런 게 아니란 걸 아시잖아요.”

       “크흠.”

         

       애써 헛기침을 한다.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무언의 신호였으나, 그녀는 단호하게.

         

       “노예 각인이에요. 그것도 좀 지독한.”

         

       지독한 사실을 내뱉었다.

         

       “…….”

       “전 말이죠, 사부님. 부모가 없어요. 말 그대로, 고아인 셈이죠.”

         

       그녀는 주섬주섬 다시 옷을 입었고, 이한은 쓰게 웃었다.

         

       “그냥 말로 하면 될 것을, 왜 옷은 벗고 난리인지, 원.”

       “몇 백번 설명하는 것보다 한 번 보여주는 게 낫다. 사부님이 자주 하시는 말씀이잖아요.”

       “…하여튼 이놈의 우등생.”

       “칭찬이라고 생각할게요.”

         

       레비는 오늘 유독 말을 잘했다.

       자기가 이토록 타인 앞에서 망설임이나 떨림 없이 말을 잘 하던 경우는 처음이 아닐까 싶다.

       늘 주눅이 들어 있던 그녀지만, 모든 비밀을 털어놓은 그를 상대로 숨김없이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있을 기분이었다.

         

       하여 레비는 더욱 거침없이.

         

       “전 노예에요. 약 5년 전 폴트 가로 팔려왔죠.”

         

       자신이 가진 최대의 약점이자 비밀을 폭로했다.

         

       “…….”

         

       …그는 말없이 고요한 시선으로 자신의 말을 들을 뿐이었다.

         

       마치 그녀가 노예인 게 무슨 상관인가 싶은 눈.

       그는 여전히 레비를 ‘노예’로 보는 게 아니라, ‘제자’이자 한 명의 ‘소녀’로만 대하는 것이었다.

         

       울컥!

         

       ‘…후우, 정말이지, 저 분은.’

         

       자상한 분이 아닐 수 없다.

         

       ‘남들 같았으면 대경실색하거나, 배신감을 느낄 텐데, …나에겐 정말 과분할 정도로 좋은 스승이셔.’

         

       레비는 다시금 울컥하려는 것을 참았다.

       우는 건 지금껏 숨겨왔던 모든 걸 밝히고 울어도 늦지 않으니까.

         

       “…전 팬드래건 출신이 아니라, 브리튼 출신이에요. 뭐 출신이라고 해도 노예에게 출신성분이 뭐가 중요한가 싶지만요.”

         

       그녀는 원래부터 전쟁 고아였다.

       브리튼은 오래 전부터 제국을 비롯한 팬드래건에게도 시비를 걸며 무수한 전쟁을 일으켰다.

       이 때문인지 브리튼에서 전쟁고아란 시궁쥐보다 흔한 것이었으며, 레비 또한 어느 순간 부모를 잃고 전쟁고아가 된 케이스라 보면 되었다.

         

       그리고, 레비는 ‘노예 상단’에 붙잡혔다.

         

       노예 상단이란 것이 대부분 금지되었다고 알려졌지만, 노예 상단이 여전히 존재하는 건 공공연한 사실인 바.

       하니 딱히 레비가 납치당하여 노예가 되는 것조차 그다지 특별히 불행하거나 가혹한 일은 아니었다.

         

       …부모도 없고, 힘도 없는 아이의 삶이란 대부분 이러했으니.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지만, 전 고아치고 미색이 고왔고, 머리색조차 귀족들처럼 희소한 색을 가지고 있었죠. 덕분에 ‘최상품’으로 분류가 되었고, 전 상당한 교육을 받았어요. 고급 노예를 원하는 이들은, 상당히…. 아니 넘쳐난다는 게 당시 상인의 말이었어요.”

         

       그녀는 불행인지 행운인지 모르겠으나 예뻤다.

       그리고 예쁜 여인은 ‘수요’가 있다는 노예 상인의 말이었고, 노예 상인은 그녀에게 글 쓰는 법을 비롯하여 귀족들의 예절을 가르쳤다.

       배움에 대한 소질은 나쁘지 않았고, 머리가 영특하단 사실마저 알게 되자 노예 상인은 더욱 기뻐했다.

         

       ‘더 비싸게 팔 수 있겠군!’

       -이게 노예 상인이 자신에게 말버릇처럼 한 얘기였다.

         

       “전혀 기쁘지 않았지만요.”

         

       ……그렇게, 그녀가 고급 노예로 교육 받던 중의 일이었다.

         

       팬드래건과 브리튼이 전쟁이 나기 시작했고, 노예 상인은 재수없게 전쟁에 휘말려 사망한 것이다.

         

       물론, 노예 상인에겐 불행이겠지만 그녀에겐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도망갈 기회를 얻은 것이니까.

         

       하지만, 하필 그녀는-.

         

       “몰랐죠, 설마 고급 노예이기에 문제가 생길 줄은.”

         

       [복종의 각인].

         

       그녀의 등 뒤에 새겨진 노예 각인의 정체였고, 노예 상인이 위법 마법사를 찾아가 그녀에게 직접 새긴 각인이었다.

         

       이 각인은 일종의 주술과 같은 것이었고, 웬만한 수단으론 절대 지울 수 없는 악몽과 같은 저주였다.

         

       고급 노예가 도망칠 수 없도록 노예 상인 나름 노력한 결과물이었고, 결과적으로 그녀는 다시금 노예 상인의 조직을 흡수한 어느 상인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그 상인은 그녀를….

         

       “팬드래건에 팔아넘겼어요. 전쟁 중이었으니 돈으로 환전할 수 있는 건 다 팔아버린 거지요. 저 또한 싼값에 팔렸고요.”

         

       은화 열 개.

         

       그것이 그녀의 몸값이었다.

         

       “그런 제가 팔린 곳이….”

       “폴트 가였나.”

       “…네에.”

       “그놈들이 돈이 어디 있다고 너를 산 거지?”

       “아마도 빌린 게 아닐까 싶어요. 예측이지만 투자의 개념이었겠지요, 그 남자는 아마 처음부터….”

         

       저를 되팔 생각이었던 것 같으니.

         

       – 넌 오늘부터 우리의 딸이다. 레비 폴트, 이 이름을 주도록 하마. 하하!

         

       팔려온 그날, 폴트 가는 그녀에게 이름과 성을 주고 자신들의 가족으로 받아주었다.

         

       노예에 불과한 자신을 말이다.

       해서 레비는 감동했었다.

         

       아아, 드디어 나에게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동화 속에 나오는 기적적인 행운이 저에게도 찾아왔구나, 하고!

         

       그녀는 정말이지 기뻐했다.

         

       그러나.

         

       – 왜, 왜 이렇게 성장이 느린 거냐! 제발 빨리 좀 크란 말이다!

         

       레이놀 폴트가 노예를 딸로 삼은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팔아먹기’ 위해서.

         

       대귀족, 혹은 돈 많은 상단에게 시집을 보내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 그는 자신을 보고 투자 가치를 느꼈기에 구매한 것이었다.

         

       폴트 가문.

       이 가문은 정말이지 답도 없었다.

       여전히 기사 가문으로서 재기할 것을 꿈꾸며, 후계자가 될 딸만큼은 귀하게 키우되, 시집을 보낼…. 돈을 뽑아낼 ‘제물’을 준비했으니 말이다.

         

       절대 다른 방식으로, 혹은 노력하여 재기하려고 하지 않는 답도 없는 가문.

         

       그야말로 망령(亡靈)의 일족이 아닐 수 없는 바.

         

       레비는 저들의 광기를, 무능을 마주하며 도망가고 싶었다.

       이대론 제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뻔했으니까.

         

       그렇게 어느 정도 기회를 엿보며 도망갈 기회를, 혹은 신고를 넣을 기회를 엿봤으나….

         

       – 도망갈 생각은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각인, 복종의 각인으로 인하여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종속되어 있는 존재였으며, 주인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었으니까.

         

       그런 그녀가 받은 명령은 크게 세 가지.

         

       하나. 자신이 노예임을 타인에 발설할 수 없다.

       둘. 폴트 가의 피해가 가는 행위를 할 수 없다.

       셋. 폴트 가의 사람에게 순종적이어야만 한다.

         

       이러한 명령이 그녀에게 낙인처럼 새겨져 있었기에 그녀는.

         

       “아무리 역겨워도, 그들에게 순종적으로 굴 수밖에 없죠.”

         

       전날, 그를 희롱하였던 길드원.

       그 길드원이 어머니와 동생을 걸고 협박했을 때, 갑작스레 협조적으로 변한 이유조차 미운 정이 들거나, 혹은 그들 모녀가 자신에게 잘 대해줘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 모녀에게도 순종적이어야 하니까요.”

         

       그야말로 저주.

         

       그녀의 인생에 자유란 건 존재하지 않았고, 억압되고도 끔찍한 인생만이 항상 그녀의 곁에 붙어 다니는 듯했다.

         

       …끔찍하게도.

         

       “…그런데 말이죠,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그들에게 가족으로 인정받고 싶었어요. 가족이란 게 생긴 게 처음이니까, 그래서 말이…, 죠. 정말, 정…말 최선을 다해 노력, 했었어요.”

         

       노력.

       이한이 맹목적이라 표현한 노력.

       그러한 노력을 통해 그녀는 자신을 증명하고 싶었다.

         

       노력을 통해, 정말 최선을 다하다 보면 언젠가 그들도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을까?

       가문을 빛낼 만한 업적을 세우고, 성과를 내다보면 어쩌면…!

         

       “어쩌면 가족으로 받아줄지도 모른다고, 그런, 정말 철부지 소녀 같은 ‘환상’을 꿈꿨던 것 같아요.”

         

       “…….”

         

       “헤헤, 저 정말, 어리석고 멍청하죠?”

         

       그녀는 되물었다.

       그 또한 저의 어리석음에 질려 표정이 굳었으리라 여기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에게 나올 답을 듣는 것조차 무서워서-.

         

       “-아니, 오히려 너무 대견해서, …고생했다고 안아주고 싶을 정도다.”

         

       “…….”

         

       “고생했구나, 정말…. 고생했구나.”

         

       …그는, 여전히 변치 않은 다정한 시선을 줄 뿐이었다.

         

       안쓰러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녕 대견해서.

       그 힘든 시간을 이겨낸 그녀가 기특하단 마음만이 느껴졌다.

         

       “……아.”

         

       레비는 잠시 멍하였다.

         

       그동안, …그동안 자신의 비밀을 밝히면 과연 어떤 반응이 나올까, 자신을 혹 경멸하지 않을까 항상 초조했던 삶만 살았던 그녀였다.

         

       한데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주는 사람이 눈앞에 있었고, 레비는 온몸이 떨렸다.

         

       “뭐, 이런 아저씨가 안아주는 게 좋지도 않을 테지만, 헛소리로 생각해도….”

         

       와락!

         

       “…….”

       “…흐윽.”

       “…그래, 울어라. 품 정도는 얼마든지 빌려줄 테니까.”

       “흐으윽! 허어어어엉!”

       “그래, 이렇게 크게 소리치는 게 우는 거지. 그래야 속이 풀리는 거지, 아무렴.”

         

       레비는 있는 힘껏 달려가 그에게 안겼다.

       그러며 동시에 그가 미웠다.

       왜 이제야 나타난 것일까?

       자신이 필요할 때, 그토록 필요할 때 왜 이런 사람을 만나지 못했던 걸까.

         

       괴롭고도 고단했던 19년의 세월.

         

       드디어 만난,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줄 줄 아는 ‘가족’을 마주하며 레비는 서럽게 울었다.

         

       전날과 달리, 마냥 조용하지 않은 큰 소리로…….

         

       참으로, 서럽게 울었다.

         

       “…괜찮다, 괜찮아.”

         

       이한은 그런 그녀의 등을 조심스레 토닥거려주었다.

         

         

       따스하게.

       

       


           


30 Years After Reincarnation, Turns Out It Was a Romance Fantasy?

30 Years After Reincarnation, Turns Out It Was a Romance Fantasy?

환생 30년, 알고 보니 장르가 로판이었다?
Status: Ongoing Author:
30 years after reincarnation, turns out the genre was romance fantasy? ...Really, how? I lived as a magician's slave, experimented on, then as an assassin, mercenary, soldier, and even a knight. This is a story where I'm in a genre all by my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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