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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9

       “아니, 황녀님들 이라고 해야 할까?”

        

       역시라면 역시겠지만, 키아라 베라티는 우리 정체를 알고 있었다.

        

       아예 제국 내부로 잠입할 정도의 인물이다. 그 정도 정보는 알고 들어왔겠지.

        

       우리가 자리에 앉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그대로 테라스 자리 중 하나를 잡고 앉아서 다리를 꼬았다.

        

       아무래도 나 혼자 있을 때 나를 대하던 것과 차이가 크게 나는데.

        

       음,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했다. 그때 나는 이런…… 복장이 아니기도 했고, 그냥 당당하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걸어가서 가슴 사이에 지폐를 꽂아버렸으니까.

        

       굳이 잠입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처음부터 자기 정체를 다 알고 있다는 듯 행동했으니 함부로 얕잡아볼 수 없었을 거다.

        

       그리고 지금도 그랬다. 일견 여유로워 보였지만, 자꾸 내 쪽으로 시선이 돌아왔다.

        

       내가 3자회담에서 보였던 모습에 대해 보고받았다면, 얕잡아보기는 힘들겠지.

        

       하지만 그렇게 시선이 내 쪽으로 오는 것이, 앨리스는 조금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앨리스가 자리에 앉았다. 반원을 그리는 기다란 의자의 끄트머리, 그러니까 키아라 베라티와 마주 보는 자리였다. 나름대로 당당하게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었다.

        

       덕분에 모습이 조금 더…… 그, 보고 있기 민망해졌지만, 적어도 지금은 부끄러움보다 자존심이 먼저인 모양이다.

        

       그 옆으로 조금 자리를 두고 내가 앉았고, 그 옆에 클레어, 그리고 그 옆에 엄청나게 긴장한 표정의 레오가 앉았다.

        

       “거기 오빠는 여기 와서 앉지 그래?”

        

       분위기의 주도권을 가져가겠다는 듯, 키아라 베라티는 자기 옆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조금 어리숙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런 오빠도 싫어하지는 않는데?”

        

       “기사이면서 수녀인 당신이 남자를 탐해도 돼?”

        

       “뭐, 여신께서는 우리더러 열심히 아이를 낳으라고 하셨으니까. 그분께서 만들어낸 자식들이 전부 골방에 틀어박혀서 애도 낳지 않은 채 혼자 늙어 죽어가면 그분도 별로 안 좋아하시지 않을까?”

        

       거기까지 말하고, 베라티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하긴 틀린 말도 아니긴 해. 나도 지금은 순결을 지키고 있긴 하니까. 그런데, 내가 순결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기사단이 나를 내쫓을까? 그보다는 내가 잔 남자를 제거해서 내 자리를 보존시켜주는 것을 택할걸?”

        

       “충신 가문인 그레이스 가의 가주가 될 사람을 죽이면 폐하께서 참 좋아하시겠네.”

        

       “글쎄, 어떨까. 아무리 제국이라고 해도 법국과 함부로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을 거 아냐? 귀족 하나 죽은 것쯤은 그냥 묻어줄지도?”

        

       당연히 허세다.

        

       애초에 법국과 왕국이 동맹을 맺으려고 했던 것 자체가, 국가 대 국가로는 절대로 제국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몇 년 사이에 제국이 군사력을 크게 증강하고 국경 쪽으로 계속 군대를 슬쩍슬쩍 옮기고 있는 것을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앨리스 쪽을 보았다.

        

       앨리스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단순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앨리스도 법국과 왕국의 상황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그날 회담에 나갔던 내가 상세하게 전달해줬으니까.

        

       “헛소리 하지마. 아버지는 오히려 그걸 빌미로 법국을 침공하고도 남으실 분이니까.”

        

       “…….”

        

       그렇지.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명분이다. 아무리 힘이 있어도 명분이 없다면 아래의 사람들은 따라주지 않는다. 그게 부풀려진 애국심, 민족에 대한 자긍심 같은 무형의 것이건, 아니면 지금 나서서 저들을 모조리 박살 내버리지 않으면 나도 저렇게 죽을 수 있다는 실질적인 두려움 때문이건. ‘이유’가 있어야 병사는 싸운다.

        

       황제라면 귀족 하나 죽은 것을 전 국가적인 문제로 선동하고도 남을 사람이다.

        

       자치국이 도움을 청하면서도 일정 수준 이상의 제국군이 들어오지 못하게 미리미리 대가를 지급하고 있는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적어도 그 사람들은 황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듣기로 황제에게는 아들도 있고 딸도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황제의 권력을 등에 업고 나를 협박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아직 황태자도 정해지지 않은 제국의 일개 황녀가 말하는 것이 우리에게 득이 될 리가 없으니까. 그게 아니면…….”

        

       베라티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다음 황제가 되도록 도와줄까? 우리랑 친하게 지낼 수 있다면 정보를 공유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진정한 친구가 다음 대 황제가 되는 것도 좋은 일이니까.”

        

       “개소리하지 마.”

        

       앨리스는 즉각 반응했다.

        

       “내가 그렇게 어리숙해 보여? 제국 황위의 계승권은 온전히 제국 황실이 정할 일이야. 다른 나라는 둘째치고 의회조차 그 권리를 건드릴 수 없어.”

        

       “그렇다면 이야기도 끝이지. 차기 황제가 될 인물도 아니고—”

        

       베라티의 시선이 다시 나를 훑었다.

        

       “—다른 황녀나 황자만큼 대단한 능력을 가진 것도 없는, 가진 거라고는 그저 잘난 혈통뿐인 일개 황녀와 손을 잡을 생각이 우리한테는 없거든? 그럴 바에는 그냥 이 정보 그대로 이용하고 가지고 싶은 것만 가지고 돌아가 버리면 그만이니까.”

        

       “……가지고 싶은 것이 여기에 있긴 한 모양이구나.”

        

       앨리스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을 뻔했다.

        

       역시 열심히 공부한 티가 난다니까.

        

       “여기에서 빼가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는 거잖아. 안 그래? 그리고, 아직 정확한 정보는 너도 얻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고. 애초에 그랬다면 이렇게 들키기도 전에 가지고 싶은 것만 가지고 도망갔을 테니까. 아직 늦지 않아서 안심이야.”

        

       “그게 어때서?”

        

       하지만 베라티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어깨를 으쓱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오갈 때마다 마치 탁구를 보듯 그사이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고개가 이리저리 왔다 갔다 움직였다.

        

       “내가 입만 열지 않으면 너희들은 어차피 우리가 가지고 가고 싶은 것이 뭔지 모를 텐데.”

        

       “…….”

        

       앨리스는 등을 쭉 펴고 앉았다. 다리는 여전히 꼬고 있었지만, 양손을 깍지 껴서 배 위에 올려둔 모습이 황제의 모습과 꼭 닮았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그렇게 말하는 차분한 앨리스의 태도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살기나, 아우라나.

        

       하긴, 내가 그런 것을 못 느끼는 몸이기는 하지.

        

       다른 애들은 어땠을까? 클레어나 레오는 앨리스에게서 뭔가 느꼈을까?

        

       적어도, 분위기가 평소의 앨리스와 다르다는 것 정도는 느끼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 다 입을 헤 벌리고 앨리스를 보고 있었으니까.

        

       “나는 제국의 황녀고, 차기 황제가 될 몸이야. 너희들이 내 능력을 보고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없어. 결국 황실의 피를 잇는 사람은 나 뿐이고, 제국 황실의 정통성을 이을 사람은 나 혼자뿐이니까.”

        

       앨리스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여기는 제국이야. 법국이 아니고. 네가 얼마나 많은 병력을 데리고 왔다고 하더라도, 결국 네가 할 수 있는 건 몰래 움직이는 것뿐이지. 법국의 기사단을 통째로 여기에 잠입시킬 수는 없었을 테니까.”

        

       “…….”

        

       베라티도 앨리스의 그 느긋한 태도 안에서 뭔가 느낀 모양이었다.

        

       앨리스를 판단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가만히 노려보는 베라티를 향해, 앨리스가 선고하듯 말했다.

        

       “내가 황녀라는 걸 알고서 잘도 따라왔네. 아니면 나를 정말로 얕봐서 굳이 여기까지 따라온 걸까? 뭐, 어느 쪽이건 상관없어. 덕분에 너를 베어도 주변에 민간인 피해를 내지 않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무엇보다 이렇게 탁 트인 곳으로 너를 데리고 올 수 있었고.”

        

       “협박을 하는 거라면—”

        

       “협박? 내가 그렇게까지 멍청해 보여?”

        

       앨리스는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달빛에 그 푸른 눈동자가 비쳐서 밝게 빛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앨리스를 일개 황녀라고 깔보듯 말하던 베라티를 향해, 앨리스가 말했다.

        

       “협박이 아니라 계획이지. 이미 2주 전에 네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내가 짠 계획.”

        

       2주 전이라면, 우리가 카페에 앉아 벨라에게 정보를 들었던 그때였다.

        

       “네가 우리를 따라온 시점에서 이미 너는 덫에 걸려든 거야. 이제 방법은 둘 중 하나뿐이겠지. 살아서 신앙이라도 유지하던가, 아니면 자살이나 다름없는 탈출을 시도하거나.”

        

       아하.

        

       그러니까 그게 그렇게 된 거구나.

        

       왠지 아까부터 벨라가 안 보인다 했는데.

        

       이제야 상황을 파악한 베라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데, 몸을 다 일으키기도 전에 촤륵, 하고 살벌한 소리를 내며 커튼이 찢어졌다.

        

       끝부분에 글러브가 달린, 방아쇠를 당기면 글러브가 앞으로 나가서 상대를 툭툭 때리는 장난감처럼 생긴 무언가가 들어와 테이블을 세게 내려쳤다.

        

       물론 진짜로 장난감은 아니었다. 그 펼쳐지는 곳 하나하나에 살벌하게도 칼날이 달려있었고, 그 장난감과는 비교할 수도 없게 유연하게 생겼으니까.

        

       촤륵, 하며 그 검은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서 철컥, 하며 하나의 검이 되었다. 양쪽으로 날이 달린 쇠톱 같던 모습이, 한 번 더 변형되며 얇고 기다란 검의 모습이 되었다.

        

       거기 있는 사람은,

        

       “안녕~”

        

       벨라가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며 레오와 클레어에게 인사했다. 레오는 입을 헤 벌리고 벨라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벨라를 알아보지는 못할 거다.

       

       

       얼굴에는 일본 축제에서나 쓸법한 여우 가면을 쓰고 있었고, 머리카락 색도 원래 벨라 머리카락의 색깔이 아닌 검정색이었으니까.

       

       

       입고 있는 것은 몸에 딱 달라붙어서 몸매가 다 드러나 보이는 검은 옷이었지만, 피부는 전혀 노출되지 않았다. 일부러 목에 힘을 줬는지, 평소의 목소리가 아닌 하이톤의 앳된 목소리였고.

       

       

       남들이 얼굴을 모른다는 것이 강점인 벨라였기에 이런 복장이었으리라.

       

       

       굳이 여우가면을 씌워둔 것은 분명 제작사의 취향인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는 동방쪽에서 넘어온 기념품이라는 설정이겠지만.

       

       “키아라 베라티. 세례명은 엘리자.”

        

       그 말에 베라티가 앨리스를 노려보았다.

        

       “축하해. 모든 황녀를 한 자리에서 한 번에 마주하는 아직 제국 내의 누구도 겪어본 적 없는 영광스러운 일이니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연참실패…

    대신 내일 오후에도 한 화 더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새우냥 님, 후원 감사합니다!

    독자 여러분께서 제 소설을 이렇게 재미있게 읽어주시는 것만큼 뿌듯한 것도 없습니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언제나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바라고, 당연히 그 관심이 긍정적인 관심이기를 바라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새로운 소설을 쓸 때마다 이 소설이 독자 여러분께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걱정하면서 쓰는데, 독자님께서 해주셨듯 칭찬하는 말을 듣고 나면 마음이 놓입니다. 제가 잡은 방향성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뜻이니까요.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는 소설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Ilham Senjaya님, 후원 감사합니다!

    익명으로 후원해주셨기에 독자닉네임 기능으로 인사드립니다!

    제 소설이 취향에 맞았다니 다행입니다! 사실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이유는 언제나 제가 보고 싶은 소설을 보고 싶어서입니다. 아무리 소설을 좋아하고 그런 장르가 웹소설로 있다고 하더라도, 제가 상상하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소설은 있기가 힘들죠. 물론 그렇다고 소설 읽는 것이 재미없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계속 글을 읽다 보면 쓰고 싶은 마음도 계속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소설을 쓰게 되면, 기존의 소설을 읽어주시던 분들이 따라와서 읽어주실지, 다른 분들의 취향에 맞을지,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분들이 읽어주시는 것을 보면 마음이 놓입니다. 쓰고 싶었던 글을 쓰면서 돈을 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축복은 온전히 독자 여러분께서 제게 내려주시는 것이고요. 제가 독자 여러분께 감사할 방법은 그저 이 글을 확실하게 완성하는 것이겠죠. 앞으로도 독자 여러분께서 즐겁게 읽어주실만한 글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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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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