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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9

       하나의 기사단에 한 명의 기사급.

         

       기사단장이 되어야 진정한 기사다.

         

       골방에 틀어박혀 혼자 검을 수련해서는 기사급이 될 수 없다는 격언이었다. 다르게는 귀족 사회에서 제대로 명예를 인정받으려면 하나의 기사단을 거느려야 한다는 얘기다.

         

       지금에 와선 그 의미가 변질되어 기사급일지라도 기사단을 거느리지 못할 만큼 가난하고 미약한 가문의 사생아나 평민은 진정한 기사가 아니라는 폄하의 말로 쓰였다.

         

       오히려 앞뒤가 뒤바뀐 채 기사급이 아니라도 기사단장직을 얻을 정도로 훌륭한 가문과 자산을 가진 귀족이라면 번듯한 기사로 쳐줄 정도였다.

         

       사생아 출신의 부기사단장 길베르토는 그런 현실이 너무나 마음에 안 들었다.

         

       젊을 때는 비슷한 처지의 동기들을 모아 구닥다리 기사단 편제를 바꿔야 한다고 황실에 청원을 넣기도 했다.

         

       예전엔 기사급을 기사급만 상대할 수 있어 운용 효율성을 위해 인원을 쪼개야 했지만 기술이 발전한 현재는 그 정도까진 아니라 한 명의 기사급만 배치할 필요는 없으니까.

         

       노골적으론 사생아인 우리가 기사급 경지가 되면 얻을 자리를 늘려달라는 청원이다.

         

       그래도 마계라는 적이 완벽히 몰락하자 후퇴하기만 하는 제국의 앞날을 걱정하는 마음에 한 청원이었다. 한창 혈기 왕성할 때였으니.

         

       하지만 현재 편제 상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변한 건 없었다. 폭군 선황이 귀찮아 처형대를 꺼내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나마 다행일까.

         

       동기는 뿔뿔이 흩어지고 길베르토는 사생아 출신의 미약한 연줄에 의지해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그러다 우연히 행정직에 재능을 보여 한 자리를 얻게 됐고 어느새 부기사단장의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사생아로서 꽤 입지전적인 경력이다. 길베르토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실력이 정체돼 기사급은 되지 못했다. 미약한 가문도 여전해 기사단장은 요원하지만 현실적으로 사생아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위치이리라. 자부심이 심장을 채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요 몇 년 사이엔 아니었다.

         

       매스꺼운 평민 놈들만 없었다면.

         

       그들이 같잖은 실력으로 자리를 넘보지만 않았다면 이럴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늘섬의 기사단장직에 적극 추천하겠다는 벨라몬트 공작가의 유혹에 넘어가지도 않았겠지.

         

       앨시어 벨라몬트의 압살에 협조하겠다고 교단과 연을 만들지도 않았겠고.

         

       암살을 의뢰했더니 일어난 과격한 테러에 기겁한 공작가가 꼬리를 자르며 끈 떨어진 신세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신분에 걸맞은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질시에 빠진 평민 놈들만 없었다면. 기사단장이 평민 편을 은근히 들며 찍어 누르지 못하게 막지만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다.

         

       새를 탄 교단원이 옆으로 날아왔다.

         

       “부기사단장 씨, 이 난리가 끝나면 기사단을 제대로 조종하지 못한 대가를 치러야 할 거요. 일 처리를 이리하시면 안 되지.”

       “그 입 다물어라! 일개 전령 따위가 뚫린 입으로 평가할 사안이 아니다!”

         

       길베르토는 새를 재촉했다. 평민 교단원을 추월해 교단의 지휘부로 비행했다.

         

       부유한 섬들을 스쳐 지나가자 지휘부로 쓰는 건물이 있을 곳이 시야에 들어왔다.

         

       경호 인력은 온데간데없이 붉은 소란이 펼쳐져 있었다. 피범벅이 된 소녀가 도망치는 교단원 무리를 뒤쫓았다. 은빛 검격이 사람을 도륙냈다. 분홍 머리카락으로 핏물이 줄줄 흘렀다.

         

       “크래프트 가주가 벌써 여기에?!”

         

       본능적인 위협감이 찾아왔다.

         

       길베르토는 서둘러 고삐를 당겼다. 착륙하려던 새가 황급히 떠올랐다. 바람이 몰아쳤다.

         

       정말로 크래프트의 수작이 있었던 건가.

         

       평소처럼 유적 정리를 하던 기사단에 캐머롯과 벨라몬트가 대놓고 찾아왔다. 거대 병아리와 함께였다.

         

       멜리사 캐머롯이 차가운 얼굴로 선언했다.

         

       -지휘권을 넘기세요. 군령에 따라 즉결 처분하겠습니다.

       -동감이야. 난 권한 없지만.

         

       황실령으로 캐머롯에 보장된 군사권을 공식 후계자로서 남용하는 행보였다.

         

       -무슨 군령을 어겼다는 겁니까?

         

       기사단장이 의아해했다.

         

       -선황께서 주적으로 지정하셨던 교단과의 내통이요.

         

       그게 언제적 군령인가.

         

       -이 새는 크래프트 가주가 보낸 전령이에요. 이곳 유적 지하에 위치한 교단의 근거지를 알려주기 위해 보내진 애죠.

       -삐약? 삐약삐약.

       -맞다고 하네요. 크래프트 가주는 본래 조사만 하려 했지만 굳이 전서구를 보냈다는 건 내통자를 즉결 처분하고 교단을 습격하자는 계획이겠죠.

       -삐야악? 삐약삐약.

       -기사단장, 캐머롯에 지휘권을 넘기세요. 이곳은 당분간 남부 사령부가 관리합니다.

         

       멜리사 캐머롯은 그 말대로 했다.

         

       캐머롯 가의 특제 심문이 이어졌다. 마법 탄환이 군령 위반자를 가차 없이 죽였다.

         

       길베르토는 같은 계파의 수하들을 넘어 부기사단장인 자신에게까지 심문 차례가 오자 즉시 도망쳤다.

         

       크래프트의 손길이 여기까지 당도했단 말인가!

         

       믿기 어려웠지만 믿어야 했다.

         

       지금 지상에서 분홍톤 소녀가 학살을 끝내는 중이었으니까.

         

       마지막 상대가 도망쳤다. 피 묻은 뜀박질이 뒤따랐다. 비명이 일더니 잠잠해졌다.

         

       길베르토는 서둘러 활을 꺼냈다. 교단의 지휘부가 내려 보이는 상공에서 시위를 당기고 정신을 집중했다.

         

       전투를 마치고 소녀가 몽롱한 상태로 변했다. 멍하게 주변을 둘러보다가 상공 어딘가를 보며 인사하듯 손을 움직인 방심의 순간.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 화살대가 물 흐르듯 굽이치며 소리 없이 날아갔다. 뒷모습이 가까워졌다.

         

       소녀의 손이 인사하려던 자세에서 뒤로 움직였다. 손아귀가 움켜쥐고 화살촉이 당도했다. 한차례의 팽팽한 흔들림이 일었다. 화살이 손에 잡혔다.

         

       소녀가 완전히 뒤돌았다. 시선이 길베르토가 있는 상공을 올려봤다.

         

       분홍 눈동자가 몽롱하게 눈웃음쳤다. 촉촉한 입술이 달싹였다.

         

       -그쪽이 대장?

         

       길베르토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크래프트 가주의 정보가 머리를 스쳤다. 새의 고삐가 움직여졌다.

         

       “더 위로!”

         

       중력감이 몰아쳤다. 화살통에서 화살이 꺼내져 시위에 걸렸다. 연달아 도약음이 들려왔다. 지상을 겨누자 어느새 당도한 분홍 형상이 시야에 가득 찼다.

         

       “안녀엉.”

         

       소녀가 충격파를 일으키며 나이프에서 도약했다. 은빛 검격이 번뜩였다. 회피한 길베르토의 목에서 붉은 검상이 생겨났다. 옅은 핏줄기가 뿜어졌다.

         

       활이 목표를 겨눴다. 시위가 놓이고 화살이 쏘아졌다.

         

       화살촉에 바람이 감기며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마석 가루가 묻은 화살대가 화염을 일으켰다. 소용돌이와 섞이며 화염 줄기를 형성했다.

         

       거대한 화염 화살은 노린 척하던 소녀를 그대로 지나쳤다. 궤적은 소녀의 발을 받치러 날아오던 마석 나이프에 정확히 명중했다. 굉음이 일었다. 나이프가 튕겨 나갔다.

         

       화살통에서 화살이 뽑혔다.

         

       “인간은.”

         

       활시위가 추락하는 소녀를 겨눴다.

         

       “하늘을 날 수 없다.”

         

       화살이 쏘아졌다. 화염이 일고 존재의 격이 움직였다. 화염 소용돌이가 뒤틀리더니 용의 형상으로 변했다. 화염룡이 굽이쳤다.

         

       소녀가 몽롱하게 쳐다보더니 다른 곳을 향해 손을 뻗었다. 화염이 휘몰아치며 시야를 덮었다. 광풍이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문득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빗자루는.”

         

       시야 한 편으로 하얀 형체가 날아왔다.

         

       빗자루?

         

       “하늘을 날아.”

         

       길베르토는 황급히 활시위를 겨눴다. 뒤늦게 형체의 정체가 정신에 들어왔다. 하얀 손수건이었다.

         

       서둘러 고개를 돌리자 화염 속에서 도약한 소녀가 보였다. 발치에서 도약용으로 쓰인 마석 후추통이 추락했다.

         

       분홍 눈동자가 눈웃음쳤다.

         

       페이크.

         

       일도양단의 검격이 시야를 휩쓸었다.

         

       피 분수가 일었다.

         

         

         

       #

         

         

         

       파스텔은 후추통을 밟고 느리게 하강했다. 내부의 마석 가루가 소녀의 몸무게를 받쳤다.

         

       “마석 조종의 권능이지 장비 조종의 권능이 아니라구.”

         

       잠에서 덜 깬 듯한 정신으로 눈을 비볐다. 흐리멍덩한 눈동자로 허공을 살펴봤다.

         

       “나이프 친구우, 어디로 날아갔엉.”

         

       전혀 안 보여.

         

       끝나고 찾아야겠당.

         

       지면에 당도해 후추통을 털었다. 잠깐 썼다고 에너지를 잃고 맛없어진 마석 가루들이 보였다.

         

       유감.

         

       “오우, 어린 각하. 엄청 잘 싸우는데? 이러다 최연소 기사급이 되는 거 아니야? 그 일대기에 내 이름도 들어가려나?”

         

       학살의 와중에도 악마와 조용히 대치 중인 남자가 있었다. 단검을 손에 든 채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파스텔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기억이 되짚어졌다.

         

       허억.

         

       이 사람 1학기 테러 때 나를 농락하며 어화둥둥 해댄 기사급 악당이잖아!

         

       기사급이다아!

         

       악마님! 악마님!

         

       우아앙!

         

       파스텔은 악마님을 찾다가 그 악마님이 저 남자와 대치 중이라는 걸 깨닫고 침착해졌다.

         

       오예.

         

       악마가 입을 열었다.

         

       『덤빌 거면 어서 덤벼라. 첫수는 양보해 주겠다.』

         

       완전 강자의 여유.

         

       이것이 대악마의 품격인가.

         

       “쓰읍.”

         

       남자가 단검 끝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대악마님. 아무리 성지라도 그렇지, 봉인 다 안 풀리신 거 아닙니까? 조건인 어린 각하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요.”

         

       허억.

         

       악마님의 허세 들킴.

         

       초위기.

         

       『하아.』

         

       악마가 인상을 찌푸렸다. 한 걸음 다가갔다.

         

       『정말 체면이 말이 아니군.』

       “워워.”

         

       남자가 황급히 두 걸음 물러났다.

         

       “시험해 보겠다는 건 아닙니다.”

         

       양손이 들렸다.

         

       “현상 유지 제안이에요. 전 그냥 있을 테니 대악마님께서도 여기 계시죠. 어린 각하는 예외야.”

         

       오잉.

         

       『뭘 믿는 거지? 저 건물엔 싸울 줄 모르는 일반인 고위직 정도만 있어 보이는데.』

       “전 그분의 호위 임무로 다니는 거라서요.”

         

       남자가 깍지 낀 양손으로 머리를 받치더니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호위 대상이 위험하지 않다면 굳이 막을 필요도 없습니다. 아 그렇지!”

         

       시선이 소녀를 향했다.

         

       “어린 각하, 혹시 친족 살인 좋아해?”

         

       파스텔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니요……?”

       “가도 되겠네.”

         

       손짓이 건물을 가리켰다.

         

       “아버지와 대화할 기회야.”

         

       어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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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It’s Mental Immunity

No, It’s Mental Immunity

Status: Ongoing Author:
The guardian demonic sword is troubled and in distress, believing it has been ruined because of me. Does striving for advancement through consuming demonic energy seem too 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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