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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9

     

    아셀라와의 약혼식 언약은 몇 번 연습하긴 했었다.

     

    하지만 예고도 없이 입술을 부딪쳐 올 줄이야. 이건 못 들었는데.

     

    기세 좋게 돌진한 것 치고는 아셀라가 마지막에 망설임이 담긴 듯 슬쩍 어깨를 뒤로 뺐다.

     

    정말 살짝만 닿아서 어떤 느낌이었는지는 벌써 기억에 없다.

     

    즉흥적으로 퍼포먼스를 벌이다가 부끄러워졌는지, 제정신이 들었는지.

     

    아셀라답지 않네.

     

     

     

    관객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나는 아셀라와 복도 뒤로 도망치듯 들어와 숨었다.

     

    파티장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희미해졌다.

     

    주변에는 기사도 시종도 아무도 없었다.

     

    “공자, 너무 늦었잖아.”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저한테 키스한다고 미리 얘기 안 하셨죠?”

     

    내 질문에 아셀라가 석상처럼 얼어붙었다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왜 이렇게 늦었냐니까.”

     

    아예 모른 척하기로 했나.

    이미 기억에서 지워버렸을 수도 있겠다.

     

    그래도 이대로 넘어가기엔 조금 아까워져서 살짝 기어올라보기로 했다.

     

    “황녀님, 그런 퍼포먼스는 미리 합을 맞춰놔야 실수가 없지요. 혹시 제가 놀라서 얼굴을 피했으면 얼마나 이상했겠어요.”

     

    “아이, 정말!”

     

    집요하게 늘어지는 내 태도에 아셀라가 짜증을 내며 발을 굴렀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공자에게 그… 그걸 예고라도 해야 했다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연습도 미리 하고요.”

     

    “연습이라니, 그렇게 가볍게 취급하지 마!”

     

    아셀라가 미간을 찌푸리며 내 가슴팍을 주먹으로 퍽 쳤다.

     

    “겨우 연습으로 처음을 하겠냐고…”

     

    아셀라가 뭐라고 꿍시렁댔다.

     

    어째 슬슬 진짜 화를 내는 느낌이라 그만 가지고 놀기로 했다.

     

    전형적인 분노했을 때의 표정이다.

     

    아닌가, 다른 부분이 있네.

     

    “귀가 빨개지셨어요.”

     

    “아니거든.”

     

    아셀라가 홱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고는 내게 보이는 귀를 한 손으로 덮었다.

     

    “후우, 정말.”

     

    그리고는 다른 손으로 손부채질을 하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아셀라는 매일 보고 있지만 이건 한 번도 못 봤던 흔치 않은 반응이다.

     

    좀 재밌네.

     

     

    내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심려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급한 환자가 있었어요.”

     

    “들었어. 내의원에 비상이 걸렸다고.”

     

    아셀라가 옆얼굴인 채로 눈동자만 나를 향해 흘겼다.

     

    “…고쳤어?”

     

    나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입니다. 맡았던 두 환자 모두 고비를 넘겼어요. 저희 치유사들이 24시간 붙어 관리하고 있으니 금방 정신을 차릴 겁니다.”

     

    “그건 뭐… 잘됐네.”

     

    아셀라는 삐치긴 했어도 납득해줬다.

    조금은 놀라운 반응이었다.

     

    “황녀님께서 다른 사람의 목숨을 신경 쓰시기도 하는군요.”

     

    “그러면 안 돼?”

     

    “아뇨, 좋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잘됐다고 한 건 환자가 아니라 공자가…”

     

    아셀라는 말을 끝맺지 않고 별안간 퍽, 다시 나를 때렸다.

     

    “아무리 그래도 오늘 같은 날 늦은 건 잘못했어.”

     

    “말씀대로입니다. 반성하지요.”

     

    “옷도 엉망이고 머리도 하나도 안 했고. 공자, 지금 소독약 냄새 엄청 나.”

     

    “15분 전까지 수술실에 있었거든요. 조금만 참아주세요.”

     

    “됐어. 나가서 성인식이나 진행해. 귀족들 상대 잘 하고.”

     

    여태 일하고 왔는데 또 업무를 만들어주시는 황녀님이었다.

     

    감사해서 눈물이 다 나네.

     

    “우선 산발이 된 그 머리부터 만지자. …뭐야, 이거.”

     

    아셀라가 식겁한 표정으로 뭔가 발견한 듯 내 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피잖아.”

     

    “환자의 피인가 보네요. 아까 튀어서 간호사가 닦아줬거든요.”

     

    “흐응. 어지간히 큰일이었구나.”

     

    나를 향해 뻗어있는 아셀라의 손목을 살짝 잡아봤다.

     

    아셀라가 흠칫 놀라며 소라게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반지 잘 어울리시네요.”

     

    “아, 응. …이쁘니?”

     

    “그럼요. 어느 분의 손인데요.”

     

    “공자가 골라서 그런지 생긴 건 마음에 안 들지만…”

     

    아셀라가 내게 손목을 잡힌 채로 자신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약혼반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별로구나.

    백금이라 꽤 비쌌던데다 인챈트도 했는데.

     

    “반대쪽을 호출하는 기능도 있어요. 틈새 부분을 엄지손톱으로 두 번 긁으시면 제 쪽에 신호가 옵니다.”

     

    아셀라가 실험 삼아 작동시키자 내 손에 끼워진 반지가 번쩍 빛났다.

     

    “이런 것도 돼? 뭐하러 인챈트 했어. 비쌌을 텐데.”

     

    “요즘 저랑 안 주무시잖아요. 비상시에 말로 호출하면 늦으니까요.”

     

    뛰쳐나간 날 이후로 아셀라는 다시 예전처럼 자기 방에서 잔다.

     

    그녀가 발작했을 때 쓸 수 있는 기능을 추가해 봤다.

     

    “…그렇네.”

     

    아셀라의 시선이 반지에 오래 머물렀다.

    그녀의 눈동자에 우리의 손이 비친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송구했습니다. 다음번엔 마음에 드시는 걸로 선물하지요.”

     

    “다, 다음이라니. 아직은 일러.”

     

    아셀라가 내게서 손목을 확 뺐다.

     

    그녀에게 다음 선물을 줄 때는 생일 때일 테니 지금 생각하기엔 이르긴 하다.

     

    “저기, 공자.”

     

    “예.”

     

    “…기분이 어때?”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서 홀가분합니다.”

     

    “아니, 그거 말고.”

     

    아셀라가 조막만한 입술을 오물거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정식 약혼식을 올렸잖아.”

     

    “그렇지요.”

     

    “저렇게 많은 눈이 있는데… …도 했고.”

     

    “키스요?”

     

    “공자, 그 단어는 앞으로 내가 먼저 말하기 전엔 언급 금지야.”

     

    “예.”

     

    약혼식에 대한 소감이 궁금한가.

     

    솔직히 나에게는 앞으로 귀찮은 게 늘어날 사건이었다.

     

    고트베르크 가문이 월광궁과 더욱 깊은 관계가 되었다는 표시이기도 하니까.

     

    그래도 뭐,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꽤 즐거웠습니다.”

     

    오늘 아셀라의 반응이나 행동은 조금 보는 재미가 있지 싶었다.

     

    사교계와 밀접한 이벤트라 그런지 그녀도 조금은 평범한 또래 소녀다워진 느낌이다.

     

    내가 아는 황제 아셀라와는 다른 사람처럼 생각이 들기도 했다.

     

    “즐거웠다? 겨우 그것만 느꼈어?”

     

    아셀라는 내 대답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즐겁게 사는 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앞으로도 매일 즐거웠으면 좋겠네요.”

     

    “앞으로도.”

     

    이제 아셀라는 내게서 완전히 고개를 돌려 버렸다.

     

     

    잠시 대화가 끊겼다.

     

    파티장의 왁자지껄한 대화가 배경음악처럼 희미하게 들려왔다.

     

    나와 아셀라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공자.”

     

    “예, 황녀님.”

     

    아셀라가 여전히 얼굴을 보이지 않은 채로 내게 물었다.

     

    “…한 번 더 하고 싶어?”

     

    오늘의 아셀라는 정말이지 이상했다.

     

     

     

    ***

     

     

     

    성인식도 무사히 끝내고 밤, 다시 가운을 걸치고 내의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많은 귀족들이 나를 축하해주며 인사를 해왔기에 정신은 없었다.

     

    예의를 배운 이들이기에 표면적인 대화가 대부분이었다.

     

    다만 면식이 있는 라우가는 몇 가지 짓궂은 질문을 해왔다.

     

    아셀라와 어디까지 진도가 나갔냐, 결혼은 언제 할 거냐, 아셀라의 공약이 너를 빨리 맞이하려고 그러는 거냐 등등.

     

    거짓말은 하기 싫은데 말이야.

     

    아버지와 네리아도 볼 수 있어서 좋았는데, 예상보다 공장 완공이 빨리 되어서 얼마 후면 아스피린 제작과 유통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걸음을 옮기며 상태창을 확인했다.

     

    ―――――――――――

     

    · 노멀엔딩

     

    · ■■손가락은 ■■■ ■■■ 28% → 37%

    · ■■■ ■■■ ■■ ■■■ 0.3%

    · ■■■ ■■■■■ 0.2%

     

    · 굿엔딩

     

    · ■■■ ■, 다시 ■■에서 14% → 21%

    · ■■■■, ■■■, ■■■■ 0%

    · ■■■ ■■ 0%

     

    · ■■■■

    · ■■■■ ■■■ ■■■ ■■■■

    0.1% → 1%

     

    ―――――――――――

     

    ―――――――――――

     

    · [단단한 신용] 업적을 획득했습니다. 제국의 황실이 당신을 상당히 신뢰합니다.

    · [실력자] 업적을 획득했습니다. 당신이 분야의 전문가라고 많은 이가 생각합니다.

    · [사교계의 샛별] 업적을 획득했습니다. 제국의 많은 귀족이 당신과 친해지고 싶어합니다.

     

    ―――――――――――

     

     

    굿엔딩 확률이 상당히 늘었다.

     

    최근의 사건들로 업적도 상당히 달성했는데, 그 덕분이지 싶다.

     

    노멀엔딩도 하나가 꽤 올라갔다.

     

    ‘발생확률은 그 엔딩이 발생하는 사건의 시점에서 측정한 거지.’

     

    이를테면 야만족이 침공했을 때 관련 배드엔딩이 모두 삭제되어 있다면 내가 별다른 행동을 안 해도 전과 같은 경험처럼 죽을 일은 없다는 뜻이다.

     

    본래 확률에서 모든 배드엔딩을 회피하려면 101번의 시행에서 모두 당첨이 떠야 했단 소리니 불가능이나 다름없었다.

     

    모든 배드엔딩이 50퍼센트만 되어도 동전을 101번 던져 전부 앞면이 나올 확률이니 2의 101승분의 1이다.

     

    다른 말로는 0이라고도 한다.

     

    ‘확률은 내 행동을 따라서 변화하니 운명이 정해져 있다거나 한 건 아니야.’

     

    어디까지나 확률은 가능성의 표현이다.

     

    ‘전부 회피한 다음에 노멀엔딩이나 굿엔딩이 기다리고 있는 건가.’

     

    그런데 둘 다 맨 위의 것만 올라가고 있다.

    치유사 전용이기라도 한 건가.

     

    어찌 됐든 착실하게 올라가고 있으니 기분 좋은 일이다.

     

     

    사무실에 도착해서는 팔켄하인에게 보고를 받았다.

     

    “완다 전하와 알베리치 부인 모두 경과는 순조롭소이다. 각각 두 명이 교대로 지속 치유를 걸고 있소.”

     

    “좋습니다. 게다 전하는요?”

     

    “음, 리비오 사제가 맡았지.”

     

    팔켄하인이 잠시 뜸을 들이고는 대답했다.

     

    “성공했소. 그쪽도 고비를 넘기고 입원실에서 추가 치유 중이오.”

     

    “다행이군요.”

     

    사정상 맡지 못했던 환자가 무사하다고 하니 마음이 놓였다.

     

    더욱이 쌍둥이였으니 한쪽만 살아났다면 환자의 상실감이 컸을 것이다.

     

    리비오가 실력을 발휘해서 다행이었다.

     

    그가 악당만 아니라면 더 좋았겠지만 뭐.

     

     

    늦은 시각이지만 직접 환자를 확인하기 위해 입원실을 향했다.

     

    야밤의 회진이라.

     

    우선 공주가 있는 병실로 들어가려니 입구에 호위기사가 석상처럼 엄중히 문을 지키고 있었다.

     

    안에 황제가 있는 모양이었다.

     

    “고트베르크 선생님을 모셔왔다고 전해주시오.”

     

    팔켄하인이 부탁하자 잠시 후 기사들이 길을 비켰다.

     

    병실로 들어가니 간병인용 의자에 앉아있는 황제와 눈이 마주쳤다.

     

    “고트베르크.”

     

    “용안을 뵙습니다, 폐하.”

     

    황제뿐만 아니라 그의 다른 형제도 두 명 더 있었다.

     

    완다에게 지속 치유주문을 시전하고 있는 우리 치유사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오늘은 수고했다. 그대가 내의원에 있어서 천만다행이로군.”

     

    “황공합니다.”

     

    “완다와 게다를 실어온 마차도 자네가 만든 체계라고 들었다.”

     

    “그렇습니다.”

     

    “훌륭하군.”

     

    황제는 피곤한 기색도 보였지만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셀라와 약혼식을 올리고 오는 길인가?”

     

    “말씀대로입니다. 알고 계셨군요.”

     

    “자식들의 행사는 나가지는 않아도 모두 보고받고 있다. 중요한 자리에 늦었겠군.”

     

    황제가 흥미로워하며 내게 물었다.

     

    “어디, 아셀라에게 혼나지는 않았는가?”

     

    “굉장히 혼났습니다만, 공주 전하를 위한 일이었다 전해드리니 너그럽게 이해해 주셨습니다.”

     

    “하하.”

     

    황제가 즐거워진 듯 웃음을 흘렸다.

     

    “아셀라와 정식으로 혼약자가 되었는가. 전에는 그 아이가 약혼식을 올리리라고는 상상도 안 했거늘.”

     

    아셀라가 근본 있는 후계자가 아닌 황실의 병기로 태어났기 때문일까.

     

    황제는 아셀라를 그다지 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월광궁에 이 정도로 기대하지도 않았지. 아셀라가 정말로 많이 컸군. 자네가 온 이후 아닌가, 고트베르크?”

     

    “제가 특별한 역할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황녀님은 본래 역량도 그릇도 하늘 같은 분이었습니다.”

     

    나중에는 문자 그대로 하늘에 구멍을 뚫어버릴 분이지.

     

    “겸손함은 싫어하지 않는다. 실제로 자네가 온 이후로 내의원에 많은 변혁이 일어났다 알고 있다. 짐의 삶도 상당히 풍성해졌지. 요즘은 낮에도 피로하지 않다.”

     

    혈당이 낮아지도록 신경 쓴 식단과 약을 처방해서 그럴 것이다.

     

    변화는 황제 본인이 가장 잘 느꼈겠지.

     

    “고트베르크.”

     

    “예, 폐하.”

     

    황제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이번 공적을 치하하여 상을 내리겠다. 무엇을 원하는가?”

     

    그가 두 번째로 해온 질문에,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금태양착정기님 큰 후원 감사해요! 즐겁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아쉽게도 후원 메시지를 적는 기능이 사라져 버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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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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