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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9

       잠들기 전. 부푼 기대를 안고 베니에게 받은 기초 마법서를 펼쳐보았다.

       

       ***

       

       서문.

       

       한때 마법은 기적이었다.

       

       대장장이가 돌을 녹여 철을 뽑아내듯, 마법의 신은 필멸자들에게 세상에 가득 찬 마나로부터 현상을 뽑아내는 방법을 내려주었으니.

       

       우리는 이를 마법이라 불렀다.

       

       하지만 마법과 야장술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모르는 자는 없으리라. 바로 범용성이다.

       

       야장술은 누구나 익힐 수 있는 것이지만(이 또한 높은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재능을 타고나야 한다. 필자는 장인을 비하할 생각이 없다.), 마법은 선택받은 일부만이 다룰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마나는 온 세상에 산재되어있으나, 이를 다루는 감각은 오직 마법의 신이 내려주는 것.

       

       우리의 뇌, 혹은 심장, 어쩌면 영혼 어딘가에 존재하는 이 마력 기관은 본래 타고나는 것이 아니었다.

       

       마법의 신이 우리에게 하사하는 것이었지.

       

       그렇기에 마법은 기적이었다.

       

       신이 건네준 도구와, 신이 보여준 답안지를 쫓아 세상을 원하는 대로 뜯어고치는 기적.

       

       하지만 오늘날의 마법은 그렇지만도 않다.

       

       마법의 신은 멸신 전쟁의 불길을 피하지 못해 사멸했고, 그 생의 마지막에 자신의 존재를 대가로 최후의 대마법을 시전했다.

       

       바야흐로 개나 소나 마력 기관을 타고나는 시대의 개막이었다(진짜로 개나 소도 마력 기관을 타고난다. 제대로 다루지 못할 뿐이지).

       

       그렇기에 오늘날의 마법은 기적이 아닌 기술이다.

       

       허나, 실망하지 말지어다. 마법 본연의 아름다움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겹겹이 쌓아 올린 기술은 진리로 향하는 지름길이 되었으니.

       

       체계를 가진 지식은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깨달음보다 우월한 것임을 명심하라.

       

       마탑은 뛰어난 개인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진리로 이끄는 사명을 짊어진 선각자들이니.

       

       이 책에 담긴 내용을 충실히 익힌다면 그대 또한 우리의 일원이 되리라.

       

       우선…….

       

       ***

       

       “……뭐라는 겨.”

       

       뭔가 있어 보이는 말을 잔뜩 하되 실속이 없는 것은 물론, 중간중간에 쓸데없는 저자의 주석이 들어가 있는 것이 참 읽기 번잡스럽다.

       

       거기에 내용은 또 어떻고. 아주 그냥 선민의식으로 똘똘 뭉쳐있지 않던가.

       

       누군가에게 읽히기 위한 글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취해,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점에서 이 책은 기본이 안 됐다고 할 수 있으리라.

       

       “후우….”

       

       내 안에서 들끓는 직업정신을 애써 억누르며 분노를 가라앉혔다.

       

       그래. 마법사가 재수 없는 것은 상식이고, 애초에 이 책은 소설도 아니잖아. 그러니까 이 정도는 괜찮다. 어차피 중요한 건 서문이 아니라 본문의 내용이니까.

       

       깊게 심호흡하고는 책을 마저 읽었다. 그리고.

       

       탁!

       

       마지막까지 훑어보았는데도 크게 달라지는 게 없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먹기도 힘들고, 서클을 어떻게 돌리라고 하는데 애초에 나는 그 서클이 뭔지 전혀 모르겠단 말이지.

       

       심장에 마력이 뭉쳐있는 건 알겠지만, 그게 자연스레 고리를 이룬다니 대체 뭔 개소리란 말인가.

       

       고급스런 책의 표지를 내려다보며 한참을 고민한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가챠나 돌릴까.”

       

       나는 이게 맞아….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마법서를 받침대 삼아, 그 위에 풀돌 여신상을 올려놓았다.

       

       평소처럼 자애로운 표정으로 누군가를 향해 기도를 올리는 자세. 오늘은 삐질 일이 없었나 보다.

       

       괜시리 찰랑찰랑한 여신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탄했다.

       

       “에휴. 이단자 좀 때려잡겠다고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알지?”

       

       우웅-!

       

       여신상이 항의하듯 거칠게 신성력을 뿜었지만, 그래봐야 은은한 서광이 반짝거릴 뿐이었다.

       

       “아 왜! 내가 무슨 5성을 달라고 했어? 마법 카테고리 자체가 잘 안 나오긴 하지만 그래봤자 1성이잖아!”

       

       우우웅…!

       

       “해줘! 해줘 해줘! 안 해주면 하루 종일 아공간에만 처박아 두고 필요할 때 잠깐 말고는 안 꺼낼 거야!”

       

       우웅….

       

       “…아니, 그렇게 풀 죽지는 말고. 대신 해주면 어? 한동안 애착 인형처럼 안고 잘 테니까. 어때? 이 정도면 좀 수지가 맞지 않아?”

       

       파아앗!

       

       콜! 이라고 외치듯이 방 전체를 밝게 비추는 여신상.

       

       이젠 아예 의사소통 비슷한 것까지 하는구나 싶어 헛웃음을 지으며 가챠 시스템을 열었다.

       

       띠링!

       

       

       

       

       [통상 뽑기]

       

       -현금 혹은 그에 상응하는 마석을 소모해 1~5성 사이의 아이템과 스킬을 랜덤하게 얻습니다.

       

       [1회 뽑기] [10+1회 뽑기]

       

       

       

       

       “가즈아아아아!”

       

       오늘 미궁에선 번 30실버 가량. 그리고 베니에게서 받은 10실버를 전부 가챠에 털어 넣었다.

       

       순식간에 가벼워지는 돈주머니. 내게만 들려오는 주사위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주르륵 늘어졌다.

       

       띠링!

       

       [1성: 잘 말린 마력초]

       [1성: 가공된 회복초]

       [1성: 오리너구리의 뼛조각]

       [1성: 잘 말린 마력초]

       [1성: 잘 말린 마력초]

       [1성: 가공된 회복초]

       [1성: 잘 말린 마력초]

       [2성: 마법 – 격렬한 불꽃]

       [1성: 최하급 회복 포션]

       [1성: 나무 화살]

       [1성: 잘 말린 마력초]

       .

       .

       .

       .

       .

       .

       .

       [1성: 오러 – 감각 강화]

       .

       .

       .

       .

       .

       .

       [1성: 마법 – 마나 방출]

       

       반 박자 늦게 바닥에 떨어지는 뽑기 내용물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어차피 전부 1성짜리 잡템들이니까.

       

       “아니, 기초 마법을 달랬더니 2성 마법에 마나 방출은 또 뭐야…? 거기에 뜬금없이 오러는 또 무슨…?”

       

       어이가 없어 여신상을 향해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도 잠시. 뒤이어 몰려오는 고통에 입을 꾸욱 다물 수밖에 없었다.

       

       “끄흐윽…!”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은 누가 있는 힘껏 움켜쥔 것처럼 아려왔고, 하복부는 총알이라도 박힌 것처럼 체내 깊숙한 곳에서부터 작열통이 피어올랐다.

       

       다행히도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은 고통.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통증의 잔향이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지식이 뇌를 직접 파고들었으니까.

       

       망치로 머리를 후려치는 것 같은 두통. 이 또한 짧게 끝난 고통이었으나…오래 남는 유형이었다.

       

       시야는 어지럽고, 머리는 아픈데, 심장은 뻐근하며, 아랫배에서는 이물감이 느껴지는 상황.

       

       4성 스킬인 소리를 먹는 발걸음 때만큼 아프지는 않았지만, 여러 군데가 동시에 아프니 정신이 없다.

       

       억울한 마음을 담아 여신상의 볼을 꾹꾹 눌러댔다.

       

       “그냥 기초 마법이면 충분하다고 했잖아….”

       

       웅-

       

       아까보다 명백히 약해진 빛. 심지어 그 안에 담긴 의사도 조금 흐릿해진 것 같다.

       

       배터리가 부족한 인형. 혹은 잔뜩 지친 인간 같은 모양새.

       

       “…혹시 너도 가챠를 완전히 마음대로 하지는 못하는 거야? 심지어 조작하면 지치기도 하고?”

       

       -…….

       

       대답할 기력도 없는지, 서광을 완전히 잃고 침묵한 여신상. 하지만 지금의 골골대는 모습 자체가 하나의 대답이 되었다.

       

       “쓰읍. 그런 건 줄 알았으면 이런 일로 부탁하진 않았지. 급한 것도 아닌데.”

       

       지금 생각해 보면 황혼을 삼키는 자와 싸우기 직전, 내게 4성을 쥐여준 뒤로 가챠에서 쓸만한 게 나온 적이 없었네.

       

       제법 돌렸는데도 하나도 없다는 건 좀 놀랍긴 하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챠니 운이 없었다는 말로 넘어갈 수 있긴 하지만….

       

       어쩌면 단순히 행운을 미리 땡겨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 부담은 당연히 여신이 짊어진 것이고.

       

       미안함에 여신상의 엉덩이를 토닥이는 것도 잠시. 문득 떠오른 생각에 손을 멈췄다.

       

       “어라? 그러고 보니 저번에 여신상 11개 동시에 띄웠을 때는 팔팔했잖아.”

       

       눈을 가늘게 뜨며 여신상을 노려보았다. 조각된 눈동자가 어쩐지 억울해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저쪽도 저쪽 나름의 사정이 있나 보네. 대충 짐작은 간다.

       

       사랑의 여신이 비교적 멀쩡했던 것은 언제나 자신과 관련된 물건을 가챠로 내려줄 때였으니까.

       

       슬쩍 자기 것을 끼워 넣는 것은 간단해도, 가챠 그 자체를 조작하는 건 쉽지 않은 모양.

       

       “뭐, 지금 생각해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네.”

       

       나중에 미궁의 밑바닥에서 사랑의 여신에게 직접 물어보면 될 일이다.

       

       피식 웃으며 일단 새로 뽑은 것들이나 확인하기로 했다.

       

       우선 격렬한 불꽃. 이건 내가 기존에 사용하던 미약한 불꽃의 상위 마법이다.

       

       말 그대로 격렬한 불꽃을 피워올리는 마법인데, 2성이라 그런지 위력이 제법 쓸만하다.

       

       즉, 시험해 보려면 실내가 아니라 미궁이나 제대로 된 연무장에서 해야 한다는 뜻.

       

       아쉽지만 일단 격렬한 불꽃은 다음에 확인해 보기로 하고, 다른 것들부터 살펴보았다.

       

       파앙!

       

       손끝에서 터져 나오는 마나의 힘.

       

       마나 방출. 이건 간단하다. 마력을 소모해 무형의 충격파를 내뿜는 것.

       

       마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원시적인…마력적 기예에 가까운 기술이다.

       

       그만큼 마력 소모는 심하지만 위력은 형편없는 기술. 하지만 발동 속도 하나만큼은 발군이다.

       

       이건 쓰기 나름이겠네.

       

       다음은 뜬금없이 뽑힌 오러. 이 또한 사용법도, 그 효과도 간단하다.

       

       전신에 오러를 둘러 감각을 예민하게 만드는 기초적인 강화. 콩알만 한 단전에서 오러를 끌어오는 감각이 낯설긴 하지만, 난이도 자체는 별거 없다.

       

       다만 소리를 먹는 발걸음을 얻으며 이미 오감이 예민해진 터라 효율은 좀 떨어지네….

       

       이것도 자세한 건 미궁에서 직접 써보며 몸으로 배워야겠다.

       

       지금 해야 할 일은….

       

       “마력초나 치워야지.”

       

       언제나 그렇듯, 잡템 처분이다.

       

       정체 모를 괴수의 뼛조각을 아공간 깊숙한 곳에 처박아 두고는 마력초와 회복초를 번갈아 우물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먹을 만큼 먹고, 나머지는 서랍에 대충 쑤셔 넣은 뒤. 아직 풀 맛이 나는 입가를 스윽 닦으며 마법서를 제단 삼아 올려진 풀돌 조각상을 들어 올렸다.

       

       “하아. 약속은 지켜야지.”

       

       조각상을 품에 안고 침대에 누웠다.

       

       

       

       

       

       

       

       

       

       

       

       

       다음 날 아침.

       

       어쩐지 조각상의 피부가 윤기 있어 보였다.

       

       …내가 자는 사이에 뭘 한 거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잠든 사이에 메챠쿠챠….

    나데나데 받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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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cha Addict in a Matriarchal World

Gacha Addict in a Matriarchal World

남녀역전 세계의 가챠 중독자
Score 8.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Gacha – Civilization’s Ultimate Game. Spin now for a shot at fortune. Spending that doesn’t disrupt your lifestyle? That’s virtually free-to-play. Keep spinning until you strike gold – success is guaranteed. … … Today, yet again, I’m at the gacha wheel. “Did I get a 5-s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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