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모두 자고 있어야 할 시각.
밤이 깊었지만 보육원에서는 때아닌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와글 와글 –
“쟤들 좀 봐! 다쳤나 봐!”
“쉿! 조용히 해야 해.”
“맞아, 제이니 언니가 함부로 남에대해 말하는 거 아니랬어.”
아주 똑 부러지는 여자아이였다.
한순간에 아이들을 조용히 시켰으니.
그리고 제이니라고 불린 사람이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일 것이다.
“…어떻게 찾아오셨나요? 뒤에 아이들은…”
사십이 넘어가는 인원이다 보니, 적잖이 당황한 기색이 느껴졌다.
다들 상태도 안 좋았기 때문에 제이니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클로셀 영감님이 슬금슬금 내 옆으로 붙었다.
“내 자네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네만, 아이들을 이곳에 맡기면 안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다네.”
사실 영감님의 말이 정론에 가까웠다.
납치되어 있던 아이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든 수색에 나설 것이다.
결국에는 이곳을 찾아낼 확률이 크겠지.
하지만.
“괜찮아요.”
아까부터 할머니의 시선이 끈덕지게 따라붙었다.
내 몸주신인 할머니로 말하자면.
아이를 점지 할 뿐만이 아니라, 잘 자라게 보호해주는 역할도 하는 신령님.
자꾸만 혀를차고 싶어지는 걸 보면, 상당히 안타까워하는 게 분명하리라.
“그럼 되었네. 따로 필요한 도움은 없는가?”
“으음…”
고민하고 있을 때 제이니가 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아주 당찬 표정을 하고서는 말이다.
“아이들이 아픈 건 알겠어요.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것도요. 여기오는 아이들은 다 사정이 있으니까요.”
다시 말을 시작하려던 제이니가 돌연 허리에 손을 얹었다.
“헬렌? 먼저 스튜를 데워줄래?”
“네에!”
삼삼오오 모여 어딘가로 달려가는 아이들.
아마 내 뒤에 서 있는 아이들에게 줄 스튜인 것 같았다.
제이니가 목을 가다듬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이 아이들을 한 번에 다 받는 건 불가능해요.”
나는 별다른 대답은 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아직 할 말이 더 남아 있는듯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해볼게요.”
갈색 머리에 진한 눈썹.
오뚝한 콧대와 두툼한 입술까지.
심지어 눈마저 사슴을 닮아 있었다.
관상이 아주 좋았다.
“흐음….”
큰 대운 같은 것이 없는 평범한 사람.
아마 운수가 터질일도 없을 것이다.
옆에 아이들에게 죄다 나눠 주고 있었으니까.
“기특한 사람이네.”
“네?”
심지가 대나무처럼 곧은 사람.
그것도 아주 좋은 방향으로 뻗어 있었다.
“여기로 온 이유가 있었네요.”
“저기요! 이상한 말만 하지 말고…”
“복 받으실 거예요. 으음, 아마 바라는 형태로 찾아올 것 같네요.”
제이니가 바라고 있는 형태조차 아름다울 것 같았다.
마음이 푸근해져 오는 것이 할머니께서도 마음에 들어하는 듯 했다.
나는 곧장 품을 뒤져서 종이를 하나 꺼냈다.
“기다려보세요.”
스윽 –
짧게 썼지만 이 정도면 충분한 도움이 되리라.
“음…이왕 하는 거 확실하게 하는 게 좋겠지? 루나야.”
“아우?”
“잠깐 손 좀 줘볼래?”
***
알루어드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전날 밤에 클로셀에게 연락을 받았다.
목적지는 수도이며 하르프왕국의 국경에 들어섰다고.
일행들과 합류하기 위해 부랴부랴 움직이던 알루어드는 이상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또!”
어디가 아픈 건지 입술이 새파래진 아이.
두 눈이 움푹 파인것이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았다.
“꼬마야, 괜찮니?”
흐린 눈이 알루어드에게로 향했다.
“신관님…?”
“그래, 나는 일리아님을 모시는 신관이란다.”
“저…전 돈이 없어요.”
흠칫.
오늘만 벌써 몇 번을 들었던 말일까.
이 아이를 만나기 바로 직전에 다른 꼬마를 치료해주고 오는 길이었다.
하나 같이 하는 말이 저것이었다.
돈이 없다는 말.
어떻게 어린아이들이 아픔보다 돈을 먼저 걱정한다는 말인가.
“일리아시여…”
다 그간의 업보이리라.
“꼬마야, 신성력을 쓰는데는 대가가 필요 없단다.”
원래 이런 곳에 쓰라고 받은 힘인데, 따로 대가가 필요하다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었다.
“정말요…?”
“대가가 있어도 신관들이 치를테니 걱정 마렴.”
더 대화를 나누는 것 보단 먼저 행동하는게 좋으리라.
알루어드의 손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창백했던 아이의 얼굴에 핏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파랬던 입술도 점차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하아…따듯해요.”
“왜 여기에 혼자 있니?”
알루어드의 물음에 아이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아픈거 알면 누나가 걱정해요.”
“허어…”
벌써 배려심이 이렇게 깊은 아이라니.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퍽 아름다웠다.
알루어드의 눈빛이 한없이 따듯해졌다.
“저기, 신관님! 혹시…”
“말해 보렴.”
“아픈 친구들이 더 있는데 도와주실수 있나요?”
“같이 가자꾸나.”
알루어드가 아이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또 이렇게 이어졌다.
아픈아이에게서 아픈아이에게로.
어떻게 가는 길 마다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설마…”
아이를 따라가던 알루어드가 들려오는 소리들에 귀를 기울였다.
“간밤에 불이 났다지 뭔가?”
“안에 있던 식량들이 홀라당 타버렸다더군.”
“그것이 다가 아닌 것 같네. 내 알고 지내는 사람의 말에 따르면…”
소란스럽게 오고 가는 말들.
알루어드는 단번에 눈치챘다.
저 사건에 크리스가 연관되어 있음을.
‘역시, 그냥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길을 따라 외곽으로.
그렇게 한참을 더 간 알루어드가 도착한 곳에선 시끌벅적한 식사준비가 한창이었다.
“언니! 빵이 모자라요!”
모두가 이른 아침인데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칼슨씨가 더 가져다주기로 하셨어!”
“누나! 어제 온 친구가 열이 많이나요!”
열이 난다는 말에 팔을 걷어 붙이고 달려가는 여인.
알루어드 역시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교단에서 나온 신관입니다.”
무언가 말을 하려는 여인.
알루어드가 손을 흔들며 제지했다.
“돈은 없어도 됩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스으으 –
번쩍 –
눈 부신 빛이 한동안 아이의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조금씩 편안 해지는 호흡.
그제야 두 사람의 얼굴에 안도감이 피어났다.
“감사해요. 신관님이 아니었다면 곤란했을거예요.”
“아픈 아이들이 더 있습니까?”
알루어드가 바쁘게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녔다.
번쩍 –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상태가 너무 안 좋았다.
학대를 당한 흔적마저 보였다.
보아하니 오갈 곳이 없어 보이는 아이들.
아까부터 언니라고 불리던 여인이 알루어드의 앞으로 다가왔다.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일이십니까?”
“느끼하게 생긴 사람이 오면 건네주라고 했어요.”
“…?”
알루어드가 황당한 얼굴로 쪽지를 건네받았다.
자기를 보고 느끼하다고 표현할 사람이 한 명 떠오르기는 했다.
종이를 향해 고개를 내린 알루어드는 이내 그 사람이 크리스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 최선을 다해 도울 것, 보호 필요.
짧은 글귀밑에 적힌 크리스라는 이름.
그리고 찍혀진 작은 손 모양.
“…루나님?”
앙증맞은 손자국이 쪽지에 도장처럼 찍혀 있었다.
“제가 제대로 드린 게 맞나요?”
“맞습니다.”
주변을 훑어본 알루어드가 품속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들었다.
“지금은 가진 돈이 이것밖에 없습니다.”
경비로 사용하려고 가져온 30실버.
이곳에 있는 아이들이 많아 크게 도움이 되지는 못하리라.
이럴 줄 알았다면 여유있게 챙길 것을.
‘이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잠시 생각하던 알루어드가 품속에서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파앗 –
“알루어드입니다.”
– 알루어드경! 말씀하십시오.
“하르프 왕국내에 있는 신관들의 힘이 필요합니다. 국경과 가장 가까운 곳에 연락을 부탁드립니다.”
크리스를 따라다녔던 알루어드는 직감할 수 있었다.
이것이 이번만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걸.
‘합류가 늦어지겠구나.’
부디 자신이 이곳으로 오게 된 이유가 이것이 맞기를.
“일리아시여…”
***
부스럭 –
새벽에야 겨우 잠들었다.
피곤하지만 어쩌겠는가.
다 내 팔자인 것을.
스윽 –
눈을 뜨니 바로 앞에 잠들어 있는 세레나가 보였다.
잡티하나 없는 새하얀 피부.
그림 같은 이목구비와 선홍빛 입술.
잠들어 있어서 그런지 차가운 얼굴이 조금은 부드럽게 바뀌어 있었다.
세레나를 구경하던 나는 무언가 허전함을 깨달았다.
“…음?”
세레나와 나 사이에 잠들어 있어야 할 루나가 사라진 것이다.
“…?”
벌떡 –
몸을 일으킨 나는 입을 떠억 벌리고 말았다.
작은 몸 하나가 침대 위에 서 있었다.
루나가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커쪄.”
저 진짜로 아픈거였네요.
다들 건강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