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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9

        

         “으…….”

         

         굳게 다물어진 소녀의 입으로부터 가녀린 침음이 새어 나온다.

         악몽이라도 꾸는 것처럼 감겨진 눈이 움찔거리니, 속눈썹 또한 자연스럽게 파르르 떨렸다.

         

         억척스럽게 팔짱도 끼고 몸도 의자에 파묻었지만 잠든 건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자신의 사고 속에 깊이 파고들어 나올 기미도 없는 자의식을 깨어 있다고 표현하기도 애매했으니, 최종적으로 그녀는 고뇌하고 있다고 하는 게 맞겠다.

         

         ‘엔지니어링처럼 딱딱하지도 않고, 해킹처럼 무례하지도 않다.’

         

         스스로를 넷 아티스트라 소개하는 로잘린 세리노는, 영재이자 기재였다.

         객관적으로 또래는 물론 조직 내부에서 봐도, 전혀 무관계한 타인의 눈으로 봐도. 막말로 자존심과 에고 덩어리인 동종업계 종사자들을 데려다 놓고 평가해보라고 해도 마지못해 인정할 천재.

         

         하지만 그녀는 그걸 자랑하거나 굳이 내세운 적은 없었다.

         딱히 겸손함의 미덕 같은 건 아니었고 그저 당연한 사실 중 하나로 자리잡아 버린 것을 입 아프게 떠들 이유는 없었으니까.

         

         철없던 어린 시절, 급여 인상 협상이 더디다는 아버지의 불평을 듣고 독학으로 배운 사이버 엔지니어링 기술을 최대로 활용.

         

         메가 코프의 하청을 받는 동네 중견 기업 전산망을 크래킹해서 요상한 자금 흐름 및 사장이 조성하던 비자금의 실체를 언론사에 익명 제보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지역 전자신문電子新聞 일면에 파란만장하게 데뷔한 후.

         

         여러 우여곡절 끝에 파이브 아이즈에 투신해 현재 일선 특무조 중 하나에 소속되기까지.

         

         언제나 열세한 전장에서 싸워온 만큼 무패 전설은 아니지만, 나이에 비하면 꽤나 화려한 이력서-위법 경력-을 쌓아 올려온 로잘린은 동등하거나 엇비슷한 조건에서 맞붙는다면 엘리시움 소속 정예 해커들을 상대로도 흠씬 두들겨 패줄 자신이 넘쳤다. 아니, 있었다.

         

         구체적으로,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씨이….”

         

         난폭하게 콧김을 내뿜는다.

         옆자리에서 평온한 태도로 휴식하는 아시프 외에는 그 모습을 볼 사람도 없었거늘, 마치 건너편 빈 자리를 점유하다가 떠나버린 라이벌 겸 강적에게 보여주듯이 다리를 꼬았지만.

         

         …이내 손윗사람 마냥 우아하고 고고한 자세로 자신을 가르치던 흑의 소녀를 따라하는 기분이 들어서 팩하고 풀어버렸다.

         

         파라다이스 코퍼레이션의 도시 안전 확보를 명목으로 한 대규모 기술 탈취 공세.

         블랙 마켓에 의뢰가 올라왔을 때부터 심각한 인명 피해가 예상되었기에, 여러 조직에서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감시하던 사안이다.

         

         그리고… 최근 로잘린의 관심과 사고를 독차지한 해커이자 용병, 아나스타샤 발렌타인의 최초 표면적 활동이 관측된 행사이기도 했고.

         

         당시 사건 전후로 경찰이나 기업에 신고된 해킹 피해 신고만 해도 약 8천여 건.

         

         그것도 익명의 무단 접속 기록이 있는 걸 확인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넣어진 제보만 합산된 것이니, 직접적인 피해가 없어서 무시한 사람과 당한 줄도 모르는 경우까지 가정하면 몇 만에 다다를 대규모 공세가 분명했는데….

         

         “……리더는 그녀가 뭐라고 생각해?”

         

         “마냥 유하게 바라볼 순 없지만 또 당장 적대하지 않아도 괜찮겠지. 적어도 파라다이스 한정, 우리 측에서 포섭한 인물보다 더 높은 곳에 인맥(Connection)이 있는 건 확실하고.”

         

         “그런 뻔한 걸 쉽게 말하는 것 말고는 뭐 없어요…?”

         

         투덜거려봐도, 뚱한 기색을 내비치는 로잘린이 재밌는 듯 아시프는 얕은 웃음소리만을 냈다.

         

         뒷배나 보조해줄 군세가 있는 게 당연한 수준의 작전이었기에 모든 조직들이 누가 그녀의 배후인지 알아내고자 서로 신경전을 펼쳤다.

         

         파이브 아이즈가 로잘린과 아시프를 투입한 것도 권유를 가장한 소속 조사의 일환.

         작전의 큰 축을 담당했을 게 분명한 아나스타샤를 끌어들이는 척하면서 배후를 떠보는 것.

         

         하지만 현장 요원인 로잘린은 근래 관문에서 발생한 폭발 사고를 개인적으로 수사해보고, 직접 손속도 나눠보다가 깨달았다.

         

         유명 넷 해커가 다녀간 자리에는 그 사람 특유의 작업 방식으로 인한 뚜렷한 흔적이 남는다.

         흡사 사람의 지문이나 홍채 패턴처럼 흉내내기 귀찮고 복잡한 흔적이.

         

         파고든 경로, 이용한 보안상 취약점, 주로 사용한 명령어와 코드 양식, 미처 지우지 못한 기기 할당번호 등등,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침입했던 시스템을 완전히 원상복구해 놓지 않는 이상 필연적으로 남는 것들이다.

         

         그러니 집단이 일으킨 일이라면 참가한 인원수만큼의 가지각색 다양한 자취가 남았어야 하는데, 아나스타샤가 휩쓸고 지나간 네트워크에는 잡초 한 포기 남지 않았다.

         

         불규칙 속의 규칙, 혼돈의 질서라고 해야 할까. 철저한 걸 넘어 살벌하기까지 한 강제력과 실력, 그리고 밑 작업이고 나발이고 하나도 없는 맨땅에서도 주저없이 행동에 나서는 담대함과 즉흥성을 별 관계없어 보이는 일련의 사건사고들로부터 로잘린은 읽어냈다.  

         

         충분히 감출 수 있음에도 감추지 않았다.

         가히 폭력적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는 자신감의 화신.

         

         그렇기에 하베스트 플래닛의 하층부에서 있던 건을 로잘린은 아나스타샤 발렌타인의 ‘최초 표면적 활동’으로 분류하였다.

         

         그녀 정도 되는 능력자가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서 튀어나왔을 리는 없으니 틀림없이 현란한 과거가 존재하리라.

         또한… 갑자기 전면에 모습을 드러낸 연유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고.

         

         “…모르겠어요.”

         

         동류, 마찬가지로 천재인 자신이라면 이해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말을 섞을수록 시각의 관점, 가치관, 그릇부터가 다르다는 걸 체감하게 되니 점점 믿음이 약해졌다.

         

         

         ‘세상을 너무 이분법적으로 보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

         ‘신념을 가지되, 사상에 심취하지는 마.’

         ‘한두 개쯤 감춘 비밀이 없다고는 안 했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머리 꼭대기 위에 올라선 것처럼 툭툭 던져오는 화두.

         막상 겪어보니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울 정도로 날카로운 솜씨.  

         

         게다가 혼자서 초대형 프로젝트를 보란듯이 여러 번 강행했으면서 노리는 바도 불분명했다.  

         

         관문 한 구역을 통째로 날려버린 거야 가족의 복수라 쳐도, 로잘린이 일주일 넘게 공들여 준비한 디도스 공격을 무슨 푼돈 벌어야 한다면서 없던 일로 만들어 버리질 않나~

         사람 좋은 것도 정도가 있지, 일반 시민들은 물론 수배자인 자신들까지 배려해서 빠져나갈 구멍을 계속 마련해주지 않나!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을 부르짖는 몇몇 놈들에게는 좀 본받아 보라고 보여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결국 고심 끝에 로잘린이 내린 결론도 아시프와 마찬가지였다.

         섣부른 판단을 내리기 힘든 회색분자이자. 무시하기엔 너무 다재다능한, 수상쩍기 그지없는 프리랜서 해커.

         

         “…흥!”

         

         ……정말 여러모로 사람을 고뇌하고 신경 쓰이게 만든 주제에.

         정작 마주해보니 미워하기 힘든 매력을 내뿜는 미인이라 화난다는 생각을 하며 로잘린은 널찍한 객실 테이블에 발을 뻗고 휴식을 만끽했….

         

         쾅—!!

         

         “꺅?!”

         “!!”

         

         돌연의 폭음과 함께 의자, 차체 전체가 요동친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본능적으로 총부터 뽑아든 아시프는 청각을 곤두세운 채 사주 경계를 시작했고, 아까 전 아나스타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차량 정보 시스템에 쥐구멍을 파 둔 로잘린은 곧바로 노트북을 꺼내 기차 내외에 달린 관측 카메라를 불러왔다.

         

         계급적으로는 조장과 조원이더라도 아시프가 파워 플레이어(Power Player; 강함과 주도권을 과시하는 역할)라면 로잘린은 오퍼레이터 겸 서포터.

         

         그가 상황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게 급선무였다.

         

         허나… 주행 경로 차단부터 호버크래프트의 매복, 협박에 의한 정차까지. 어디까지나 일반 시민으로 위장한 채 몸을 낮추고 있던 그들이 간섭할 여지는 없었으니.

         

         우지직! 하는 굉음이 들리고 뜯겨진 문짝이 모래사장에 파묻힌다. 자칭 일대의 지배자, 타이토 갱단원들이 순식간에 내부로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목숨 아까운 새끼들은 객실 안에 처박혀 있도록! 저항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피 보지 않고 넘어갈 일이다!!”

         

         기차를 쩌렁쩌렁 울리는 저급한 위협에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찌푸려졌다.

         상대적으로 냉정한 둘과는 달리 다른 객실 칸에서는 비명과 쌍욕이 튀어나왔고.

         

         아시프야 살다 보니 별 재수없는 경우가 다 있다며 허전한 어깨춤을 매만지는 정도였지만, 기껏 통로 곳곳에 있는 차단문들과 출입문을 모조리 걸어 잠그고 방어태세에 돌입했던 로잘린은 분노를 토해낼 따름이었다.

         

         “이씨… 단순하고 야만스럽긴! 이 인간이고 저 인간이고, 잠긴 도어락 같은 게 있으면 해킹부터 시도해보는 게 상식 아닌가요?!”

         

        원래 쉽고 편한 방법이 있으면 굳이 돌아갈 필요가 없는 법이지만… 그녀의 ‘상식’이 모두에게 통용되는 법은 아니었으니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삐죽삐죽 로잘린.

    그런데, 바로 아나스타샤가 나오는 부분까지 몰아 쓰려고 휴재했던 것 같은데 왜 이렇게 꼬였을까요…?

    띠링띠링 님의 쿨하신 100코인 후원! 너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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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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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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