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인생이 다 그런 거지.(1)
“이세계로부터 침략자가 쳐들어온
지 어언 30년.”
사회자가 뭔가를 떠들고 있다.
그것만 해도 신경이 거슬리건만,
망할 방송국은 조명 조절에 실수했
는지 눈이 부셔서 죽을 지경이었다.
다른 애들은 방긋방긋 웃으며 얌
전히 앉아있는 것이 그다지 눈이 부
시지 않은 모양이다.
“인류는 미증유의 위기를 겪었으
나 결국 견뎌냈습니다!”
손을 크게 흔들며 마이크를 붙잡
고 과장하는 사회자의 모습이 잘 이
해되지 않았다.
요즘은 저런 행동이 잘 먹히는 건
가. 텔레비전도 챙겨보지 않은 지
오래돼서 잘 모르겠다.
고개를 돌려 뒤쪽 스크린을 보니
과거에 있던 여러 사건의 하이라이
트만 모은 영상이 지나가고 있었다.
국가를 무너트린 거대괴수.
한 도시의 인간을 모두 기계로 개
조한 비밀조직.
인류를 행복하게 해준다며 빗물을
마약으로 바꿔버린 미친 마법소녀.
모든 통신망을 마비시킨 초능력자.
바다를 조절하며 육지를 수몰시킬
계획을 세운 정령 여왕.
전 세계 화산을 자극했던 불사조.
거대한 로봇을 타고 태평양에서
최종결전을 펼친 전자두뇌.
수없이 많았던 인류 멸망의 위기들.
정말 저기서 잘도 살아남았네 싶
은 사건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중
내가 참여한 전투가 보일 때마다,
약간 자랑스러운 기분이 피어오르긴
했다.
“언니 저거 격퇴할 때 참여하지
않으셨어요?”
“그러게, 벌써 2년이나 되었구나.”
“이제 은퇴하실 때 되지 않으셨어
요? 벌써 3년이나 하고 계시는데.”
“그러고 싶은데 아직 내 이야기가
안 끝났는걸.”
“얼마나 남으셨어요?”
“이제 보스만 해치우면 될 거야.”
“부럽다. 전 간부도 아직인데….”
“막상 은퇴할 때가 되니까 생각이
달라지더라고, 그러니까 후회가 남
지 않도록 즐겁게 보내렴.”
“네! 언니!”
주변 여자애들이 조잘거리는 소리
가 들려오자, 흥분한 마음은 금세
가라앉았다. 시끄럽게 자기들끼리
떠드는 것을 듣고 있자니 짜증이 몰
려오기 시작했다.
귀를 막을 수도 없고.
건너편의 초청석을 바라보니, 남성
영웅들은 다들 조용히 입을 다물고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라리 저쪽에 배치해주지.
시끄럽게 조잘거리는 여자애들 사
이에 끼어있자니 괜히 나왔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프로그램은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벌써 그만두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정말 때려치울까 싶었으나, 금세
프로그램에 나온 이유를 떠올렸다.
텅 빈 통장, 먹을 거 없이 얼음만
굴러다니는 냉장고.
그 대참사를 떠올리자 마음이 가
라앉았다.
그래, 조금만 더 참자. 요즘 자유
퇴치 수익도 안 들어오는데 참아야
지. 이계의 적과 싸우는 것에 비하
면 이 정도 짜증은 견딜 수 있다.
…니코틴 땅기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방송국에
서 마련한 영상이 모두 끝났는지 사
회자는 다시 열정적으로 손을 흔들
며 떠들기 시작했다.
“그럼, 이계 침공 30주년 기념방
송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지금
부터 저희를 지켜주시는 영웅들을
한 팀씩 소개해드리도록 하죠.”
아, 그래서 이렇게 분류별로 모아
서 앉혀둔 건가.
프로그램 내용에 대해 미리 들은
거라고는 옛날의 영웅들과 지금의
영웅들을 모아서 토크쇼를 한다는
이야기뿐이었다.
“마법은 우리에게 맡겨라, 귀엽고
깜찍한 마법소녀! 총 네 분이 나와
“주셨습니다.”
처음부터 마법소녀인가. 왜 하필
우리 쪽이지.
“여러분 사랑해요!”
“언제나 성원 감사드려요!”
“귀엽고 정의롭게!”
옆에 앉은 여자애들이 뭔가 포즈
를 잡으며 카메라에 자기 어필을 하
기 시작했다. 부끄러워 보여도 저게
이익이 되니까 하는 거겠지.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뭔가 어필을
해야 하나 싶었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았기에 미소를 지어 올리고 손을
흔들었다.
어차피 누군지 알 녀석들은 다 알
것이다. 30년이나 굴러먹었으면 뭘
해도 인지도는 쌓이는 법이니까.
“역시 마법소녀분들은 활발하시군
요.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 * *
은퇴자 질문 시간, 사건 당시 겪
은 감정, 최근 근황 등. 그렇게 토
크쇼는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은퇴 후, 힘이 사라지고 불편한
점은 없으셨나요?”
“그렇게 불편한 점은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빌려온 힘이었으니까요.”
저 녀석은 기억난다.
극초기 시절 변신 전대의 리더 녀
석. 자신의 이야기 속 마지막 전투
에서 거대로봇과 일체화하여 주먹을
휘둘렀던 변신 전대의 레드.
꽤 친한 녀석이었는데 어느새 연
락이 끊어졌었지.
“그래도 힘을 단련하시는 대에 꽤
시간을 쏟았던 거로 알고 있습니다
만. 아깝지 않으십니까?”
“힘은 사라졌지만 단련된 육체는
그대로 남더라고요. 지금도 보통 사
람보다는 훨씬 힘이 강합니다.”
“그렇군요. 그럼 다음 질문입니다.
은퇴 후 여러 소문이 돌았는데, 요
즘은 어떤 일을 하고 계시나요?”
“해외로 떠나 이계의 힘으로 피폐
해진 지역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
습니다. 돈을 벌 기회가 있지만, 국
제연합에서 받는 연금으로도 삶을
유지하긴 충분했습니다.”
연금. 꿈같은 단어가 귓가에 스쳐
지나간다. 동시에, 나는 언제 은퇴하
나 하는 생각이 솟아오른다.
내 동기들은 지금 저기에 앉아서
편하게 연금을 받아먹고 있는데, 나
는 현역으로 왜 이러고 있는 걸까.
“그렇군요. 역시 옛 영웅다운 삶을
살고 계시는군요. 그럼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그 말에, 그는 마이크를 들고일어
나 현역 영웅들을 바라보았다. 그리
고, 눈을 빛내며 연설을 시작했다.
“지금 너희들이 하는 일은 힘들고
고달플 것이다. 외롭게 홀로 싸우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동료들과 함께
싸우는 사람들도 있겠지.”
힘찬 목소리로 시작된 연설. 흔하
디흔한 격려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옛 시대를 살아온 영웅으로서의 진
정성이 담겨 있다.
“다들 한 번쯤은 패배를 겪었을
것이고, 내가 왜 이런 일을 해야 하
냐고 어두운 마음에 사로잡힌 적도
있을 것이다.”
“세상은 너희들의 밝은 면만 보려
고 하겠지. 영웅으로서, 일반인을 초
월한 초인으로서의 일면만. 하지만
나는, 우리는 알고 있다. 너희 또한
한 명의 사람으로서 고통과 괴로움
이 있다는 사실을.”
난 정신적인 면은 다 졸업했고 텅
빈 통장이 문제다만.
“괴롭고 힘들 때, 항상 기억하길
바란다. 우리 선배들 또한 그 길을
지나갔단 사실을. 정말 힘들면 선배
들에게 도움을 청해도 좋다. 설령
힘을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너희를
도와줄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
그렇게 말하며 그는 초청석에 앉
은 현직 영웅들을 쓱 훑어보았다.
현직 영웅들은 반짝거리는 눈빛으
로 옛 영웅을 바라보았지만, 나는
별생각이 들지 않아 심드렁한 눈길
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신적인 면은 이미 완벽하니 돈
이라도 나눠줄 수 없을까.
“너희들의 어깨 위에 올려진 인류
라는 큰 짐은 너 혼자 짊어지고 있
는 것이 아니다. 동료가, 우리가, 미
래의 후배가 함께한다는 사실을 알
아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후배의 얼굴
을 눈에 담으려는 듯 눈에 힘을 주
고 우리를 한 명씩 쳐다보았다.
한 명씩 둘러보던 그 눈길이 마침
내 내가 앉아있는 자리에 닿았고.
그의 올곧은 눈빛과 나의 심드렁한
눈빛이 교차했다.
그의 눈은 날 알아채지 못한 채
지나갔지만, 곧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는지 급격히 고개를 돌리며
입을 딱 벌렸다.
‘네가 왜 여기 있어?’라는 의문에
가득 찬 당황한 눈빛.
뭐 인마, 난 아직 은퇴 못 했는데
어쩌라고. 나도 왜 내가 여기 앉아
있는지 모르겠다.
옛 영웅이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자, 주변에서 웅성거리
는 소리가 들려왔다.
“쟤 누구야?”
“그 있잖아. 30년 차 마법소녀.”
“아 나 그 소문 들어본 적 있어.
괴물을 피떡으로 만든다는 매지컬
블러디. 실존 인물이었어?”
정식 영웅명은 크림슨★해머지만
어느 쪽이든 쪽팔리긴 매한가지.
점차 웅성거림이 퍼져나가자, 사회
자도 마침 잘되었다 싶었는지 과장
된 포즈를 취하며 나를 호출했다.
“오, 저기 계신 분은 최장기 마법
소녀 크림슨 해머이시군요. 부디 무
대 위로 올라와 주시길!”
망할.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
대 위로 걸어 나갔다.
스쳐 지나가는 옛 친구도 이럴 줄
몰랐다는 듯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 녀석과 투덕거리는 건 나중에
해도 되겠지.
푹신한 의자에 몸을 맡기자 사회
자가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그럼, 크림슨 해머 님 몇 가지 질
문을 해도 괜찮을까요?”
“그냥 이하람이라고 이름으로 불
러주시죠.”
“특이하시군요. 영웅명 대신 본명
이라. 무슨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왜긴, 그냥 쪽팔려서 그러지.
“하도 오래 활동하다 보니 별명이
너무 옛날 별명이라 마음에 안 들어
서 말이죠.”
“그렇군요. 이해합니다.”
사회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
공감을 표현했다.
솔직히 애들이 쓰는 별명들도 유
치하긴 마찬가지지만, 사회자가 이
대답으로 납득했으니 상관없겠지.
“그럼 다음 질문을 하도록 하죠.
현역으로 30년이나 활동하시는 건
다른 나라에도 없는 대기록입니다.
이하람 님은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
각하시나요?”
난들 알겠냐. 난 간부 코빼기도
안 보여서 다른 이야기의 적이나 때
려잡고 사는 신세인데.
“오랫동안 정의의 영웅으로 활동
할 수 있어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요즘은 제 이야기의 적들도
나타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군요.”
“마지막으로 이야기의 적이 등장
하신 게…?”
아픈 부분을 건드리는구만.
“10년 전에 정예 군단이라고 몰려
온 게 마지막이었습니다.”
“꽤 오래되었군요.”
“하지만 제 이야기의 적들은 꽤
강한 만큼 될 수 있으면, 나오지 않
았으면 합니다.”
그냥 내일 간부랑 보스까지 한 번
에 다 나와주길 바란다. 제발. 은퇴
시켜줘.
사회자는 내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스태프에게 뭔
가가 적힌 흰색 쪽지를 건네받았다.
“마침 당시의 영상 자료가 있다고
합니다. 함께 보도록 하죠.”
그거 좀 위험한 영상일 텐데…?
내가 막을 새도 없이 영상은 뒤쪽
스크린에서 흘러나왔다.
어두운 밤.
공중에서 촬영한 것인지 내가 보
이지는 않았지만, 화면 가득히 검은
색 촉수가 찍혀있었다. 도시 하나를
모조리 집어삼킨 이계의 존재들.
검은 촉수는 도시 전체를 침식해
이계의 영역으로 만들고, 땅에 뿌리
를 박고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도시 전체가 저 촉수
생명체에게 빼앗길 무렵.
콰직, 우드득.
어디선가 살점이 으스러지는 소리
가 들리더니, 하늘을 향해서 성장하
던 촉수 기둥이 옆으로 쓰러졌다.
“저기 보이십니까? 지금 크림슨★
해머가 이계의 존재들을 퇴치하고
있습니다!”
헬기에서 촬영하는 모양인지 기자
가 떠드는 소리가 영상에서 흘러나
왔다. 그에 맞춰 화면이 줌인 되고,
화면 가득히 내 모습이 드러났다.
온몸에 살점을 두르고, 피로 얼룩
진 옷을 입고 있는 마법소녀의 모
습. 트레이드 마크인 금빛 망치는
여기저기에 피와 살이 달라붙어 본
래의 색인 금빛을 잃어버렸다.
화면 안의 나는 아무런 감정이 없
는 듯 몸을 흔들며 다가오는 촉수
괴물들을 망치질 한 번에 고기로 바
꿔버리고, 시체를 양산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마을 중앙에 뿌리를 박고 가지를
뻗고 있는 거대한 촉수.
망치를 휘두르며 거기까지 다가간
나는 촉수 앞에서 자세를 잡더니,
피 칠갑을 한 붉은빛의 거대한 망치
를 휘둘러 촉수 기둥을 파괴했다.
그것으로 끝났으면 좋았을 것을,
망치에서 발생한 충격파는 멀리 퍼
지며 주변의 집들을 파괴했다.
충격파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
속해서 뻗어 나가 영상을 찍고 있는
헬기를 휩쓸었고, 기자의 비명을 마
지막으로 영상이 끊겼다.
영상이 끝났지만, 스튜디오에는 침
묵이 감돌았다. 어떻게 봐도 잔혹
스플리터 영화인데 저걸 방송에 내
보냈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사회자도 말문이 막혔는지 멍하니
검은 스크린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건 방송사고구만.
자료화면도 미리 체크를 안 했던
건가, 저걸 그대로 내보내다니.
확실한 것은 근래 언급되지 않았
던 내 이름이 다시 인터넷에 언급될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Chapter 02
Posted by ? Views, Released on January 2, 2024
, Mr. Magical Girl
마법소녀 아저씨
Status: Ongoing Type: Web Novel Author: Cat Swipe, 냥둘러치기 Artist: Hi, VIKPIE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202X.
In the back alleys of Seoul, South Korea…
He looked down at the heroes under his feet—the heroes who adorned themselves in a variety of colorful clothes, as if they were K-pop idols on TV.
Those heroes? They were crawling beneath him, their gaudy outfits smeared with dirt.
That was the true nature of being a hero. He hoped the individuals before him learned that lesson well.
It was time to ensure they never forgot it.
As a magical girl, he swung his hammer down.
This is a bright story. The story of a man reclaiming his l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