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선한 연구소와는 다르게 격리실은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TV 소리를 제외하면 차분한 분위기였다.
TV에서는 얼마나 회색 사신이 위험한지, 그리고 그런 위험 오브젝트를 사설 연구소에 맡기는 것이 얼마나 무책임한지에 대해서 성토하고 있었다.
방송에서 하는 말을 들어 보면 나는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고 사람들을 유혹해서 괴물로 만들 수 있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었다.
이번 사건에서 내가 한 일은 거의 없는데도 말이다.
그래도 이번 사건에서 얻은 것은 있었다. 강철 돼지상이 가지고 있던 능력 한 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별로 쓸모가 있는 능력은 아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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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사신 몸에서 이상하게 좋은 향기가 나네.”
예린의 품에 안겨 멍하니 TV를 보던 중에 예린이 문득 말했다.
“아무런 냄새가 안 나는 것 같은데도 왠지 그런 향기가 나는 것 같아. 뭔가 바뀐 건가?”
예린은 내 머리를 끌어안으며 의아해했다.
사람들을 홀리고 미치게 만들던 돼지상과는 달리 ‘그냥 좋은 향기가 나네’ 수준으로 열화된 능력을 얻었다.
사실 내가 갖춘 능력들이 전부 그렇다. 파괴한 오브젝트들의 열화카피.
원래 가지고 있던 죽이는 방법에 대한 힌트를 얻는 능력을 제외하면 모두 내가 해치운 오브젝트들이 가지고 있던 능력이다.
유령화도, 물리 면역도 말이다.
저 두 가지만으로도 충분하고도 넘쳐서 오브젝트를 찾아다니면서 능력을 수집하고 다니고 있지는 않았다. 능력을 얻기 위해 오브젝트를 찾아다니는 건 재미도 없고 귀찮기만 할 뿐이다.
“도대체 뭐가 바뀐 걸까? 실험실로 가서 무슨 성분인지 분석해봐야 하나?”
예린은 아직도 갑자기 생긴 내 능력을 의아해하며 조심스럽게 분석하고 있었다. 어디서 이런 향기가 나는지, 실체가 있는 향기인지 열심히 분석하고 있었다.
간이 분석기를 머리 위에 들이대는 정도는 그러려니 했는데, 갑자기 두피를 핥아서 맛을 보려고 할 때는 식겁해서 유령화로 도망쳤다.
그전에 오브젝트에서 발생하는 유혹성 요소는 대부분 매우 위험하다는 상식이 아예 없는 건가?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예린의 향기 탐구는 업무에 복귀하지 않는 예린을 찾으러 온 김중뢰의 등장과 함께 끝이 났다.
김중뢰는 정체불명의 향기가 나는 것을 인식하자마자 격리실 밖으로 뛰쳐나가더니 산소 호흡기를 가지고 돌아왔다.
자신이 하나를 쓰고 격리실로 들어와서는 예린에게도 강제로 씌우고 그대로 붙잡고 끌고 나가 버렸다.
그러고는 위험이 밝혀질 때까지 격리실 출입을 완전 금지 시켰다.
물론 그 출입 금지는 평소처럼 내가 유령화로 격리실을 나가서 연구소 안을 신나게 돌아다니면서 흐지부지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
내 목표는 편안하고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는 오브젝트 라이프인데, 요즘은 썩 편안하지 않은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서울 숲 마을 전소 사건의 여파는 생각보다 금방 끝나지 않았고, 오늘도 확성기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시위대가 나타나서 연구소 앞을 어수선하게 만들고 있었다.
연일 이어지는 시위와 여론의 압박은 연구소 분위기 자체를 축 처지게 만들었다.
하루 이틀이면 몰라도, 이런 분위기가 계속 되니 활기가 넘치는 세희 연구소라도 분위기가 이상해지기 마련이었다.
세희 연구소에서는 어떡해서든 나를 계속 보유하고 있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 별로 좋은 선택같지는 않았다.
차라리 시위대의 말처럼 중앙 연구소로 나를 넘기고 이 상황을 빨리 끝내는 편이 좋아 보였다.
어차피 유령화를 할 수 있는 나를 가둘 수 있는 물리적인 방법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중앙 연구소를 실컷 구경하다가 질리면 다시 돌아오면 끝날 간단한 일이었다.
이런 의사를 표하는 것은 간단했다. 내가 의사소통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예린에게 슬쩍 티를 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중앙 연구소로 가고 싶다는 거야? 왜?”
눈치가 빠른 예린 앞에서 중앙 연구소 사진을 손으로 가리키니 알아서 잘 해석해 주었다.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 건 좀 의외였지만 말이다.
“진짜? 진짜로 갈 거야?”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예린은 시든 양배추처럼 축 처져 버렸다.
시든 예린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꼭 안아주고 등 뒤를 토닥여 준 뒤에야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말을 못 하니 달래는 것도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그렇구나. 지금 연구소가 너무 소란스러워서 가겠단 거지? 그렇게 신경 쓸 필요 없는데 말이야. 세희 연구소도 꽤 대형 연구소라서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어!”
글쎄 절대로 못 버틸 거 같은데, 특히 연구소장인 세희가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럼 세희 언니한테 말하고 올게.”
그 소식을 들은 세희 연구소장은 중대 발표를 한다며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는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그럼 송별회 하자!”
소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안뜰은 순식간에 비워지고 간이 파티장이 완성되었다. 나는 그 간이 파티장에서 돌잡이하는 아기처럼 높은 자리에 앉혀진 채였다.
파티랍시고 내 머리 위에는 꼬깔모자를 씌워뒀는데, 그게 웃긴 지 예린은 휴대폰으로 계속 사진을 찍어댔다. 몇몇 사람은 내가 말을 이해하지 못할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작별 인사를 해주기도 했다.
이렇게 조금은 떠들썩하게 세희 연구소에서의 마지막 날이 지나갔다.
***
푸른빛이 살짝 감도는 새벽. 언제나 시위대로 시끄러운 세희 연구소 앞이지만 지금은 조용하기만 했다.
나를 중심으로 연구소 쪽에는 세희 연구소 측 직원들이, 그 반대편에는 강철로 보강된 보호복으로 온몸을 감싼 중앙 연구소 측 인원이 나열해 있었다.
가벼운 복장의 세희 연구소와는 달리 투명한 진압용 방패까지 들고 있는 중앙 연구소 측의 복장은 좀 과도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의 긴장된 분위기에서 매우 익숙한 분위기를 느꼈다.
생각해 보면 서울 연구소에서는 모두 저런 느낌이었다. 죽음이 근처에 있는 듯한 그 긴장감. 물론 서울 연구소와는 뭔가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사스마타를 닮은 도구로 나를 붙잡더니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목과 팔다리를 꽉 무는 방식의 도구였는데, 이거 야생 동물 포획용 도구 아니야?
유령화를 쓰면 순식간에 빠져나올 수 있겠지만, 중앙 연구소 내부도 한번 구경해 보고 싶었으니 꾹 참고 이들의 인도를 따라보기로 마음먹었다.
굵직한 철창으로 이뤄진 케이지 안에 나를 집어넣더니, 차를 운전해서 세희 연구소 부지를 떠나기 시작했다.
철창 주위를 빙 둘러앉아서 나를 바라보는 직원들. 투명한 고글 너머로 보이는 그 표정을 보니 비로소 차이점을 알 수 있었다.
서울 연구소의 직원들이 공포에 젖고 지쳐 있었다면, 저들은 공포를 가지고 있지만 그걸 증오로 덮어씌운 형상이었다.
인간이었던 시절, 나를 폭탄테러로 죽인 그 테러리스트들과 닮은 꼴이었다.
그 딱딱한 표정들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중앙 연구소 투어가 상당히 재미없는 여행이 될 것 같았다.
뭐, 재미가 없으면 빨리 돌아와야지.
***
중앙 연구소의 한 사무실.
“엉망진창이군. 이딴게 보고서라고? 아무것도 없잖아! 구구절절 쓸데없는 소리만 가득하군!”
“그래도 서면으로 제출된 정식 보고서니까 쓸 만한 게 있지 않을까요?”
보고를 받는 국립 중앙 특수 연구소 부소장은 분노를 터트리고 있었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세희 연구소 측에서 보내온 ‘회색 사신’에 대한 보고서였다. 부하직원으로 보이는 남자는 부소장의 분노가 자기에게 향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분류도 대충. 실험은 한 게 없군. 이렇게 대충 관리하고서는 국가에서 중요 실험체 관리 비용을 받아갔단 말인가?”
세희 연구소의 보고서는 매우 길고 장황했지만, 중앙 연구소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보에 대한 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제거가 가능한지 실험 여부 없음. 격리 가능 실험도 하는 시늉만 해 뒀고 추방 가능성은 시도도 안 해봤군! 관리 주의사항은 웃기지도 않는 사항만 잔뜩 써두고!”
세희 연구소에서 보내온 주의사항에는 회색 사신이 좋아하는 음식이나 가구, TV프로그램등이 써있을 뿐이었다.
부소장은 혈압이 치솟는 것을 참아가며 보고서를 모두 읽었다. 그리고 결론 내렸다.
“쓸모 있는 정보는 딱 하나군. 유령화가 가능하다.”
“네? 유령화가 가능하다고요? 유령처럼 격리가 힘든 실험체는 사립 연구소에서 다루는 것이 금지되어 있지 않나요?”
“아니, 금지는 아니지. 유령을 가둘 수 있는 격리실이 중앙 연구소에만 있으니 대부분 중앙 연구소로 보내질 뿐이고.”
부소장은 품속에서 명함만한 작은 카드를 꺼내더니, 거기에 사인을 휘갈기고는 지시했다.
“회색 사신이 도착하는 즉시, 우리 특수 연구소쪽으로 돌리라고 해. 오브젝트를 확실하게 가두려면 오브젝트 속에 가두는 게 제일이지.”
사인된 카드를 받아서 나가는 부하직원을 바라보던 부소장은 자기 책상 위에 놓은 액자로 시선을 돌렸다.
그 액자에는 어떤 오래된 신문 기사가 실려 있었다.
[서울 광장에 갑자기 나타난 오브젝트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낸 뒤에 사살, 사설 연구소의 관리 시스템 이대로 괜찮은가?]
그 기사를 바라보는 부소장의 눈은 증오심으로 번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