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
하르네가 해주는 수업은 재미가 없다.
그녀가 가르치는 걸 못한다는 소리는 아니다. 단지 내게 기반지식이 없다 보니 하르네가 해주는 말을 알아듣지 못 할 뿐이다.
수포자가 수학 수업을 들으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걔네들이 왜 수업 시간마다 잤던 건지 이제는 이해가 간다.
뭔 말을 하는 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는데 자는 것 말고 뭘 할 수 있겠냐!
어떻게든 버티고 버텨서 하르네의 수업을 들은 나였지만 그 동안 내가 배운 거라곤 하나 뿐이었다.
역시 필기는 답이 없어.
내게 남은 건 던전 탐색 뿐이야.
*
수업을 빙자한 멍때리기 시간을 보낸 나는 일과처럼 훈련장 쪽에 왔다.
원래라면 몸을 풀고 달리기부터 해야겠지만 그 전에 우선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어젯밤에 내가 들었던 그 폭음의 정체를 알아내는 거지!
그를 위해 훈련장 안 쪽으로 걷다 보니 자연스레 다른 병사와 기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말없이 정중한 인사만을 건네고 도망치듯 사라졌을 이들이지만 오늘은 달랐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아가씨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그들은 갑자기 큰소리로 감사한단 말을 하기 시작했다.
뭔데? 대체 왜 그러는 건데? 내가 뭘 했다고 그러는 거야?
어제 내가 한 일이라고 해봐야 허접 기사한테 한 방 먹여준 거밖에 없잖아.
그게 감사 받을 일인거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호의에 당혹감을 느끼고 있을 무렵 한 기사가 내 앞으로 걸어왔다.
얼굴에 난 여러 개의 잔 상처와 모발에게 미움을 받는 듯 말끔한 머리.
날선 눈매와 어지간한 성인 남성보다도 커다란 덩치.
험상궃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기사.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나의 앞을 가로 막았다.
‘뭐. 뭔데요!’
“뭐. 뭔데. 대머리 기사!”
대머리 기사는 또 뭐야! 메스가키 스킬. 분위기 파악 안 해? 이 사람을 도발하면 어쩌자는 거야?!
물론 가문의 사람이니까 나를 건드리진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나라는 게 있잖아!
“루시 아가씨.”
‘넵!’
“뭐!”
“칼을 살려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험상궃은 기사는 절도 있는 움직임으로 땅바닥에 무릎을 대더니 그대로 머리를 땅에 박았다.
“저는 다신 칼을 볼 수 없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아가씨 덕택에!”
“맞습니다! 다 아가씨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신 덕분입니다!”
그 기사가 말을 끝내기 무섭게 병사 하나가 그 옆으로 달려와서는 같이 머리를 박았다.
아니. 왜 이러는 건데.
도저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허둥대는 동안에 내 앞에 무릎을 꿇은 이들의 수가 점점 더 늘어나기 시작했다.
칼? 칼이면 그 허접기사 말하는 거 맞지?
자비면 내가 베네딕한테 크게 혼내지 말아달라고 말한 그거 말이야?
그게 그렇게 감사 받을 일인 거냐?
아니 뭐 어쨌든 고마운 건 알겠는데 있잖아.
좀 진정 좀 해봐! 쓰레기들아!
내가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잖아!
당혹감에 어찌할 줄을 몰라하는 도중 저 멀리서 칼의 주먹에서 날 지켜줬던 남자가 걸어 왔다.
기사단장인 포셀이었던가.
“이 놈들아! 아가씨가 당황하시잖냐! 비켜!”
포셀이 고함을 치자 훈련장 전체가 진동했다.
우와. 뭐 저렇게 목소리가 큰 거야? 저 정도면 음공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데?
목소리에 위압당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내 주변을 둘러싸던 이들도 포셀이 시키는 대로 뒤로 물러났다.
역시 기사단장님이야! 고마워요!
메스가키어 번역 때문에 고맙다는 말은 못해도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알아주세요!
“루시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기는 한데 다들 왜 이러는 건가요?’
“괜찮아 보여? 이 멍청이들이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설명을 바라고 한 말이었지만 포셀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처음 그 기사가 했던 것처럼 무릎을 꿇었다.
이 아저씨 키가 얼마나 큰 거야. 무릎을 꿇었는데 어떻게 시선이 나보다 높을 수가 있지.
“아가씨! 저 포셀도 아가씨께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아가씨의 드높으신 자비로움 덕분에 한 기사의 미래가 지켜졌습니다!”
하. 젠장. 그래.
이 사람이 여러 기사들의 우두머리였지.
그럼 당연히 다른 놈들이랑 똑같은 인간이겠지.
‘기사단장님.’
“포셀. 이 허접아.”
“예?”
‘당장 여기 있는 사람 해산 시켜요. 했던 말을 물리기 전에.’
“이 소란을 당장 해결해. 너네들 때문에 칼이 날아가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
시간이 지나 어느 정도 상황이 수습되고 나서야 나는 포셀에게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포셀이 말을 하길 기사로써 자신이 모시는 사람에게 손찌검을 한다는 건 최악의 행위라는 모양이다.
책임을 물어 가문에서 쫓겨나는 것은 물론이요. 불명예가 이름 아래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기에 다시는 기사로써 활동할 수 없게 된다는 것 같다.
그럼 기사 안하면 되는 거 아냐? 라고 생각을 했지만 그건 나 같은 일반인의 생각. 기사들은 그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란다.
내가 베네딕한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면 그 꼴이 났을 거라는 걸 알게 되니 헛웃음이 샜다.
아니. 그보다 더 했겠지. 나를 찾아왔을 때 베네딕의 눈을 엄청나게 살벌했으니까.
“칼이 평소에 정말 괜찮은 놈입니다. 어제는 뭣 때문인지 몰라도 실수를 저질렀습니다만 앞으로 제가 잘 교육을 시키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마음을 바꾸지 말아 주십시오.”
‘저 그 사람한테 악감정 없는데요.’
“내가 왜 허접 기사를 신경 쓸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난 좆밥한텐 관심 없어.”
걔가 저지른 일이 큰일이라는 건 이해했다.
근데 그거 다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잖아.
기사단장을 비롯해 기사와 병사들이 모두 모여서 이렇게 변호하는 걸 보면 칼은 정말 좋은 기사인 거겠지.
그렇담 걔가 이성을 잃어버린 이유는 단 하나. 내가 가진 [메스가키]스킬 때문이라는 거잖아.
걔한테는 정말로 과실이 없단 소리고 그럼 더더욱 처벌을 바랄 이유가 없지.
그나저나 메스가키 스킬의 도발 효과가 얼마나 좋은 거야? 고결한 기사가 분노에 미쳐 날뛰게 만들 정도라니.
난 애초에 칼이 감정조절을 잘 못하는 인간이라 그렇게 된 거라고 생각했다.
보통 레벨 차이가 크게 나면 스킬의 영향을 주기 어려우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메스가키 스킬. 생각한 것보다 훨씬 사기 스킬인 걸지도 모르겠네.
“정말이십니까?!”
혼자 생각을 하고 있는데 포셀이 갑자기 내 앞에 얼굴을 들이 밀었다.
흐억. 깜짝 놀랐네.
커다란 다라이가 갑자기 얼굴을 훅하고 들이미니까 진짜 당혹스럽다.
알른 가문에는 왜 이렇게 무섭게 생긴 사람들이 많은 거야?
가주인 베네딕부터가 트롤처럼 생겨서 가문의 정통이 된 건가?
확실히 칼 걔가 기행종이긴 하다. 걔는 그래도 생긴 건 멀쩡하잖아.
‘네. 별 생각 없으니까 얼굴 좀 비켜 주시겠어요?’
“아무 생각도 없으니까 징그러운 얼굴 좀 치워 줄래?”
“죄송합니다!”
포셀은 대놓고 징그럽단 소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실 웃을 뿐이었다.
자기 아래의 부하가 완전히 용서받았다는 사실이 그렇게 기쁜 걸까.
생긴 건 험악하지만 그래도 마음은 좋은 아저씨구나.
‘아. 기사단장님. 어제…’
“바보 포셀. 어제 일어난 폭발에 대해 아는 거 있어?”
“그거 말입니까? 그건. 아.”
들뜬 기분에 가볍게 입을 놀리던 포셀은 뒤늦게 나마 정신을 차리고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알고 있구나? 그치?
“아가씨. 죄송합니다. 이건 못 들은 걸로.”
“칼.”
“…”
“처벌.”
“…”
“말 안 할 거야?”
“…저어. 이걸 제가 말했다는 건 비밀로 해주시겠습니까?”
‘네. 그럴게요.’
“알겠어. 그러니까 말해봐.”
“그건 어젯밤 백작님께서 주먹을 휘두른 소리였습니다.”
뭐?
‘사람 주먹에서 그런 소리가 났다고요?’
“너 나 놀려? 사람 주먹에서 그런 소리가 난단 게 말이 돼?”
“말이 됩니다. 백작님에 한해서는요.”
농담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소울 아카데미가 판타지 세계관이라지만 사람이 주먹질을 하는 데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난다니.
어안이 벙벙했지만 잘 생각해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긴 했다.
소울 아카데미의 주인공도 후반부에 가면 온갖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고 다니니까.
주먹에서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나는 것 정도야 뭐.
특이한 일이 맞지.
베네딕은 도대체 얼마나 강한 거냐?!
그 정도 수준이면 소울 아카데미 세계관 내에서도 널리 이름을 떨친 강자 수준인데?!
철혈백이라는 멋들어진 별명이 괜히 생긴 게 아니었구나!
내가 왜 이런 캐릭터를 몰랐지?
난 소울 아카데미에 존재하는 모든 주요 NPC를 외우고 다니는데.
베네딕이 루시가 생기면서 같이 생겨난 캐릭터라서 그런 걸까.
그런데 있잖아. 그런 괴물의 딸인 루시는 왜 내가 빙의하기 전까지 그렇게 허약했던 거야?
보통 신체능력 같은 건 다 유전되잖아.
운동선수의 자식이 운동선수가 되고, 격투기의 선수의 자식이 격투기 선수가 되는 것처럼 말야.
베네딕의 지닌 능력의 십분의 일만 가지고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럼 시작부터 먼치킨으로 스타트라고! 죽으니 마니 하는 고민을 할 필요 없었을 거 아냐!
생각해보니까 엄청 억울하네.
속으로 잔뜩 투정을 부리고 있던 중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주먹질로 대지를 뒤흔드는 인간한테 맞은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기사단장님. 칼은 괜찮나요?’
“포셀. 허접 기사는 살아있어?”
“예. 잘 살아 있습니다. 좀 만신창이가 되긴 했지만요.”
포셀은 그리 말을 하고는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될 거라 말을 하며 나를 기사단에 있는 감옥으로 데려갔다.
감옥이라고 하지만 거긴 내가 상상했던 것만큼 삼엄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조용하고 차분했다.
기사단 내에서 문제를 일으킨 사람을 벌하기 위한 장소라서 그런 걸까.
“이게 백작님께서 휘두른 주먹의 여파입니다.”
감옥의 방 중 하나에 구멍이 나 있었다.
작은 구멍이 아니었다.
벽 전체가 날아가 버려서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장소처럼 보일 정도였다.
주먹의 여파는 그 뿐이 아니었다. 휑하니 뚫린 벽의 너머로 길게 파괴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건 꼭 영화에 나오는 괴수가 레이저를 쏘아내 만들어낸 참상처럼 보였다.
음. 베네딕이 딸바보라는 사실에 감사하면서 살아야겠다. 만약 베네딕이 자식한테도 가차 없는 인간이었다면 난 오래 전에 죽었을 거야.
아니 그런데 있잖아. 이런 주먹에 맞은 사람이 멀쩡할 수가 있나?
‘칼은 어디에 있어요?’
“허접 기사는 어디에 있어?”
“바로 옆입니다. 안내해 드릴까요?”
‘네.’
“어.”
칼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멀쩡했다. 얼굴에 커다란 멍이 하나 들어있지만 그 뿐이었다.
저런 주먹에 맞았다는 걸 생각해보면 아무런 상처가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얘도 진짜 괴물이구나. 그 정도로 여파가 심하게 남은 주먹에 얻어맞고도 멀쩡하다니.
그럼 얘가 진심으로 휘두른 주먹에 얻어맞았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자칫 잘못했으면 진짜로 죽었겠는데?
“아가씨! 죄송합니다! 제가 커다란 죄를 저질렀습니다! 기사된 자로써 자신의 주인 된 자를 해하려 하다니! 죽어 마땅한 죄입니다!”
여태까지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내가 정말로 위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괘씸하단 생각이 들었다.
베네딕한테 말을 하면 또 이상한 짓을 할 거 같으니까 그건 안 되겠고.
흐음. 어떻게 하면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