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1
“보시다시피 마력이란 것은…”
수업이 진행되는 도중에 고개를 아래로 내린 나는 왼쪽 손에 걸려 있는 까마귀의 인장을 보고서 미소를 지었다.
진짜 든든하네.
뒷세계 쪽에서 정보건 아이템이건 뭐건 원래 내야하는 값보다 훨씬 더 싸게 구할 수 있는 자유이용권이 생긴 셈이니까.
비록 원래 얻으려 했던 버로우 가문의 목걸이는 쓰레기가 되어버렸지만 이걸 구한 것만으로도 만족이야.
마지막에 커즈 뉴먼이 슬쩍 꺼낸 말 때문에 좀 마음이 무거워지긴 했지만.
‘우리 아들은 어떤가. 꽤 괜찮게 생기지 않았나?’
처음에는 나는 그가 한 말의 뜻을 몰랐다.
그냥 베네딕처럼 자기 아들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팔불출이라 생각했지.
그래서 맞춰줬다.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고 간에 체스터 뉴먼이 예쁘게 생긴 건 사실이니까 말이야.
<여아야. 방금 저 자가 한 말의 뜻을 아느냐?>
‘그냥 자식자랑 하고 싶은 거 아니에요?’
<하이고. 그럴 줄 알았다.>
내가 커즈 뉴먼이 한 말의 뜻을 알게 된 것은 그 뒤에 할배가 설명을 해준 후였다.
귀족 가문의 사람이 하는 말에는 항상 이면의 뜻이 있는 것이라며.
방금 했던 저 말은 자신의 아들에게 호감이 있는가를 물어보는 것이었다고.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난 판타지 세상의 사람이 아니라 현대의 사람이라고!
사정을 깨달은 나는 정정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틈을 잡아챌 수가 없었다.
커즈 뉴먼이 자신의 화술로 구렁이마냥 나를 잡아먹어 버렸으니까.
이 빌어먹을 아저씨.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있었구나.
당신이 왜 순순히 까마귀의 인장을 내어주나 했는데 나를 혈연으로 엮을 생각이었던 거야?!
아니 너 네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 아니었어?!
그런 사람이 왜 자기 아들을 메스가키한테 팔아먹을 생각을 하는 거야?
너 니 아들이 약골♡ 허접♡ 하는 소리를 듣는 꼴을 보고 싶냐?
좆밥 탈모 당주♡같은 소리를 하는 며느리를 진심으로 두고 싶은 거야?!
대체 나한테서 무슨 가치를 봤길래 이딴 짓을 저지르는 건데!
으으. 커즈 뉴먼 이 음흉한 변태 같으니라고.
사람이 마음을 그렇게 안 좋게 쓰니까 이마가 점점 넓어지는 거 아냐.
당신의 모발조차도 당신의 악독한 마음에 질려서 도망치는 거라고.
알겠어?!
더 짜증이 나는 것은 커즈 뉴먼이 그 이후로 자그마한 흑심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반박을 할 틈을 주면 무어라고 따져보겠는데 냉철한 사업가처럼 일 이야기만을 해버리니 어찌할 수가 없었다.
‘까마귀의 인장을 드리긴 하겠습니다만 당장은 알새틴을 통해 의뢰를 해주십시오. 인프라가 부족한지라. 얼마 안 가 그 곳에 저희 가문의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을 꾹 삼키고 저택을 떠나게 된 나는 말싸움에서 패배한 어린 아이가 되어 그 때 어떻게 말했어야 했는데 같은 생각을 되새길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네.
거래 상대고 뭐고 간에 그냥 메스가키 스킬을 이용해서 도발을 걸었어야 했는데.
“알른 영애님?”
속으로 울분을 다스리고 있던 중에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 고갤 들었다.
마력학 교수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 사람은 왜 이렇게 포기할 줄을 모르는 거야?
나한테 당신이 그 어떤 시련과 역경을 주더라도 나한테는 할배가 있다고.
당신이 질문을 할 때마다 번번히 최선의 대답을 내놓았는데 아직도 날 의심하다니.
그냥 내가 싫은 거지? 그치?
“방금 전에 제가 했던 설명을 요약해 주시겠어요?”
‘할아버지.’
<거부하마.>
‘엑?’
할배? 갑자기 왜 이러는 겁니까.
평소에 저와 당신은 환상의 콤비였잖아요.
척하면 척하고 나오는 그런 관계였잖습니까.
오늘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기셨기에 투정을 부리시는 겁니까.
‘왜 그러시는데요?!’
<아무리 생각을 해도 본인이 그대의 투정을 너무 많이 받아준 것 같다. 그대의 교양을 위해서는 가끔 절벽에서 밀 줄도 알아야 했는데.>
제가 뭐 잘못했습니까?!
오늘 아침에 할배가 한 잔소리를 흘려들어서 그래요?
그거 만날 그랬잖아요.
아니면 할배를 아침에 닦아주지 않아서 그러는 거에요?
무기가 좀 더러울 수도 있는 거잖습니까.
궁지에 몰린 나는 앞으로 잘 할 테니 좀 도와달라는 이야기를 했지만 할배는 묵묵무답이었다.
“알른 영애?”
할배! 루시 알른은 결코 이 일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만은 기억하십시오!
어떡하지?
이 위기를 넘길 방법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나는 어제 허접 주신이 선물해 준 기능을 떠올렸다.
로그!
그래. 그 기능을 쓰면 분명 마력학 교수가 뭐라고 말했는지 알 수 있겠지.
다급히 로그 창을 연 나는 다급히 스크롤을 올려서 마력학 교수의 발언을 찾아냈다.
“도대체 뭘 하시는 건가요?”
발견했다.
그러니까 이게…
‘마력이란 것은…’
“할망구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마력이란 것은…”
*
순간의 기지를 활용해 마력학 교수가 파 놓은 함정에서 빠져나온 나는 소울 아카데미의 화장실을 찾았다.
왜냐고? 할배한테 복수를 해야 할 거 아냐.
조언을 해주고 싶으면 평소에 할 것이지 왜 시련이 앞에 도착하자마자 등을 떠밀어 버리는 거야.
날개를 펼칠 줄도 모르는 새를 낭떠러지로 밀어버리면 새가 나냐고.
바닥에 떨어져서 대가리가 깨져버리지.
머리를 박기 전에 날개를 펴서 망정이지 그러지 못했다면 난 창피를 당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복수다.
남의 대가리를 깨려고 했던 자 자신의 대가리로 보답을 해야 할 지어니.
<여아야! 이게 다 그대를 위한 것임을 알지 않으냐!>
‘저도 할아버지를 위해서 하는 거에요. 한 번 샤워도 하셔야죠.’
<샤워를 하는 물이 변기 안에 든 물인 건 이상하지 않으냐?!>
뭐 어때요. 안에 아무것도 없는데.
어쩌면 바닷물보다 깨끗할 수도 있다구요.
알겠죠?
그냥 물이니까 숨 참고 다이브 하세요.
아. 할배는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숨을 참을 필요도 없겠네.
잘 됐다. 변기 안에 몸을 푹 담근 할배의 비명소리를 배경 삼아 방금 전의 일을 떠올렸다.
내가 게임을 할 적에 로그 기능은 솔직히 말해서 별 의미 없는 기능이었다.
캐릭터의 대사라든가 습득한 아이템을 알려준다거나 경험치가 얼마 증가했는지 알려준다거나 하는 기능이었으니까.
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모를까 소울 아카데미의 고인물이었던 내 입장에선 건드릴 이유가 없는 버튼이었다.
이게 게임이었을 무렵에는 모든 변수를 내 손 위에서 굴릴 수 있었는데 뭐하러 로그를 뒤지겠어.
캐릭터의 대사?
그거 수십 수백 수천번도 넘게 들었을 걸 다시 듣는 것 밖에 안 된다고.
이 사람이 이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도 외우고 있는 상황에서 그 이야기를 듣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
그렇지만 이 세상은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다.
내가 모든 변수를 통제할 수 없는 세상이란 말이다.
이 곳에서 로그 기능은 생각보다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방금 전에 할망구 교수가 내민 물음에 간단히 답을 한 것을 보아라.
이건 분명 내게 유용한 기능이었다.
안타깝게도 스크롤에 한계가 있어서 여태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을 기록해주진 못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지.
<흐어어어어억.>
한참 동안 물 속에 박혀 화장실의 향취를 느끼던 할배의 입에선 진짜 고문을 당한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사람 연기력 장난 아니네.
이런 식으로 나를 나쁜 사람으로 몰면 망설일 줄 알았나 보지?
‘할아버지. 말해봐요. 또 이런 식으로 나오실 거에요?’
<이런다고 내가 포기할 줄 아느냐! 나는 네가 스스로 해결할 능력을 얻을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아. 그러세요?’
할배. 당신은 모르겠지만 지금 나한테는 훌륭한 능력이 생겼다고요.
아카데미 시험에서 당신이 도와주지 않는다 해도 방법은 넘친다 이 말입니다.
로그 스크롤 길이의 한계가 있어서 며칠 치를 기록하진 못하지만 하루 정도 기록하는 건 충분하거든요?
시험을 치기 전에 시험 범위에 있는 내용을 한 번 훑어보기만 하면 그 다음부터는 오픈북 시험이나 마찬가지!
할배의 도움이 없어도 이미 만점은 확정된 거나 다름없단 겁니다!
<허세를 부리는 것이냐?>
‘허세요? 허세라고 생각하고 싶으시면 그렇게 생각하세요.’
<허? 너 무엇을 얻은 것이냐?>
‘그래요! 전…’
벌컥. 할배와 대화를 나누던 도중에 갑작스레 화장실의 문이 열렸다.
친구와 하하호호 이야기를 나누며 문을 열었다가 나와 눈을 마주친 여학생은 그대로 굳었다가 2초 가량이 지나고 나서야 현실을 깨달았다.
“아. 저. 그. 죄송합니다!”
자기 친구의 손을 잡아 끌고서 여학생이 떠나간 후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을 무렵.
난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 여아야?>
‘닥쳐요. 할아버지.’
<…그래.>
이번에는 또 무슨 이상한 소문이 나려나.
*
“요즘 사람들이 알른 영애에 관해서 이상한 소문을 퍼트려요. 이번에는 알른 영애께서 화장실에서 메이스로 변기를 부수고 있었단 이야기가 나돌고 있다니까요.”
나에 대해 이상한 소문이 나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이번 것은 너무 도를 넘었다며 분개하는 조이를 보며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약간의 왜곡이 들어가긴 했지만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니까.
그 여학생들도 설마 내가 변기물에다 메이스를 고문하고 있었다곤 생각하지 못했겠지.
“다른 영애분들에게 그 이야기를 듣는데 얼마나 화가 나던지.”
‘…조이. 저 괜찮아요.’
“얼빵 영애. 나 걱정해 줄 틈이 있어? 푸훗. 누가보면 덜 얼빵해진 줄 알겠다.”
“제가 뭐 어때서요.”
기껏 걱정해줬는데 무어라 그런다며 투덜거리는 조이를 보고 속이 좁다고 놀렸더니 그녀가 입을 다물곤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처음과 비교했을 때 그녀와 많이 가까워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친구라도 해도 이상하지 않겠지?
내 최애캐와 친구가 될 수 있다니 너무 행복하다.
저런 모습을 볼 때마다 여태까지 했던 여러 고생들을 보상받는 느낌이야.
아아. 이러다가 조이가 나한테 연애상담이라도 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조이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이를 꽉 깨물어야 하는 걸까?
이런 고민을 하고 있자니 언젠가 나한테 애인이 생기면 어찌하냐 호들갑을 떨던 베네딕의 마음이 이해가 됐다.
물론 베네딕과 나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긴 하지.
나는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할 가능성이 제로에 가깝지만 조이는 다르잖아.
흐으.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둬야 하나.
“그으러니까. 아. 참. 알른 영애. 켄트 영애. 중간 고사 준비는 하고 계신가요?”
이대로 가면 계속 놀림을 당할거라 생각한 걸까.
조이가 다급하게 화제를 바꿨다.
그 의도가 뻔히 보였지만 나는 속아 넘어가 주기로 했다.
‘물론이죠.’
“누굴 걱정하는 거야? 입학시험에서도 나한테 진 얼빵 영애 주제에.”
“이번에는 다를 거에요.”
과연 그럴까?
조이. 네가 똑똑하단 건 인정하겠지만 합법적으로 컨닝을 하는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무적이고! 로그 기능은 신이야!
로그가 점수를 복사해준다고!
자신만만하게 어깨를 피고 있자니 옆에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난 하늘에 맡기기로 했어.”
프레이는 여느 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어이없는 이야기를 했다.
한 때 아카데미의 특별입학을 노린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얘는 진짜 특별입학이 있어서 다행이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