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안개 속에서 나는 그 노파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척추가 부자연스럽게 비틀어진 기괴한 모습.
눈은 텅 비고 깊은 우물처럼 끝없는 어둠이 자리하고 있었고, 피부는 오래된 시체처럼 바짝 말라붙어서 골격 위로 얇게 늘어져 있었다.
갑판 위는 섬뜩할 정도로 조용했고, 노파와 나는 시선을 마주한 채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안 자고 있어?]
노파의 목소리는 마른 나뭇잎이 돌에 긁히는 소리처럼 거칠게 속삭였다.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앞으로 한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노파는 화난 것처럼 말소리를 높이고 위협하기 시작했다.
[아이야, 오브젝트로 보이는 아이야. 저들이 너랑 무슨 상관이라고 나를 도발하느냐.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 이대로 물러나면 용서해 주겠다. 썩 꺼져라!]
꽤 강한 오브젝트 같아 보이는데, 나를 두려워하지 않다니 신기하네.
나는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표정으로 미소를 베어 물고는 한 발짝 더 다가갔다.
그와 동시에 노파의 입에서는 저주의 말을 읊기 시작했다.
[바보 같은 녀석. 너의 두 눈은 불에 지져질 것이고, 너의 살점은 끓는 기름에 튀겨질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고통 속에서 너는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되리라.]
괴물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악의로 가득 찼고, 그 악의로 말미암아 단어들은 실체를 가지고 검은 연기처럼 쏟아져 나왔다.
실체를 가진 저주가 내 몸을 한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강력한 열기가 전신을 태우려고 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저주도 물리적 공격으로 치는 건가?
한 걸음을 더 걸어 나갔다.
[두 눈이 뽑히고 영원히 앞을 보지 못하리라!]
한 발짝.
[뼈가 뒤틀리고 살이 녹아내려 영원히 고통받으리라!]
[개구리가 되어 영원히 제 모습을 찾지 못하리라!]
[머리털이 모두 뽑히고….]
내가 노파의 코앞까지 도착하자, 노파는 날카로운 이빨이 잔뜩 돋아난 입을 억지로 일그러트리며 미소를 지었다.
비굴해 보이는 미소였다.
[용서해 줘! 내가 전부 잘못했네!]
그리고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흉기처럼 보이는 양손을 어울리지 않게 비비면서 말을 이어갔다.
[협상. 협상하자. 너도 굳이 나를 죽일 필요는 없지 않니?]
인간에게 해로워 보이는 것만으로도 죽을 이유로는 충분한데?
굳이 살려둘 필요는 없지.
그런 내 기색을 읽었는지, 노파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
[보상. 보상을 줄게. 나를 살려주면 푸른 달의 힘을 빌려주도록 하지!]
하지만 나는 노파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노파는 갑자기 안개처럼 허공으로 흩어지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안개로 변해가는 노파의 표정은 통쾌해 보였다.
노파는 득의양양한 목소리로 마지막 저주를 내뱉었다.
[방심했구나! 이제부터 너와 네가 소중히 하는 모든 것들은 밤과 그림자를 영원히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안개는 바람처럼 빠른 속도로.
날아가지 못했다.
아무리 날아가도, 노파의 위치는 계속 그 자리였다.
음울한 안개로 가득한 호숫가는 어느새, 알록달록한 쿠션과 핫초코로 바뀌어 있었다.
아무리 빨리 도망가도, 내가 지배하는 공간에서는 한 걸음도 도망칠 수 없지.
그리고 핫초코와 쿠션 사이사이로 사나운 표정을 한 황금 사신들이 머리를 내밀었다.
‘눈’으로 확인한 노파의 파괴 조건은 <재로 만들어서 땅에 묻기.>였다.
[‘눈’? ‘눈’이라고? 아… 안돼!]
내가 공격 허가를 내리자, 해로운 오브젝트에게 끝없이 잔혹한 황금 사신들이 달려들어서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자매들이 절대 용서치 않을 것이다!]
죽음을 앞둔 노파는 원독에 찬 저주의 말을 남기고 찢겼다.
***
협회 요원의 예상치 못한 방문으로 시작된 제임스의 긴박한 여정은 군용기의 내부로 들어설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군용기까지 동원하다니.
제임스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큰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보였다.
오브젝트 협회 요원들의 분위기를 봐도 심상치 않았다.
말을 걸어도 묵묵부답.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잔뜩 긴장한 협회 요원들은 말 한마디 없이, 그저 묵묵하게 제임스를 에스코트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제임스가 올라탄 군용기는 평소에 타던 여객기와는 확연히 달랐다.
군용기 엔진의 윙윙거리는 소리, 장식되지 않은 금속 벽, 드문드문 놓인 좌석.
호화로움과 편의성에만 집중한 제임스의 전용기와는 그 설계의 목적부터가 달랐다.
딱딱하고 불편한 좌석에 앉자, 편안한 좌석과 기내식 그리고 풍부한 즐길 거리가 가득한 전용기가 그리워졌다.
굳이 군용기를 타야 할 이유가 있는 건가?
아무리 물어봐도 안내하는 요원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입을 열지 않고, 잔뜩 긴장한 요원들.
경직되고 통제된 분위기는 미국에 도착해서야 풀릴 것 같았지만, 생각 외로 금방 해소되었다.
한국 상공을 벗어나게 된 것을 요원들이 확인한 순간, 얼음처럼 얼어붙은 분위기가 풀어지기 시작했다.
제임스는 이런 분위기의 변화를 캐치하고, 앞자리에 딱딱한 자세로 앉아 있는 남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대충 무슨 일인지 예상은 되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길래 이렇게 급박하게 사람들을 탈출시키는 거지?”
“오브젝트 협회에서는 지금 한국은 오브젝트 대응 능력을 상실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드디어 답을 하는군!
“그렇다고 이렇게 급하게 이동할 필요가 있는 건가? 한국 정부가 이상한 대응을 하는 게 처음도 아니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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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사항을 전달받은 것은 아닙니다만, 확인된 사례 중 오브젝트가 사람을 죽여도 평범한 일로 치부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요원의 설명은 정말 위험해 보였다.
실종 신고를 해도 오브젝트 관련이면 당연한 일로 보고 수사를 하지 않는다던지.
이미 양천구 호수에서 실종자 수가 엄청난데,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던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사례들이 요원의 입에서 잔뜩 나왔다.
“그… 그래, 그 정도면 이렇게 긴박하게 탈출을 종용한 게 이해가 되는군.”
막말로 곰돌이 인형이 머리통을 부수고 다녀도 평범한 일상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는 것 아닌가?
죽음의 문턱에서 탈출한 듯한 감각에 제임스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번에야말로 한국이 망하는 건가?”
제임스의 허탈한 혼잣말이 시끄러운 군용기의 소음 속으로 조용히 파고들었다.
***
양천구 호수 기슭의 아름다운 동굴에 금발 소녀와 검은 요원이 들어서고 있었다.
“이쪽이에요. 아저씨.”
소녀는 심장의 인도를 따라서 계속 나아가고 있었다.
태양 아래서 자유롭게 걷기 위해서.
심장의 인도는 단 하나의 목표를 제시했다.
인도의 끝에 있는 오브젝트를 파괴해라.
“아가씨. 포기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싫어요.”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사태의 원흉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굉장히 강력한 오브젝트일 텐데, 포기하고 다음 기회를 노리는 편이 좋아 보입니다.”
“….”
소녀는 검은 요원의 말을 무시하고 성큼성큼 동굴 깊숙한 곳을 향해서 걸어 나갔다.
검은 요원의 우려는 타당했다.
한국 전역에 영향을 미치는 오브젝트를 파괴하라니?
불 좀 뿜을 수 있는 소녀가 감당할 수 있는 적일 리가 없었다.
마침내 금발 소녀는 심장의 인도 끝에 도달했다.
동굴 안에 위치한 깊은 물웅덩이.
달이 올려다보이는 곳에서 대단히 아름다운 여인들이 금발 소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사막의 주민이 온다고 하길래 기대했는데, 꼬맹이잖아?]
여인들의 정중앙에 선 여인이 말했다.
금발 소녀는 긴장으로 온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절대로 이길 수 없다.
여인과 자신과의 사이에는 그런 절대적인 격차가 느껴졌다.
[흐음.]
검은 요원과 금발 소녀를 번갈아서 쳐다보던 여인은 뭔가를 알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마치 장난감을 보는 표정으로 소녀와 남자를 돌아보던 여인은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물웅덩이에서 솟구친 물줄기가 소녀와 남자를 강하게 후려쳤다.
검은 요원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고, 소녀도 바닥에 엎어질 정도로 강력한 힘이었다.
“흐윽.”
배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고통에 금발 소녀는 배를 움켜쥐고 숨을 삼켰다.
[싸우러 온 거잖니? 어서 일어서!]
소녀는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지만,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졌다.
[그래서야 싸울 수나 있겠어?]
“싸울 거야!”
소녀는 온 힘을 다해서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두 다리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후들거렸다.
아름다운 여인은 어느새 소녀의 귓가까지 다가오더니 속삭였다.
[네가 원하는 게, 붉은 달이니? 아니면 태양 아래를 걷는 것이니?]
“!”
소녀는 깜짝 놀라서 여인을 돌아보자, 여인은 재밌는 것을 보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놀랐니? 너 같은 아이는 종종 있었으니까. 뻔히 보여.]
여인은 속삭이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랑 계약을 하면 너를 원래대로, 인간으로 되돌려줄게.]
마치 악마의 속삭임처럼 달콤한 이야기였다.
[어때 관심 있어?]
***
양천구 호수 기슭.
황금 사신들이 열심히 땅을 파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감독하는 내 손에는 푸딩 용기가 하나.
이 안에는 푸딩이 아니라 잿가루가 담겨 있었다.
갑자기 나타났던 노파의 시체를 모아서 태우고 남은 잿가루였다.
그렇게 생긴 구덩이에 잿가루를 조심스럽게 묻었다.
잿가루가 땅에 완전히 묻히는 순간, 새로운 능력이 생겨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손바닥에서 뿅 하고 푸른색 사신이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