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3
당연하게도 던전의 공략은 순조로웠다.
“어디 아가씨께 다가서려 하는가!”
마물이 등장할 때마다 칼은 내게 한 걸음도 다가가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듯 그들을 도살했고.
“함정 해제했습니다. 지나가셔도 됩니다.”
도적직 NPC 중 상위에 속하는 알새틴은 던전에 존재하는 모든 함정을 간단히 해제했으며.
‘이제부터는…’
“허접들. 이제부턴.”
나는 파티장 겸 유사 힐러로써 그들을 보조했다.
나 자신을 제외 한다면 어느 쪽이라도 게임 초반의 던전에 과도할 정도의 스펙을 지닌 이들이다.
당장 이 던전에 칼 하나만 떨어져도 재앙이나 마찬가지일 터인데 거기에 알새틴이 더해졌으니 전력은 이미 충분하다 못해 과할 지경이고.
거기에 내가 지닌 고인물로써의 지식이 첨가 되었으니 이 배는 돛을 활짝 핀 채 순풍을 타고서 나아가는 쾌속의 배라 불릴 만했다.
원래는 하루에 던전 하나만 공략하고 쉴 생각이었는데 이 속도면 하루에 두 세 개를 공략해도 문제없겠다.
칼이 유능한 거야 원래부터 알았지만 알새틴도 상상 이상이네.
빚을 가지고서 이런 사람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니.
뉴먼 가문이 개입해주는 바람에 얼마나 많은 이득을 보는 건지 모르겠네.
나중에 커즈 그 아저씨한테 좋은 가발 만드는 데라도 알려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내 앞에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던전의 안에서 아무 연유없이 허접 주신이 메시지를 보내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이번 것은 쪼잔 악신의 것이었다.
[아그라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안녕하세요. 쪼잔하고 음흉하고 자기가 조금 방해받았다고 이 악물고 그 사람을 죽이려 드는 싸패 악신님.
오실 줄 알았습니다.
지난번에 쪼잔 악신님의 허접 쓰레기 같은 저주를 해주하고 나서 창을 띄울 때부터 예상하고 있었거든요.
제가 괜히 칼만 데려오지 않고 반쯤 협박하듯 알새틴도 데리고 온 줄 아십니까?
당신이 이런 쪼잔한 짓거리를 할 줄 알고 대비해 둔 겁니다.
자. 어디 한 번 개수작을 부려보시죠.
새 던전을 만드실 건가요?
지금 전력이면 어지간한 던전은 다 공략할 수 있어서 아무 문제없답니다.
또 공간이동을 시키실 건가요?
이 던전이라면 지금의 저 혼자서도 공략할 수 있는데요?
시간이 좀 오래 걸릴 뿐이지.
아니면 뭘 하실 건가요?
궁금하네요.
이번엔 어떤 식으로 억까를 하실지.
솔직히 말해서 지금은 억까라고 하기도 그렇네요.
굳이 단어를 바꾸자면 파밍지원 정도가 아닐까 싶은데.
기왕이면 공간이동 말고 다른 걸로 부탁드릴게요.
공간이동은 괜시리 시간만 늘어질 뿐 득 되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여아야. 저 멀리서 무언가가 다가오는 구나.>
‘그래요?’
<이 던전에 있는 것치고는 강대한 상대다.>
상위 네임드 몬스터 출현.
파밍하기 제일 좋은 걸로 해주셨네.
저게 제일 깔끔하고 좋지.
‘방향은?’
<10초 뒤. 전방에서.>
대화를 나누는 할배의 목소리는 지극히 평온하다.
할배가 경고를 하는 데 이렇게 여유로운 것도 처음이네.
이럴 때면 할배는 소리 지르듯이 이야기를 했었는데 말야.
그 때는 하나 같이 내 목숨이 달린 상황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긴 했지.
할배가 이야기해준 것은 거의 정확했다.
대략 9초에서 10초가 지날 무렵 우리의 앞에 한 마물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달빛을 품고 있는 은색의 갈기와 달을 품고 있는 금색의 사나운 눈동자.
월랑.
달의 아래에서 태어난 늑대.
이 곳이 아닌 다른 던전에서 희귀하게 등장하는 네임드 몬스터.
저 녀석은 분명 강하다.
마법 무효화 특성을 달고 있는데다가 속도가 빠르고 공격력도 높고 가죽 때문에 방어력도 높아서 까다롭다.
거기에 더해 저 놈은 몇 가지의 마법까지 사용할 줄 알지.
괜히 저 놈이 나오는 던전의 보스보다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는 게 아닌 것이다.
만약 내가 조이나 아서와 함께 있을 적에 저 녀석을 만났다면 죽음을 각오해야 했을 것이다. 그치만 지금은 아니지.
“월랑이군요. 까탈스러운 짐승이죠.”
칼은 그 모습을 보고서 느긋이 자신의 검을 치켜들었다.
“허접 기사님. 가죽 안 상하게 잘 처리해 주십시오. 저 녀석은 돈이 됩니다.”
“이봐. 정보팔이. 아가씨 이외의 그 누구도 내게 허접이라 할 수 없다.”
“그러십니까? 그것 참 죄송하네요.”
던전을 공략하는 사이에 어느 정도 친해진 두 사람이 서로 티격태격 하는 사이에 월랑이 이빨을 내밀고 칼에게 달려들었다.
닿기만 한다면 철이라도 씹어먹을 수 있을 그 이빨은 안타깝게도 그 어느 것도 집어 삼키지 못했다.
칼이 자신의 빈 주먹으로 얼굴을 후러쳐 날려버렸으니까.
“수입은 모두 아가씨께서 가져가는 거겠지?”
“판매 수수료는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긴장감 없는 그 대화를 뒤에서 구경하고 있자니 최소한의 지휘조차 할 필요가 없음을 느꼈다.
쪼잔 악신님. 감사합니다.
상위 던전의 네임드 마물을 보내 주셔서 경험치를 챙겨주시는 것은 물론이고 거기에 더해 제 지갑까지 풍족하게 만들어 주시다니!
생각해보면 조이나 아서와 어느 정도 친해질 수 있었던 것도 쪼잔 악신님의 덕분이네요.
당신께서 억까를 하시겠다며 위기에 빠트리는 바람에 연이 생긴 거니까.
저주라는 이름을 달고서 저한테 이렇게 많은 도움을 주실 줄이야.
츤데레이신건가요?
흐흥. 너 따위 엄청나게 싫으니까! 인 거군요?
제가 아는 어느 허접하고 무능한 주제에 변태 같은 취향만 쉴 새 없이 드러내는 신과는 많이 다르시네요.
아. 물론 누군가를 지칭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신이 있더라고요.
어쨌든 앞으로도 아낌없는 지원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야 하루 빨리 당신의 뚝배기를 깨러갈 거 아닙니까.
“아가씨. 처리 끝났습니다.”
“기사님. 아직 안 끝났습니다. 손질을 해야 할 거 아닙니까.”
뒤에서 팔짱을 끼고 있으려니 칼이 은랑을 가죽에 손상 하나 없이 쓰러트렸고, 알새틴의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그 가죽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몸에 기운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소울 아카데미의 던전에서 노가다를 뛸 땐 몇 시간 동안 개짓거리를 했어야 했는데 쪼잔 악신님이 도와주니까 한 방에 레벨업이 되네.
제가 메스가키 스킬 때문에 입 밖으로는 내지 못합니다만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는 건 알아주세요.
그런 의도가 아니라고요? 어쩌라고요.
꼬우시면 직접… 아닙니다.
괜한 말 하면 또 이상한 일이 생길 것 같으니까 여기까지 하자.
자아. 그럼 기세를 몰아서 오늘은 던전 세 개 정도만 공략하고 갈까?
*
오라버니가 선물해 준 이전 년도의 마력학 기출 문제를 풀어낸 조이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답지를 펼쳤다.
모르는 문제는 하나도 없었어.
거기에 더해 혹시나 실수를 할까봐 한 번 검증까지 끝마쳤고.
분명 만점일 거야.
한치의 의심도 없이 붉은 펜을 치켜 든 조이는 네 번째 문제에서 오답을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뭐지? 분명 확인했을 때는 아무 실수도 없었는데?!
당혹스러웠던 그녀는 몇 번이나 답지와 문제를 번갈아가며 보았지만 도저히 자신의 잘못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오라버니께서 주신 답지에 오류가 있는 걸까?
“얼빵 영애. 이 부분을 실수하지 않았나.”
뒤에서 들려오는 한심하다는 듯한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아서 솔라딘이 서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문제를 짚어주며 조이가 실수한 부분을 알려줬다.
조이의 실수는 무척이나 사소하고 어이없는 것이었다.
조이 자신조차 왜 알아차리지 못한 걸까 자연스레 한탄할 정도로.
“그대는 어째 날이 갈수록 더 얼빵해지는 것 같군.”
“모함이 심하십니다. 왕자님.”
“허나 나아지는 것치곤 지금도 이런 기초적인 부분에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나.”
답할 말이 마땅치 않았기에 조이는 입을 다물었다.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왔던 조이와 아서다.
아서는 여태까지 조이가 얼마나 자주 사소한 실수를 저질러왔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여기서 더 반박을 해봐야 조이의 흑역사만 파해쳐질 뿐이었다.
시무룩해진 조이가 땅바닥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아서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반대편에 앉았다.
“왜 혼자서 공부를 하고 있나. 다른 사람들은 어쩌고.”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원래라면 조이는 다른 영애들과 함께 공부를 했을 것이다.
예전에도 그랬고 오늘만 해도 그들에게 함께하자는 권유를 받았으니까.
그렇지만 조이는 그 권유를 거절했다.
얼마 전에 있었던 럼리 가문의 영애와의 일이 영 껄끄러웠던 것이다.
“그래?”
“왕자님께선 여기 어쩐 일이신가요?”
“공부를 하러 왔지. 얼마 후면 중간고사이지 않은가.”
공부를 하러 왔단 이야기에 조이는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원래 아서는 자신의 노력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이 완벽하게 비쳐야한다는 생각을 지닌 그는 겉으로는 항상 여유로운 체를 하면서도 뒤로는 잠을 줄여가며 노력을 거듭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 그가 도서관에 나와 공부를 하다니.
이전 같았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루시 알른을 이기기 위해서라도 할 수 있는 건 모두 다 해봐야지.”
“이번 중간고사에서 이겨보시려고요?”
“그래. 내 듣기로 루시 알른은 수업시간마다 책상과 한 몸이 된 채로 지내는 중이라 했다. 응당 학업적인 성취도 부족할 터. 이번이야말로 적기라 할 수 있지.”
이번에야말로 루시 알른을 내 밑에 두겠다며 웃음을 짓는 아서에게서는 진한 승부욕이 엿보일 뿐.
지난 번과 같은 증오나 분노가 뒤섞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본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최선을 다해 이번 시험을 준비했다. 루시 알른이 제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다 한들 그런 게으름으론 본인을 이길 수 없을 것이야.”
“그래서 이기고 나면 별칭으로 부르지 말라 하실 건가요?”
“물론 그 이야기도 하겠지만 목적은 따로 있다. 물어볼 것이 있거든.”
물어볼 것?
조이는 그 단어에 의문을 품었지만 의지에 찬 아서의 눈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방금 전에 아서가 조이의 사정을 묻지 않았던 것처럼. 이번에는 조이가 아서를 배려할 차례였던 것이다.
“아. 참. 조이. 자네에게도 물을 것이 있네. 그대는 최근에 루시 알른과 가깝게 지내고 있지 않나.”
“아마도요?”
가깝게 지낸다기보다는 루시의 아래에서 쉴 새 없이 굴려지는 것에 아깝지만 조이는 일단 고갤 끄덕였다.
“혹시 내가 모르는 곳에서 루시 알른이 공부를 하고 있나?”
아서의 물음에 조이는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그 분이 공부를 하시나?
아침에 일어나셔서 아카데미 수업이 시작될 때까지 수련을 하시고.
수업시간에는 대개 잠을 주무시고 계시는데다가.
수업이 끝나면 또 다시 수련을 거듭하다 잠에 드시잖아.
거기에 주말에도 하루 종일 던전 공략과 육체적인 수련만을 하고 계시고.
“모르겠습니다.”
“비밀이라는 건가?”
“아뇨. 진짜로 모르겠어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공부할 틈이 없으실 것 같은데?
근데 지난번엔 이번 시험에 자신이 있다고 하셨잖아.
뭘까? 혹시 알른 영애께서도 아서 왕자님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을 하는 분인 걸까?
설마 대책이 없는데 무작정 자신 있다 이야기하신 건 아니겠지?
에이. 그럴 리가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