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달빛이 내리쬐는 갑판 난간 위에 앉아서 잠들어 버린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잠들어 버린 세희 연구소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오브젝트의 수작으로 잠들어 버린 것이라서 내버려 둔다고 깨어날 것처럼 보이지는 않네.
그냥 황금 사신 정원으로 전부 옮겨 버릴까?
아니면 그냥 황금 사신에게 맡겨두고 푸른 마녀를 찾으러 떠날까?
하지만 어느 쪽을 선택해도, 세희의 즐거운 여행 계획은 취소되는 셈이라 조금 꺼려졌다.
그런 고를 수 없는 양자택일의 선택에서 고민하던 중, 갑자기 오늘 소환한 푸른 사신이 생각났다.
마법 비슷해 보이는 신기한 힘을 쓰던데, 노파가 재워버린 직원들을 깨울 수 있지 않을까?
손바닥 위로 푸른 사신을 부르자, 화들짝 놀라더니 모자를 푹 눌러 쓰고 허공에 문자열을 수 놓았다.
<보이지 않아요. 투명해져요.>
그와 동시에 푸른 사신이가 점점 흐릿해지더니, 완전히 투명해져 버렸다.
물론 나는 나에게서 파생된 미니 버전들의 위치를 알 수 있으니까, 별로 소용없는 짓이었다.
투명해져서 마음이 좀 놓이는지, 모자를 다시 제대로 쓰고 손바닥 위에서 일어섰다.
그러고 보니, 이 파란 애는 자기 혼자 옷을 입고 있네.
작은 구두, 원피스, 그리고 커다란 모자까지.
엄청 불편해 보이는데, 나중에 나처럼 다니라고 충고해 줘야겠다.
뭐, 그전에 잠든 사람들부터 해결해야겠지.
손바닥에 맞닿은 푸른 사신을 느끼면서 의지를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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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배 위에서 부자연스럽게 잠든 사람들을 깨워줘.’
푸른 사신은 내 생각을 듣고는 갑판 위를 한번 살펴보더니, 알겠다는 생각을 전달해 왔다.
손바닥에서 폴짝 뛰어내린 푸른 사신은 물로 만들어진 빗자루를 만들어 내더니, 그걸 타고 유람선 위를 빙빙 돌면서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잠에서 깨어나 주세요. 저주에서 벗어나 주세요.>
물로 만들어진 문자들이 터져나가며 이슬비처럼 사람들 위로 스르륵 내려앉았다.
황금 사신들은 반짝거리는 이슬비를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폴짝폴짝 뛰면서 좋아했다.
‘….’
하지만 아무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사태가 쉽게 해결되나 싶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음, 역시 열화판이라 원본의 저주를 풀지는 못하는 건가?
푸른 사신은 내 손바닥 위에 서서 주변을 돌아보더니,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음을 전해 왔다.
‘잠을 깨우지 못해서 미안해요.’
왠지 크게 상심한 것 같아서, 모자 위를 툭툭 두들겨 주면서 위로를 해주었다.
황금 사신들도 손바닥 위로 올라오더니, 괜찮다고 꼭 껴안아 주었다.
푸른 사신은 그런 황금 사신들의 관심이 부담스러운지,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황금 사신 정원으로 도망쳐 버렸다.
세희의 즐거운 파티는 안타깝게도 오늘로 끝이네.
붉은 달의 사막에서 나타났던 거대 해골을 생각해 보면 푸른 달의 호수 위는 위험할 테니까.
세희 연구소 사람들을 황금 사신 정원으로 대피시켜야겠지.
나는 유람선 전체를 황금 사신 정원으로 불러들였다.
핫초코의 바다 위에 둥실둥실 떠다니는 거대 여객선의 탄생이다.
잠이 든 사람들을 핫초코의 바다 위에 옮겨두고 다시 호수 위로 내려왔다.
자, 그럼 빨리 ‘푸른 마녀의 거울’이라는 것을 찾아봐야겠어.
***
대부분이 놀러 가버린 황량한 세희 연구소.
남은 오브젝트 관리를 위해서 연구소에 남은 불행한 보안실 직원들이 있었다.
평소라면 핸드폰으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을 시간이지만, 직원들은 딴짓도 안 하고 굉장히 우울한 표정이었다.
CCTV를 멍하니 바라보던 직원이 갑자기 툭 하고 말을 던졌다.
“아, 호수. 가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나도 가고 싶었지. 그냥 사표 내버리고 호수 놀러 가버릴까?”
기지개를 켜면서 대답하는 선임 직원.
퀭한 표정을 보면 거의 좀비에 가까워 보였다.
“호수를 못 가서 그런가, 이상하게 피곤하고 의욕이 안 나네. 요즘 영화도 별로 재미가 없어.”
“어? 저도 그래요. 왠지 탁 트인 호수를 보기 전까진 계속 이럴 것 같은 기분도 들고.”
대답한 직원은 텅 빈 푸딩 그릇들을 보면서 한층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야간 근무만 아니면 이렇게 힘들지 않을 것 같아요. 이럴 때 황금 사신이가 푸딩을 먹여주면 정말 행복할 텐데…. 황금 사신이는 왜 밤에는 잠을 자는 걸까요?”
“글쎄다. 가끔 밤에도 돌아다니던데, 잘 모르겠네. 연구원들이 알지 않겠어?”
세희 보안실은 그렇게 별다른 사건없이 시간만 계속 흘러갔다.
그리고 새벽 6시.
하늘이 은은하게 파랗게 물드는 시간이 되자, 교대 인원들이 도착했다.
간단하게 인수인계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오니, 엉망진창으로 어지럽혀진 방이 직원을 반겨주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쓰레기.
싱크대에 쌓인 설거짓거리.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옷가지.
언젠가는 정리해야 하는 건 알지만 의욕이 나질 않았다.
하, 정리는 무슨.
편의점에서 사 온 도시락이나 대충 돌려먹고 쓰러져 자야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옷가지를 바닥에 벗어던지고,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를 시작했다.
“어? 뭐야?”
피곤한 몸을 이끌고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이상한 광경이 직원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쓰레기는 사라진 상태였고.
싱크대에 쌓인 설거짓거리는 깔끔하게 세척되어서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바닥에 놓인 옷가지도 가지런히 접혀서 책상 위에 정리되어 있었다.
보통은 소스라치게 놀랄만한 상황이었지만, 푸른 달에 홀린 직원의 마음은 이상하게 평온했다.
뭐지?
우렁각시라도 왔다 갔나?
방이 깨끗해져서 그런지, 방의 공기도 유난히 촉촉하게 느껴졌다.
***
보름달이 커다랗게 떠올랐던 깊은 밤은 어느새 지나가고, 하늘이 밝아져 오는 아침이 도래했다.
태양이 고요한 호수 위로 황금빛 광선을 드리우며 하늘을 밝게 물들였다.
파도치는 호숫물은 물결 모양으로 빛을 일그러트려,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왠지 붉은 사막을 정처 없이 걷던 때가 떠오르는 분위기였다.
아마 사구랑 물결이랑 닮아서 그런 걸까?
뭐, 모래가 물로 바뀐 것뿐이니까, 그런 거겠지.
뚜방뚜방.
호수 표면을, 유령화를 한 채 걸어 나갔다.
방향을 정하지 않고, 발걸음이 닿는 방향으로 제멋대로 돌아다녔다.
‘푸른 마녀’는 인간을 노리는 타입의 오브젝트로 보였으니까, 인간이 있을 법한 곳을 위주로 돌아다녔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호수 위에는 수많은 배들이 떠 있었지만, 모두 주인을 잃고 혼자서 덩그러니 떠 있을 뿐이었다.
너무 심한데?
도대체 누가 여기를 관광지로 만든 거야?
아침에 시작된 수색 작업은 보름달이 떠오른 늦은 밤까지 계속되었다.
푸른 마녀도, 그리고 살아있는 인간도 발견하지 못했다.
푸른 마녀….
도대체 어디 있는거야?
그러던 중, 갑자기 엄청난 악취가 다시 호수 표면에서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
나는 정처 없이 떠돌던 것을 멈추고 방향을 정해, 계속 한 방향으로 쉬지 않고 걸어 나갔다.
목표로 하는 방향은 ‘악취’가 더 짙어지는 방향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요즘 악취가 나는 곳이 문제의 근원인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리고 다행히도 그 짐작이 이번에도 맞는 것 같았다.
악취를 향해서 다가갈수록, 안개가 점점 짙어졌다.
악취를 향해서 다가갈수록,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은 살점 한 조각까지 모조리 불타오를 것이다!]
그리고 노파가 사용했던 저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안개를 뚫고 도착한 호수 기슭.
그곳에서는 기분 나쁜 것들이 서로를 물어뜯고 저주하면서 뒤엉켜 있었다.
인간을 장난감처럼 보고 가지고 놀면서 죽이는 괴물 노파들.
사막에서 봤던 인간을 모독해서 만들어진 뒤틀린 괴물들.
인간에게 해로운 두 종류의 괴물이 서로를 죽이고 있었다.
뚜방뚜방.
그런 두 집단 사이를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내가 점점 다가서자, 전투를 벌이던 두 집단 사이에 뚜렷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회색 사신?”
“회색 사신이 왜 여기에?”
혼란과 불안이 가득 찬 눈빛.
‘눈’으로 괴물들의 파괴 조건을 확인하자, 그 현상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내 ‘눈’에 들어온 괴물들은 화들짝 놀라면서 내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소란스럽던 호수 기슭은 점점 조용해졌다.
저주의 말을 뱉던 노파들도, 검은 점액을 흘리던 괴물들도 행동을 멈추고 나에게 집중했다.
파괴 조건들은 다들 진부하고 나약했다.
심장 파괴, 재생 능력 고갈, 뇌 파괴 등등.
오히려 노파들 쪽이 땅에 파묻어야 하니 좀 더 귀찮은 편이었다.
격이 높거나 특별해 보이는 오브젝트는 이곳에 없네.
‘푸른 마녀’는 여기에 없는 걸까?
차락차락.
자갈 위를 걷는 작은 발걸음 소리가 멀리까지 들릴 정도의 고요.
소란스럽던 호수 기슭은 내 걸음 소리만이 들리게 되어버렸다.
***
늦은 저녁, 야간 담당 직원들이 보안실로 들어섰다.
언제나 피곤해 보이던 야간 직원들의 표정은 한결 나아져 있었다.
잠이 들 때도 ‘아 양천구 호수를 갔어야 했는데.’ 이런 생각에 잠식되어서 제대로 잠들지 못했었는데, 오늘은 제대로 푹 잠이든 덕분이었다.
“야야, 우리 집에 우렁각시가 생긴 것 같아. 샤워하고 나오니까 집이 싹 정리되어 있더라고.”
“어? 선배도 그랬어요? 저도 그랬는데.”
“집이 깨끗해져서 그런지, 잠도 잘 오더라고. 오랜만에 푹 잔 거 같아.”
왠지 상쾌한 기분에 팔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던 선임 직원은 뭔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후임을 발견했다.
마치 도둑이 뒤집어 놓은 것처럼 엉망진창인 원룸을 비추는 카메라.
펫캠인가? 그런 걸 왜 이렇게 집중해서 보는 거지?
“도대체 뭘 보는 거야?”
“그 우렁각시 정체가 뭔지 밝혀내려고요. 그래서 일부러 방도 난장판으로 만들고 나왔어요.”
“설마 그런 걸로 찍히겠어?”
하지만 그 펫캠에 작은 푸른색 무언가가 찍히기 시작하자, 선임 후임 가리지 않고 집중해서 펫캠을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푸른색이 번쩍 할 때마다 난장판이 된 방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화질이 안 좋아서 잘 안 보여.”
“그러게요. 우렁각시가 제 예상보다 훨씬 조그마했네요.”
순식간에 방을 깨끗하게 만든 푸른색 오브젝트는 펫캠 앞에 서서, 뿌듯한 표정으로 방안을 쭉 둘러보기 시작했다.
“사신이? 퍼렁 것도 있었냐?”
“아뇨? 저도 처음 보네요. 황금색 아종인가?”
방을 둘러보던 푸른 사신은 펫캠을 발견하더니, ‘이게 뭐지?’ 하는 얼굴로 렌즈에 얼굴을 들이대면서 관찰을 시작했다.
그리곤 정체를 도저히 알 수 없다는 것처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더니 안개처럼 흩어지며 방안에서 자취를 감췄다.
“허, 우렁각시가 푸른 사신일 줄이야.”
“와, 사신이들은 다 귀엽네요.”
선임과 후임이 서로 사신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푸른 사신이는 보안실로 들어와서 원룸을 비추는 화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인간이 나를 보고 있었다니!
푸른 사신은 모자를 푹 눌러쓰곤 황금 사신 정원으로 도망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