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4
다른 곳에서 활동을 하다 날이 되어 다시금 아카데미 인근에 방문한 나크라드는 자신이 점찍어 둔 던전이 모두 사라진 것을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그냥 내버려 둔 것도 아니고 타리키의 권능으로 가려둔 것을 어찌 찾아내어 공략했단 말인가.
우연히 하나가 발견될 수는 있다.
그렇지만 열 댓 개에 가까운 던전이 모두 공략되었다니.
그 범인이 누구인지 궁금해 할 필요는 없었다.
던전을 공략한 자는 나크라드를 약올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흔적을 남겨두었으니까.
아르마디의 사도년.
씹어 먹어도 모자랄 그 좆같은 신이 네게 무슨 계시라도 내려주더냐.
역시 그 날에 죽였어야 했다.
감정에 휩쓸려 그 년을 가지고 놀려 하다가 된통 당할 줄이야.
이빨을 까드득 갈던 나크라드는 이내 길게 숨을 내뱉었다.
곤란하게 되었다.
이래서야 계획이 비틀어지고 만다.
멍청한 년 하나를 섭외해서 그 년의 욕망을 이용해 아카데미에 혼란을 일으킬 생각이었거늘.
던전의 폭주 탓에 아카데미의 마법이 뒤흔들릴 때에 타리키의 권능을 흩뿌릴 셈이었거늘 이래서야!
나크라드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나의 오만 때문에 신께서 바라는 일에 지장이 생기는 것인가.
당장에라도 이 목숨으로 속죄하고 싶으나 지금은 그럴 수 없다.
그런다 한들 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니.
비록 비틀어졌다 하여도 타리키께서 원하는 바를 이룰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그것이 사도의 사명이니까.
목숨이라면 나중에 바쳐도 충분하다.
시간이라도 있었다면 다른 방책을 찾아보았을 터이거늘.
그럴 만한 시간조차 없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자리를 비우는 것이 아니었다.”
타리키의 영광을 널리 퍼트리는 데 성공하면 무얼 하는가.
정작 타리키의 뜻을 이루는 데에 실패했거늘.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꾹 깨문 채 나크라드가 생각을 거듭하던 때에.
‘아이야.’
목소리가 들렸다.
‘나의 아이야.’
그림자 속에서 흘러 들어와 머리를 휘감아 버리는 목소리가.
나크라드는 이 목소리를 알았다.
나크라드이기에 이 목소리를 알았다.
“아아. 타리키시여.”
악신의 사도는 그 즉시 무릎을 꿇고 경배를 올렸다.
자신의 실수에도 자비로이 말을 걸어주시는 신의 목소리에 눈물을 흘렸다.
‘걱정하지 말라. 우리의 중심께서는 모든 것을 대비하시니.’
“아아.”
‘그 분께서 나누어주신 권능이 그대에게도 향하리라.’
*
아카데미 주변의 던전을 없애기 시작하고서 며칠이 지나 중간고사가 시작되기 전 날.
나는 오랜만에 책을 펼쳐 내일 칠 시험의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걸 공부라 할 수 있느냐? 그냥 책을 술술 넘기는 게지.>
‘제 축복이 기억하고 있으니까 문제없어요.’
<여아야. 공부라는 것은 말이다. 단순히 높은 성적을 거두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할배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리는 데도 능숙해진 나는 대충 대꾸를 하면서 책 내용을 눈으로 훑었다.
음! 역시 모르겠어!
예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기초와 상식이 아예 없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익힌다는 게 말도 안 되게 어려운 일이야.
내가 진짜로 공부를 하기 위해선 7살이나 8살짜리 어린 아이가 읽는 책부터 시작해야하지 않을까 싶네.
언제까지고 수업 시간에 잠만 자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나중에 한 번 공부하는 척이라도 해볼까.
그런 생각을 하며 훌훌 책장을 넘기던 나는 이내 책을 닫고서 기지개를 폈다.
내일 시험을 칠 내용은 모두 다 로그에 남겨 뒀고 나중에 시험을 치기 직전에 미리 올려서 확인을 하면 되겠지.
흐으으. 시험이 끝나면 하루 정도는 쉴까.
최근에 던전을 공략한다고 너무 정신없이 살았어.
하루 이틀 정도의 여유를 가지기 위해서 하루에 던전을 세 개씩 없애고 다녔으니까.
중간부터는 숙련도 작을 위해 뒤에서 지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전투에 참가하기까지 했으니.
그 고생을 한 덕에 얻은 것도 많기는 하지.
내 레벨은 목표로 하던 것을 지나 25까지 달성 되었고,
여러 자잘한 아이템을 얻은 덕분에 주머니는 더 풍족해진데다가.
실전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메이스 숙련도와 방패 숙련도도 많이 올랐거든.
어느 정도나면 내가 싸우는 모습을 본 할배가 이제는 어지간한 기사와 싸워도 훌륭한 승부를 겨룰 수 있을 수준이라 말할 정도로.
물론 어지간한이라는 범위 속에 알른 가문의 기사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할배 왈 그 곳에서 수련을 하는 이들은 하나 같이 규격외의 존재이고 지금의 나로는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했거든.
우리 가문의 기사를 상대로 좋은 승부를 겨루려면 한참은 더 수련을 거듭해야 한다더라.
하긴 여전히 대련을 할 때 칼이 나를 봐주는 게 느껴지는 데 가문의 다른 기사라고 결과가 다르겠어?
어쨌든 지금 이 성장세는 말도 안 되게 가파른 수준이다.
게임으로 따져도 빠른 수준이니 말 다했지.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부터 알른 가문에서 죽어라 수련을 한 게 성과를 낸 거겠지.
지금이라면 2학년에서 강한 편에 속하는 선배들을 상대로도 승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건 쪼잔 악신님 덕분이야.
그 분이 끊임없이 내게 방해공작을 걸어 준 덕분에 이렇게 빠르게 강해질 수 있었으니까.
자신의 방해공작이 내게 도움이 되는 걸 보면서 그 쪼잔 악신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으려나.
“알른 영애님!”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들린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 늦은 시간에 누구지? 지금은 다 잠잘 시간이잖아.
설령 늦은 시간이 아니더라도 내 기숙사를 찾아 올 사람은 없어.
혹시 누가 장난을 치러 온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일어나 문을 열었더니 비시가 그 앞에 서 있었다.
“영애님!”
‘무슨 일이신가요?’
“무슨 일이야? 들러리 영애.”
“제발 도와주세요! 기댈 곳이 영애님밖에 없어요!”
도와달라니?
전후사정도 없이 새어나온 말에 의아해하는 나에게 비시는 쏘아내듯이 설명을 내뱉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오늘 저녁.
유령이 있는 저택에서 유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유령이 자신을 옷장 안에 숨겨두었다고.
그러고 얼마 있지 않아서 검은 색으로 칠해진 것 같은 사람이 저택에 쳐들어왔다고.
유령은 평소에 보여주지 않았던 기이한 힘으로 검은 사람을 상대했지만 결국에 패배했고, 정신을 잃은 유령의 가슴팍에 검은 사람이 자줏빛으로 물들어있는 돌을 박아 넣었다고.
“아드리의 가슴팍에 돌이 박히자마자 거기에 던전의 입구가 생겨났어요. 아드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요. 분명 그 던전 안으로 빨려 들어간 거에요!”
비시의 설명을 들으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단 하나 뿐이었다.
왜 벌써 이 사건이 일어난 거지?
저택의 유령을 기점으로 던전이 생겨나는 것은 소울 아카데미 게임에서도 있었던 일이다.
이전에도 말했던 내용이지만 이 세상에 던전을 만들어 내는 것은 쪼잔 악신이다.
여러 악신들을 거느리는 악신의 대장 같으신 분께서 세상에 혼란을 전파하기 위해 던전을 만들어 내지.
이것은 아그라의 고유한 권능이지만 동시에 다른 악신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권능이기도 하다.
문제는 권능을 부여받은 다른 악신들은 아그라처럼 아무 곳에나 던전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그라보다 나약하기에 던전의 기점이 될 것을 필요로 한다.
기점이 될 수 있을 만한 힘이나 역사를 지니고 있는 것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령 저택의 유령은 쐐기가 되기에 아주 적당한 존재다.
오래 전부터 그 곳에 머물러 온 만큼 깊은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그와 동시에 지박령이 될 만큼의 원한을 지니고 있으니까.
근데 유령을 쐐기로 삼아 던전이 생겨나는 시점은 아카데미의 2학년이다.
지금으로부터 1년이 지나서 아그라의 봉인이 더 약해졌을 때 일어나는 사건이란 말이다.
그 일이 왜 지금.
“도와주세요. 알른 영애님. 제발요. 던전에서 아드리를 구해주세요. 시키는 거라면 무엇이라도 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눈을 붉힌 채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고 있는 비시를 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샜다.
이미 일어난 일이 왜 일어났는지 고민한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어.
고민해야 할 것은 다른 거야.
비시를 도와줄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바람을 외면할 것인지.
비시가 요청을 하는 게 평범한 던전을 공략해달라는 내용이었다면 난 별 다른 고민없이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다른 던전을 공략하는 것처럼 칼하고 알새틴을 데리고 쳐들어가서 박살을 내버리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아그라가 아닌 다른 악신이 만들어 낸 던전은 여타 던전과는 다른 특성을 지닌다.
1인 공략.
홀로 들어가서 던전을 공략해야 하는 것이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나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는 소리다.
설령 그 안에서 말도 안 되는 변수가 일어나 죽음을 맞이할 지라도.
그냥 칼을 보내면 안 되냐고?
나도 그러고 싶지만 무리야.
칼이 유령을 무서워하건 말건 이전의 문제가 있다.
그 곳의 테마는 사령이다.
이전에 사령술사를 상대했던 때처럼 물리 공격에 완벽히 면역이 된다는 이야기다.
칼이 혼자 들어가게 되면 유령들에게 농락을 당할 뿐 공략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
메이스에 신성을 담을 수 있는 나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하아.
유령을 기점으로 만들어진 던전이 어떤 것인지는 당연히 안다.
그 안에서 어떤 몬스터가 나타나고 길이 어떻게 되어있으며 보스를 공략하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완벽하게 알지.
난이도?
지금 내 상태면 충분히 공략가능하다.
그 곳이 까다로운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물리직으로는 그 안의 몬스터를 공격할 수 없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사령들이 사용하는 여러 저주나 디버프가 더럽게 까다롭기 때문인데 어느 쪽이건 나라면 해결할 수 있으니까.
심지어 내가 리본을 선물함으로써 원한이 일부 사라진 지금에서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망설이는 이유는 오롯이 하나.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아그라 그 쪼잔하고 좆같은 악신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으니까.
봐. 지금도 본래 일어나선 안 될 일을 꼴받는다고 일으켰잖아.
내가 혼자가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 안으로 들어가 봐.
장담컨대 날 죽이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개입할 걸.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거절하는 게 옳다.
지금 내게 이 부탁은 유령 하나가 사라질 건지.
거기에 나까지 길동무로 얽혀 들어갈 지를 묻는 셈이니까.
아무리 눈앞의 여자아이가 불쌍해보인다 하더라도 냉정히 쳐내는 것이 맞다.
“알른 영애!”
안다.
아는데.
하아.
씨발.
진짜.
도저히 입에서 거절의 말이 튀어나오질 않네.
– 띠링.
얼굴을 쓸어내리다가 갑작스레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 곳은 던전이 아니니 내게 메시지를 보낼 사람은 하나 뿐이었다.
허접 주신님.
[퀘스트 : 유령을 구하라!]
[던전의 쐐기가 되어버린 유령을 구하라!]
[보상 : 던전탈출권(선지급)]
[실패시 : 없음]
허?…
뭐요? 던전탈출권?
내가 생각하는 그거입니까?
하
하하하하.
…
허접 주신님. 그거 아쇼?
제가 당신의 사도가 되고서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당신이 주신답다는 생각이 든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평소에도 이러면 얼마나 좋아요. 아르마디님.
구하고 싶다면 가라는 거죠?
알겠어요. 가도록 할게요.
‘가자. 비시.’
“가자. 들러리 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