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로운 빛을 발하는 수정 동굴, 검은 요원이 차갑고 딱딱한 바닥에 의식을 잃은 채 누워있었다.
수정 동굴 벽에서 은은하게 퍼져나가는 빛은 남자의 일그러진 표정과 너덜너덜해진 옷차림을 비춰주었다.
그 앞에는 결연한 의지와 불안감이 뒤섞인 표정의 금발 소녀가 검은 요원을 지키듯이 서 있었다.
[나랑 계약을 하면 너를 원래대로, 인간으로 되돌려줄게.]
소녀의 앞에선 여인이 몸을 기울이며 달콤한 제안을 속삭였다.
[어때 관심 있어?]
여인의 눈은 교활한 빛으로 빛나고, 입술은 위험한 미소로 비뚤어져 있었다.
검은 요원은 아득해진 정신 속에서 귓가에 들리는 의미심장한 대화를 듣고 있었다.
인간의 말을 하는, 교활한 오브젝트와 거래라니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짓이었다.
검은 요원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정신을 차렸다.
그는 힘겹게 일어나려 애쓰며 쉰 목소리로 외쳤다.
“아가씨, 절대로 안 됩니다!”
남자의 목소리에 소녀의 얼굴에는 약간의 망설임이 깃들었다.
“아가씨도 아시지 않습니까? 말하는 오브젝트와 절대로 거래해서는 안 됩니다. 대가는 끔찍한 데다가 원하는 것은 얻지 못합니다.”
바닥에 엎어진 채 남자는 금발 소녀를 설득하기 위해서 급하게 말을 토해냈다.
[쉿.]
남자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여인이 입술에 손을 대고는 말했다.
[방해하지 말고, 잠시 잠들어 있어라.]
여인의 말이 실체를 가지고 검은 요원을 깊은 잠 속으로 다시 돌려보냈다.
“아… 아가씨.”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끔찍한 괴물일 것이 분명한 오브젝트.
그리고 그 앞에 맞서듯이 서 있는 금발 소녀.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검은 요원은 정신을 잃었다.
***
양천구 호수를 감싸고 있는 짙고 소용돌이치는 안개를 뚫고 들어오는 달빛이 힘겹게 수면에 닿았다.
안개가 자욱하게 드리워진 호수는 마치 뭔가를 기다리는 듯 잔잔하게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을 잘라버리는 것처럼 호수 기슭에 정차한 탑차로부터 검은 점액을 흘리는 괴물들이 호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치 이지를 상실한 괴물들처럼 말이다.
[대지가 너희들의 발을 뜯어먹을 것이다!]
[너희의 뼈는 자신의 무게를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런 호수에서 기괴하게 비틀린 노파들이 저주의 말을 자아내며 안개를 가르고 천천히 나타났다.
저주를 읊는 노파들을 상대하기에는 검은 점액을 흘리는 괴물들은 현격한 열세로 보였다.
노파들이 저주를 뱉어낼 때마다 불타고, 녹아내리고, 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하지만 두려움을 잊은 것처럼 보이는 괴물들은 그저 거침없이 호수를 향해서 달려들 뿐이었다.
그런 괴물들을 멀리서 지켜보는 남자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면 호수의 심장이 우리 손에 들어오겠어. 뇌를 적출한 연구원들이라 그런지 말도 잘 듣고 좋구만.”
“….”
우세한 것처럼 보이던 노파들에게 이변이 발생했다.
호수에 검은 점액이 흘러 들어가자, 점점 손발에 검은 반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반점이 늘어날수록 노파들은 괴로워했고, 괴로워할수록 호수를 오염시키는 점액의 양은 늘어만 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남자는 정차 중인 자신의 차량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끝났군. 역시 이번에도 순조로워. 먼저 가볼 테니 집사가 남아서 호수의 심장을 회수해 오게.”
“네, 알겠습니다. 소장님.”
떠나가는 소장을 배웅한 집사는 묵묵히 호수 기슭에 서서 안개로 가득한 호수를 바라보았다.
“….”
하지만 승리가 코앞까지 다가온 것 같던 전장의 분위기가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처음은 공포를 잃어버린 연구원들이 걸음을 멈추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앞으로 달려들려고 하지만,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온몸을 비틀며 고통스러워하는 연구원들.
공포를 모르는 연구원들이 두려워한다고?
안개 너머로 노랗게 빛나는 안광이 흔들리면서 다가왔다.
뚜방뚜방.
산책을 나온 것처럼 경쾌한 발걸음의 어린아이.
회색 피부를 가지고, 노랗게 빛나는 눈을 가진 사신.
공포에 떨고 있는 오브젝트들을 바라보며 회색 사신은 웃었다.
양손을 넓게 벌리자, 황금색으로 빛나는 작은 사신들이 허공에서 공간을 찢고 나타나 달려들기 시작했다.
닿는 모든 것을 갈아버리는 압도적인 폭력.
공포를 느끼지 못해야 할 연구원들마저 패닉에 빠져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노파들은 안개로 몸을 감추고 호수 깊숙한 곳으로 몸을 숨겼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노란 눈동자를 보자, 연구원들의 공포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저것은.
회색 사신은 오브젝트가 절대로 이길 수 없다.
***
검은색 점액으로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호수 기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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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폐가 있었다면, 악취가 너무 심해서 질식사해 버릴 것 같네.
폐가 없어서 다행이야.
해로운 적들을 모두 해치운 황금 사신들은 끔찍한 냄새에 모두 도망쳐 버렸다.
요즘 이 점액이 자주 보이는데, 도대체 어디서 자꾸 튀어나오는 거야?
만약 원인이 발견되면 사지를 찢어줄 텐데….
호수 기슭에는 노파의 시체는 없었다.
일부러 놓아줬으니까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봐도 ‘푸른 마녀’랑 관련이 있어 보이니까, 그 기괴한 노인네들은 일부러 잡지 않고 놓아줬다.
왠지 놓아주면 ‘푸른 마녀’가 있는 곳으로 도망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추적 담당은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는 우리 신참 푸른 사신이.
호수 기슭의 적들은 모두 물리쳤으니, 푸른 사신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양천구 호수로 향하는 버스 안, 문신투성이 여자는 불편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있었다.
버스는 흥분한 승객들의 활기찬 수다와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이미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승객들의 기대감은 식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언니, 가서 뭐부터 할까?”
그녀의 여동생도 기대가 가득한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여자는 죽도록 쓴 잎사귀를 씹으면서 말했다.
“우선은 동굴부터 가봐야지.”
“아, 언니도 양천구 호수 찾아봤구나! 거기 동굴 정말 멋지더라고.”
여자는 기대에 가득 찬 여동생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 여동생이 바라는 관광은 이루어지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여자는 손아귀에 들린 수정을 들어 올리면서 생각했다.
그 배신자가 호수를 보고 그냥 넘어갈 리가 없으니까.
호수는 검게 물들고 호수의 뱀은 배신자의 손아귀에 떨어지겠지.
9개의 머리를 가진 뱀은 이 수정이 없으면 절대로 이길 수 없다.
절대로.
수정안에서 하얗게 소용돌이치는 불꽃을 바라보며, 여자는 의지를 다졌다.
***
푸른 사신은 물로 만들어진 빗자루에 올라탄 채, 도망가는 노파들을 쫓아가고 있었다.
노파들은 공포에 빠진 채, 수면 위를 휘젓고 다니며 파문을 일으켰다.
마치 심연에서 올라온 괴물이 쫓아오는 것처럼 어깨 너머로 끊임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고, 그저 어딘가를 향해서 계속 도망치기만 했다.
거친 숨소리와 수면을 밟을 때 나는 물소리만이 고요한 호수에서 울려 퍼졌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도주는 동굴 입구에 다다르자 멈췄다.
한결 긴장을 덜어낸 표정의 노파들은 동굴 앞에 모여서 공포를 지우듯이 대화를 시작했다.
[겨우 살았어.]
[도대체 왜 저런 괴물이 나타난 거지?]
[설마 막내가 돌아오지 않는 것도 저것 때문인가??]
검은 점액에 얼룩덜룩 피부가 상한 노파들이 동굴 앞에서 떠들고 있자, 동굴 깊숙한 곳에서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 안개 속에서 거대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쿵. 쿵.
커다란 발울림 소리와 함께 실루엣이 안개를 갈랐다.
노파를 두 배로 키워놓은 것 같은 거대한 괴물이었다.
[소란스럽구나.]
괴물이 나타나자, 떠들던 노파들은 말을 멈추고 고개를 조아렸다.
엄청난 존재감의 오브젝트를 보면서 푸른 사신은 회색 사신에게 신호를 보냈다.
허공을 수놓는 문자열.
<수상한 오브젝트가 나타났어요!>
하지만 푸른 사신이 보낸 신호는 노파들에게 쉽게 관측되었다.
그것을 눈치챈 푸른 사신은 도망치려고 했지만, 거대한 노파는 거대한 몸집과 다르게 엄청난 속도로 움직여서 푸른 사신을 움켜쥔 것이다.
<아… 아파! 놔주세요!>
푸른 사신은 벗어나려고 버둥거렸지만, 벗어날 수가 없었다.
[신기한 녀석이구나. 우리 자매도 아닌데, 비슷한 힘을 쓰고 있어.]
투닥투닥.
노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내리치는 손.
그 손을 바라보던 노파는 그대로 잡고 뜯어내 버렸다.
<!!!!!>
푸른 사신은 고통에 찬 표정으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크크크크. 재미있구나. 이런 재미있는 아이가 나타날 줄이야. 아가야. 우리 내기 한번 하지 않으련? 내기에서 이긴다면 풀어주마.]
팔이 뜯겨서 포롱포롱 눈물을 흘리는 푸른 사신을 보면서 노파는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
그때 갑자기.
세상이 일변했다.
[뭐? 뭐냐?]
축축한 호숫가는 온데간데없었고, 손아귀에 쥐어진 귀여운 아이도 사라졌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초콜릿의 바다.
마시멜로의 구름.
극도로 분노한 것으로 보이는 황금색 작은 오브젝트들.
마지막으로 푸른 아이를 품에 안고 자신을 노려보는 회색 괴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