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5
“영애님. 저기 다른 분들은.”
내가 홀로 던전 입구에 서자 비시는 당혹스런 기색을 보였다.
아마도 내가 칼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할 거라 생각한 거겠지.
‘혼자면 충분해요.’
“이딴 허접한 던전을 공략하는데 나로는 부족하다는 거야? 건방지네. 들러리 영애.”
혼자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거지만 일부러 자신만만한 척을 해보였다.
비시한테 무어라 투정을 부린다한들 그녀의 불안감을 가속시킬 뿐이니까.
그럴 바에는 해결하고 올 것이란 믿음을 심어주는 편이 낫지.
확실히 표정을 감출 때에는 메스가키 스킬이 좋다.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건방진 얼굴을 만들어 주니까.
내 마음 속에 불안이나 망설임을 상대는 도저히 알아차릴 수 없지.
“그렇군요.”
비시는 내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나와 함께 던전을 공략해보았던 그녀이니 내가 근거 없이 이런 말을 꺼내지 않을 거라 생각한 거겠지.
이런 식으로 보면 내 평판이 오르긴 올랐네.
처음 루시의 몸에 빙의했을 무렵이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그랬을 텐데.
아니 그 전에 나한테 부탁을 하러 안 왔겠구나.
<정말 괜찮겠느냐?>
‘물론이에요.’
아르마디님이 제대로 일을 해주신다면이야 아무런 문제도 없다.
아그라 그 쪼잔한 악신이 개입하지 않으면 원래대로 공략하면 그만이고.
개입한다 하더라도 내가 감당할 수 있으면 해결하면 되지.
설령 위험해 진다 한들 탈출하면 그만.
손해 볼 건 없어.
그러니까 망설일 이유도 없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그만이야.
단호히 이야기하자 할배는 그 이상 나를 만류하지 않았다.
‘그보다 비시…’
“됐고. 들러리 영애. 지난번에 줬던 열쇠 가지고 있지? 내놔. 이 허접한 찌그래기 던전을 공략하는 데 필요해.”
“아. 네! 여기요.”
비시가 품에서 꺼낸 열쇠를 받아들고서 던전의 입구를 살폈다.
생긴 것 자체는 평범한 여타 던전과 다를 게 없지만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아그라가 만들어낸 던전이 위압적인 느낌을 주었다면 이 던전은 음침하고도 찝찝했으니까.
어둠을 다루는 중2병 악신이 만들어낸 던전답네.
‘금방 올게요.’
“들러리 마냥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올 테니까.”
던전의 안으로 발을 내딛으니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달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밤의 저택.
바깥의 저택이 낡아서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았다면 이 저택은 이제 막 문을 연 것처럼 말끔했다.
“손님이 찾아왔네?”
저택 한 가운데의 계단 위에서 여성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이 지닌 검은 색 머리카락과 대비되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녀의 몸은 반투명해서 뒤편에 걸려있는 가족사진을 자연스레 볼 수 있었다.
“안녕. 나는 아드리. 아드리 벨벳. 위대한 가문인 벨벳 가문의 장녀야. 만나서 반가워.”
‘안녕하세요. 아드리.’
“안녕. 외톨이 유령. 손님이 찾아와서 기쁜가보네?”
“외톨이라니. 내가?”
흐린 얼굴에 주름이 새겨지는 게 보였다.
메스가키 스킬은 오늘도 순항중이네.
인사를 한 것만으로 던전 보스에게 어그로를 끌다니 말야.
미리 도발을 좀 해 놓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어차피 마지막에는 아드리랑 싸워야 하니까.
열을 받게 만들어 두면 나중에 스텟 버프를 받기도 수월해질 거 아냐.
“수십 년 동안 외로워♡ 외로워♡ 하고 울었으면서 외톨이가 아니라고?♡ 그것 참 웃기네♡ 친구가 있긴 해?♡”
둥글게 올라가 있었던 아드리의 입꼬리는 이내 일자로 바뀌었고 조금 지나서는 아래로 쳐졌다.
존재하지 않는 이빨이 서로 부딪히며 까득거리는 소리가 공허한 저택에 울려 퍼진다.
“난. 혼자가. 아냐.”
아드리가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저택의 온도가 조금씩 낮아진다.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니라 물리적인 의미에서.
그녀를 기점으로 해서 만들어진 공간이니 만큼 그녀의 기분에 영향을 받는 것이다.
그렇지만 춥지는 않았다.
그녀의 기분이 나빠지는 만큼 나의 가슴 속에 고양감이 새겨졌으니까.
“이 저택에 너 말고 누가 있는데?♡ 응?♡ 외톨이 유령아?♡”
“이제 알게 될 거야.”
아드리는 그리 이야기를 하고는 위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다 중간에 고개를 돌렸다.
“날 찾아봐. 찾을 수 있다면. 이지만.”
마지막 말과 함께 아드리의 형체가 흩어지고 텅 빈 저택에 고요가 찾아왔다.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으니 고양감이 사라져야 하지만 이상하게도 여전히 메스가키 스킬의 버프는 유지되고 있었다.
이 던전 자체가 아드리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곳이니만큼 아드리가 날 미워한다면 계속 버프가 이어지는 걸까?
내 입장에서는 이득이네.
항상 버프를 받은 상태에서 움직일 수 있단 이야기니까.
미리 아드리를 열받게 하길 잘했다.
<이 곳은 특이하구나. 던전이지만 던전 같지가 않아.>
‘아드리의 사념이 담겨 있어서 그래요.’
아그라 이외의 악신이 만들어 낸 던전은 대개 이렇다.
무언가를 쐐기 삼아 던전을 만드는 만큼 쐐기가 지닌 사념이나 원한 같은 것에 영향을 받아 일반적인 던전과 다른 모습을 지니게 되지.
아드리의 던전도 그렇다.
보통의 던전은 아래로 내려가며 보스룸까지 도달해 보스를 토벌하는 걸 목표로 하지만 이 던전은 다르다.
이 곳에선 저택의 여러 장소를 돌아다니며 아드리가 있는 곳을 찾아내 그녀를 토벌해야 한다.
<그런데 여아야.>
‘네?’
<왜 가만히 있는 것이냐?>
아드리가 떠나가고 나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멀뚱히 서 있는 내 모습에 할배가 의아함을 표시했다.
항상 최단거리 최대의 효율로 던전을 공략하는 내가 여유를 부리는 게 신기한 듯 했다.
‘이게 올바른 공략법이라서요.’
단순히 빠르게 이 던전을 공략할 생각이라면 가만히 있을 이유가 없지만 지금 내 목표는 던전을 공략하는 게 아니라 아드리를 구하는 것이지 않나.
그녀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순서를 지킬 필요가 있다.
내가 가만히 서있은 지 몇 분이 지났을까.
본래 아무것도 없었던 카펫 바닥 위에 흐릿한 형체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기사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피가 묻어있는 낡은 갑옷.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
그러는 와중에도 적을 노려보는 집념섞인 눈동자.
칼이 저를 보았다면 분명 여자아이 마냥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나뒹굴었을 것이다.
아쉽네.
내게 그 어떤 말을 들어도 웃기만 하는 칼이 벌벌 떠는 꼴은 꽤 재밌었는데.
– 떠나라.
– 그대는 이 곳을 지나갈 수 없다.
– 우리는 목숨을 다해 우리의 주인을 지킬 지어니.
저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윙윙거리는 것을 무시하며 메이스를 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그리고 나서 신성 마법을 쓸 때의 요령으로 메이스에 신성을 불어넣자 메이스의 끝에서 빛이 새어나왔다.
어둠으로 물든 저택에 떠오른 하나의 태양이 될 수 있을 것처럼 밝은 빛이.
그를 본 사령 기사들이 하나 둘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선다.
내가 평소에 허접이니 무능이니 변태니 이야기를 하지만 아르마디의 힘 자체는 진짜다.
악신과 정반대편에 서있는 성스러운 주신의 위용은 세상의 규율을 거스르는 자들에게 재앙이나 마찬가지일지어니.
저들이 생전에 아무리 뛰어난 기사였다한들 내게 대적할 수는 없다.
“뭐야♡ 겁쟁이들♡ 주인을 지키겠다니 뭐니 하더니 빛이 무서워서 도망치는 거야?♡ 허접해♡ 기사실격♡ 나 같으면 부끄러워서 목을 매달았을 거야♡”
사령기사들은 인내심이 그리 깊은 자들이 아니었다.
내 웃음소리가 새어나기도 전에 선두에서 한 명의 기사가 달려들었으니.
양손으로 쥔 검을 위로 치켜드는 공격 속에선 감정에 휩쓸려 이성을 날려버렸다는 게 훤히 보였다.
안되지.
내가 아무리 연약해 보이는 꼬맹이라고 해도 그딴 허접한 공격에 당해주지는 않아.
철벽이 고하는 것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다.
스킬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도 없었다.
여태까지 쌓아온 전투 경험이 내게 최적의 움직임을 알려주었으니까.
내리쳐지는 검을 향해 방패를 들이 밀어 검을 튕겨냈다.
감정을 담아 전력으로 공격을 한 만큼 노림수가 빗나갔을 때의 빈틈도 커다랬다.
메이스를 들어 한 번 부서졌던 투구를 완전히 박살내 버렸다.
신성이 담긴 메이스를 견딜 수 없었는지 재가 되어 흩어지는 기사를 지나쳐 앞으로 발을 내딛는다.
“뭐해?♡ 허접 기사들♡”
저들은 아르마디의 빛을 두려워했다.
자신의 동료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재가 되는 걸 보며 공포에 떨었다.
“항복할 거야?♡ 여자애 앞에 질질 짜면서 살려달라고 빌 거야?♡ 해봐♡ 꼴사나워서 재밌을 것 같으니까♡”
허나 마음속에 도사린 공포를 나를 향한 분노가 집어 삼켰으니.
저들은 자신이 무력하게 죽을 것을 알면서도 나를 향해 내달렸다.
그것은 용기이면서 무용이었다.
죽음을 각오했다 한들 사령들의 무력함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저들의 돌진은 아무런 결과도 낳지 못한 채 재로 돌아갈 뿐이었다.
사령 기사들의 육신이 모두 사라지고 저택에 다시금 고요가 찾아들었을 무렵 저택의 모습이 변했다.
언제라도 손님을 맞이할 수 있을 것처럼 깔끔했던 저택의 입구가 괴한들이 찾아와 깽판을 친 것처럼 난장판이 되어간다.
바닥의 카펫이 찢어지고.
벽지가 뜯어졌으며.
탁자가 넘어졌고.
그 위에 놓여있던 유리병이 깨졌다.
<이 무슨?>
‘놀라지마세요. 할아버지. 앞으로도 계속 이럴 거에요.’
저택의 모습이 바뀐다는 것은 내가 지금 올바른 방식으로 던전을 공략하고 있단 걸 증빙하는 거니까.
할배에게 가벼이 대꾸를 하고 나서 발을 움직였다.
다음에 내가 방문한 곳은 이 저택의 접객실이었다.
문을 열고서 내가 발을 들이기 무섭게 비어 있던 방에 여러 사령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찢어진 시종의 복장을 입고 있는 여성.
눈에서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집사.
그리고 검은 로브를 입고 있는 사령이면서 사령을 다루는 술사들.
본래라면 웃는 얼굴로 손님을 맞이했을 이들의 표정에는 증오와 적의만이 담겨있었다.
– 돌아가라!
– 이 곳은 빛이 있을 장소가 아니다!
– 죽은 자의 원한을 방해치 말라!
저들이 지껄이는 헛소리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발을 앞으로 내딛은 순간 유령 시종이 비명을 내질렀다.
고요한 저택의 창문을 깨트려 버릴 듯한 굉음.
저주가 담긴 비명.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저 목소리를 들으면 공포. 혼란. 약화. 저주 등의 디버프가 걸려야 하지만 나는 멀쩡했다.
아르마디의 사도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내가 멀쩡할 수 있는 이유는 지금 이 저택에서 가장 나를 미워하고 있을 아드리가 선물해 준 스킬 덕분이었다.
[이젠 한은 없으니]
유령이 선사해 준 스킬이 나를 지켜준 것이다.
비명을 내지르는 시종의 머리를 깨부수는 것으로 고요를 되찾은 나는 겁을 먹고서 뒤로 물러나는 이들을 보며 웃었다.
– 어째서.
– 왜 멀쩡한 것인가.
“뭐야?♡ 계획대로 안 되니까 쫀 거야?♡ 푸훗♡ 개허접이네♡”
원망하고 싶으면 너네들의 주인을 원망해.
걔가 선물해 준 스킬이 아니었다면 이 정도로 무작정 움직일 순 없었을 테니까.
“덤벼♡ 버러지들♡”
너희한테 낭비하기엔 내 시간이 아깝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