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Chapter 107

금발 소녀를 품에 안고 동굴 밖으로 빠져나온 검은 요원 앞에 나타난 것은 정체불명의 푸른 여인이 아니었다.

커다란 보름달 아래, 소용돌이치며 솟구친 거대한 물기둥들이었다.

고개를 들어서 올려다보면, 천체의 빛나는 빛 아래 소용돌이치는 물로 이루어진 히드라가 그 거대한 위용을 뽐내며 솟아올라 있었다.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인데, 짓눌려 죽을 것만 같은 크기의 압력.

거대하게 솟아오른 물기둥은 그 크기만으로 막대한 질량의 힘을 느끼게 했다.

“이건 대체, 무슨.”

검은 요원은 당혹스러운 혼잣말을 내뱉었지만, 그 말소리는 격렬하게 회전하고 흩어지는 물소리에 뒤덮여서 사라졌다.

별빛이 쏟아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구름에 닿을 듯한 아치를 그리며 고고하게 솟아있던 히드라는 어떤 한 방향을 쳐다보면서 입을 벌렸다.

히드라의 입에서 쏘아진 물줄기는 광선처럼 순식간에 지면에 닿았다.

지면을 마구 헤집는 물줄기는 단단한 바위를 종잇장처럼 찢어버릴 힘과 날카로움을 가지고 있었다.

히드라 주변에서 번지는 소용돌이가 주변의 물건들을 끌어당기며 난장판을 만들었고, 물방울과 잔해들을 공중으로 날려 보냈다.

검은 요원에게 그것은 마치 서울의 멸망을 알리는 신호탄처럼 보였다.

강철탑과 비견할 만한 스케일의 재앙이 서울에 도래했다.

***

호숫물이 소용돌이치면서 하늘 높이 솟구쳤다.

주변을 그림자로 가득 채울 만큼 커다란 물기둥.

황금 사신도 푸른 사신도 그리고 나도 하던 일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볼 만한 박력을 가진 멋진 장관이었다.

물기둥의 크기와 위압감은 나에게 약간 기대감을 심어줬다.

드디어 ‘푸른 마녀의 거울’이라는 것이 뭔지 알 수 있는 건가?

하지만 튀어나온 것은 마녀도 아니고 거울도 아니었다.

머리가 아홉 개 달린 뱀.

히드라처럼 생긴 물로 만들어진 괴물이었다.

호수에서 솟아 나온 히드라는 나타나자마자, 나와 미니 사신들을 향해서 물줄기를 발사했는데, 그 위력이 엄청났다.

이런 대량의 물을 바위를 절단할 정도의 속도로 뿜어내다니.

이 물대포를 푸른 사신이 맞으면 푸른/사신이 돼버릴 테니, 서둘러서 정원으로 돌려보냈다.

사방에서 소용돌이가 치솟아 올라 돌을 갈아버리고, 그 갈린 잔해를 하늘로 쏘아 올렸다.

히드라의 입에서 쏟아지는 9개의 물줄기는 사방을 자르고 분쇄하면서 돌아다녔다.

물과 바위가 이리저리 튕겨 다니고, 살짝만 스쳐도 팔다리는 우습게 날아가 버릴 흉악한 광경.

하지만 히드라의 위압적인 등장과 공격은 우리에게 전혀 먹히지 않았다.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는 소용돌이를 회전목마 타듯이 타는 황금 사신.

사방에서 날아오는 물줄기와 바위를 피하면서 노는 황금 사신.

물줄기와 바위에 맞고 날아가도 마냥 즐거운 것처럼 웃으면서 날아다니는 황금 사신.

수압으로 튕겨 날아오른 뒤 스카이다이빙을 즐기는 황금 사신.

황금 사신 워터 파크의 완성이었다.

나도 황금 사신과 같이 이리저리 휩쓸리면서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히드라의 파괴 조건은 <9개의 심장을 동시에 파괴.>였다.

꽤 명확한 조건이네.

문제는 심장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투명한 물로 이루어진 히드라의 몸통은 그 속까지 훤히 보였지만, 심장은 보이지 않았다.

***

문신투성이 여자는 히드라를 발견하자마자 숙소로 돌아가 동생을 깨웠다.

“언니? 갑자기 왜 그래?”

여자는 수정이 들어있는 가방 하나만 챙겨 들고 다급하게 말했다.

“빨리 나와. 지금 당장 대피해야 해.”

지면에서 느껴지는 진동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숙소를 나오면서 보게 된 것은 어딘가로 물줄기를 쏘아내는 히드라의 모습.

그리고 산을 꿰뚫는 거대한 파쇄음이 울려 퍼졌다.

목표로 한 적을 처리한 히드라는 이어서 호수 주변을 완전히 괴멸시켜 버릴 테니, 시급히 도망칠 필요가 있었다.

여동생과 함께 최대한 멀고, 높은 곳을 향해서 뛰어나갔다.

“언니, 저기 좀 봐봐. 물로 만들어진 괴물이 나타났어.”

어딘가 들뜬 것 같은 목소리를 내면서 뒤를 돌아보는 여동생.

푸른 달에 홀린 소녀는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여자는 그저 여동생의 손을 강하게 끌어당기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발걸음을 서두르면서도 어딘가 이상한 점을 계속 느끼고 있었다.

호수의 뱀이 어째서 이렇게 빨리 나타난 거지?

호수의 뱀은 호수가 정말로 위기의 상황일 때만 나타나는 녀석이기에, 너무 이상했다.

배신자의 오염은 이렇게 빠르게 진행되지 않으니까.

도대체 누가 뱀을 불러낸 거지?

적당히 안전해 보이는 언덕을 찾아서 올라가자, 그 원흉을 발견할 수 있었다.

평범한 시력을 가진 인간이라면 그 크기 차이 때문에 보기도 힘들 정도로 작은 오브젝트.

히드라와 비교하면 먼지처럼 작고 무력해 보이는 오브젝트.

그리고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오브젝트, 회색 사신이었다.

최고 위험 등급 오브젝트도 히드라에게는 속수무책인지, 태풍에 날아간 신문지처럼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었다.

1초 만에 갈기갈기 찢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회색 사신은 잘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버티기만 해서는 이길 수 없다.

혹시나 다른 누군가가 히드라를 물리칠 수도 있다는 희망은 빠른 속도로 사그라들었다.

이제 좀 더 멀리 도망가야 해.

최대한 멀리 도망간 뒤에 수정을 완성할 수밖에 없다.

“와, 언니. 저거 봐봐!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어.”

푸른 달에 홀린 여동생은 여전히 싱글벙글하였다.

수정을 챙기고 여동생을 부르려고 고개를 돌린 순간, 황금색 알갱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회색 사신보다 훨씬 조그마한 황금색 사신들.

본 기억이 있는 황금색이었다.

아!

테마파크를 집어삼킨 황금색 물결.

회색 사신이 테마파크를 파괴한 오브젝트였다니….

그 이후로 벌어지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여자는 멍하니 그것을 구경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황금색 물결에 히드라가 휩쓸릴 때마다 히드라의 크기가 줄어들었다.

마치 질량의 일부를 빼앗긴 것처럼.

황금색 물결은 변화 없이, 일방적으로 히드라의 크기만 줄어들었다.

계속, 끊임없이.

히드라가 황금색 물결에 물을 뿜고, 후려치고, 도망가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크에에에엑]

그리고 마지막 순간 서울 전역을 울리는 끔찍한 단말마와 함께 히드라가 사라져 버렸다.

“말도 안 돼.”

여자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목격하고는 손에 든 수정을 툭 하고 떨어트렸다.

“언니, 수정 떨어졌는데? 중요한 거라고 하지 않았어?”

이제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수정이었다.

***

심장이 보이질 않으니,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전신을 지워버리면 심장도 없어지겠지.

황금 사신을 최대한 불러 모아서 히드라를 겹치기로 날려버리는 계획이었다.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물리 면역이 없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싱겁네.

히드라가 사라진 호수는 여전히 고요하게 펼쳐져 있었다.

히드라가 끌어간 물이 죄다 사라져 버렸는데도 호수의 수위는 여전했다.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 호수라.

확실히 이런 점을 보면 양천구 호수는 오브젝트답긴 했다.

동굴 입구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한계에 달한 것 같은 인간의 기척이었다.

동굴 입구 쪽을 돌아보자, 본 기억이 있는 검은 양복의 남자가 소녀를 품에 안고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다.

황금 사신들이 잔뜩 몰려가서 슬퍼하고 있는 걸 보니, 크게 다친 사람이라도 있는 건가?

검은 양복의 남자는 동굴 밖으로 나와 천천히 걷다가 결국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진 남자의 등에는 커다란 바윗덩어리가 여럿 박혀있었다.

히드라가 갈아버린 바위 중 하나에 맞은 것 같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는 황금 사신들.

이럴 땐 막내가 필요하겠지.

푸른 사신을 허공에 풀어놓자, 금세 검은 양복의 남자를 발견하고는 치료를 시작했다.

<상처에서 돌멩이는 사라져 주세요.>

<상처는 나아주세요.>

<빨리 기력을 회복해 주세요.>

푸른 사신의 문자들이 빛으로 변하며 남자에게 빨려 들어갔다.

돌덩어리들이 저절로 빠져나가고, 상처가 천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금발 소녀는 이미 목숨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아무리 마법 같은 힘이라도 이미 죽은 사람을 살리지는 못하겠지?

중국 쪽 연구소에서 봤던 금발 소녀인데, 이렇게 죽어버리다니.

아쉬운 마음에 소녀를 쳐다보던 중, 이상한 기분이 느껴졌다.

왠지 이 소녀를 살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원에 던져두었던 불꽃을 토하는 심장을 꺼내 들었다.

콩콩.

작게 진동하는 심장을 소녀의 위에 살며시 올려놓았다.

붉은 심장은 원래 자리를 다시 찾아가는 것처럼 스르륵 소녀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역시 이 심장으로 살리는 게 정답이었나 보네.

켈록.

피를 토하며 숨을 쉬기 시작하는 소녀.

SDVIMVFoanVzY1YwSVhjamMzUkt1ZnpFOU4yZmlaUzBDRzVTcW1zWDJmbTdHeHJGd0U3UWpFTk5SeWNsNDFLag

다시 살아나서 다행이야.

나는 소녀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동굴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노파 대장이 나온 동굴이니까 뭔가 있겠지?

푸른 마녀의 거울이라는 게 발견되면 좋겠는데….

***

은은하게 빛을 뿜는 동굴 한가운데, 멋진 물웅덩이가 있었다.

천장으로 들어오는 밤하늘을 그대로 담아내는 잔잔한 물웅덩이였다.

물웅덩이를 발견하자마자 속으로 외쳤다.

이게 그 ‘푸른 마녀의 거울’이구나!

정확히 원형을 이루고 있으면서, 거울처럼 음각으로 장식이 되어있는 물웅덩이.

그런데 이걸 어떻게 부숴야 할까.

들어가서 물장구를 치면 되나?

여러 가지 방법들을 고민해 봤지만, 도저히 생각나는 방법이 없었다.

이거 완전 힌트도 없는 방 탈출 게임 같은데?

너무 어렵네.

나는 물웅덩이에 걸터앉아 물속에 발을 담그고 퐁당퐁당 물소리를 냈다.

이 물웅덩이는 신기하게도 아무리 난리를 피워도 잔잔했다.

우선 물장구로 파괴는 실패.

그다음에는 황금 사신을 한 마리씩 물웅덩이에 던져넣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만원 버스처럼 웅덩이를 가득 메운 황금 사신들.

거울처럼 쓰기 힘들 정도로 잔뜩 넣으면 될 것 같았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어서 실패.

그다음에는 우리 막내 푸른 사신을 불러서 물웅덩이를 가열하게 시켰다.

처음에는 황금 사신이 다친다고 안 하겠다고 했지만, 안 다친다고 설명해 주니 작업을 시작했다.

<가열되어 주세요.>

<전부 증발할 때까지 끓어올라 주세요.>

푸른 사신의 마법이 작용하자, 물웅덩이가 폭발적으로 끓어오르더니 천장으로 수증기가 폭발적으로 솟구쳤다.

황금 사신들은 수증기가 재미있는지 수증기 속에서 손을 흔들면서 즐거워했다.

이름하여 황금 사신 목욕탕!

하지만 파괴 판정은 뜨지 않고 실패.

이쯤 되니 저 물웅덩이가 정말 거울이 맞는지도 조금 모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생각하는 게 귀찮아진 나는 정원으로 현실을 침식시켰다.

그리고 양손을 활짝 펼쳐서 물웅덩이가 있는 공간 자체를 붙잡은 다음.

짝.

손뼉을 쳐서 공간 자체를 짓눌러서 삭제해 버렸다.

엄청난 양의 장작이 뭉텅이로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러고도 실패하면 너무 손해가 크다고 생각할 때쯤, 천장 위에 뚫린 구멍에서 변화가 생겼다.

푸른색 미니 달이 귀엽게 떠오른 것이다.

역시 몸이 튼튼하면 머리가 모자라도 된다니까.

히히.


           


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Artist: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