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7
메이스가 아드리의 얼굴을 내리 찍음과 동시에 저택 안을 떠돌아다니던 무수히 많은 물건들이 바닥에 널부러졌다.
이 패턴을 대충 네 번은 봤으니까 슬슬 쓰러질 타이밍인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방패를 치켜 든 채 기습을 대비했지만 아드리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 대신에 던전 바깥으로 나가는 문과 보상이 담긴 테이블이 모습을 드러냈을 뿐.
2페이즈도 이걸로 끝인가.
이대로 던전 바깥으로 나가게 되면 던전 공략은 끝이지만 난 아직 아드리를 구하지 못했다.
아직까지 해야 할 일이 몇 개 더 남아있다는 소리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어.
방 하나하나를 찾아다니며 공략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시간이 끌리더라고.
평범한 던전처럼 중간에 나오는 몬스터들을 스킵 할 수 있었다면 이 정도는 아니었을텐데.
이제는 시험 전에 잠을 잘 수 있을까의 문제가 아니라 시험이 시작되기 전에 시험장에 들어갈 수 있을까 말까의 문제가 되버렸네.
얼마나 시간이 지난건지 정확힌 모르겠지만 기숙사에 들어가서 씻을 시간은 있었으면 좋겠다.
<버틸만 하더냐?>
‘그럭저럭요.’
내가 버티지 못하더라도 내 스킬이 나를 강제로 버티게 만들어주니까.
무너지고 싶어도 무너질 수가 없거든요.
뭐 사실 이 정도는 스킬이 아니더라도 버틸 만 했을 것 같다.
이것과 비슷한 훈련을 알른 가문에서 지겹도록 해봤으니까.
포셀이 시키는 것들이 빡세기는 해도 확실히 무의미한 건 없네.
던전의 입구를 지나쳐 지난 번 이 저택의 던전을 공략했을 때 갔던 장소로 향했다.
그 곳의 철문은 굳게 잠겨 있었지만 비시에게서 받은 열쇠를 넣으니 무력하게 열렸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빠르게 끝내고 쉬러 가자고.
*
나는 사령술사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에는 이게 특이한 일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심지어 가문의 모든 사람들이 사령술을 사용하는데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여자아이가 그게 이상하단 걸 어떻게 알까.
처음 사령술을 배워서 펼쳐 보였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무척이나 기뻐하셨다.
내게 재능이 있다며. 가문을 빛낼 인재라며.
나를 껴안으면서 미소를 지어주셨다.
그랬기에 난 어머니와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 더 열심히 사령술을 익혔다.
보통 이런 이야기는 세상에 나오고서 자신의 이상을 알게 된 여자아이의 이야기가 될 터이지만 안타깝게도 난 살아있을 적에 내 이상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를 깨닫기도 전에 주신 교회의 기사단이 찾아와 우리 가문을 불태워 버렸으니까.
당시 어렸던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지도 모른 채 부모님의 손에 지하실에 갇히게 되었다.
일이 끝나면 구해주러 오겠다는 말과 함께.
나는 그 말만을 믿고 무작정 부모님을 기다렸다.
지하실의 생활 자체는 어려울 것이 없었다.
물도 있었고.
식량도 있었으니까.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 채 홀로 있어야한단 점을 빼면 사는데 지장은 없었다.
외롭기는 했지만 꾹 참고 견뎠다.
구원을 믿으며.
사령술을 공부해서 훗날 성장한 내 모습에 부모님이 기뻐하기를 바라며.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
반전은 없었다.
사령술사의 가문에서 태어났던 아이는 사령술사의 가문에서 외로히 죽었다.
그저 그 뿐인 이야기였다.
삐거덕.
문 바깥에서 들려온 소리에 아드리는 눈을 떴다.
어라. 분명 나는 방금 전에.
아드리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자신을 사냥하는 악귀의 얼굴이었다.
그녀가 어떤 공격을 하던 간에 너무도 간단히 피해버리던.
저주에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웃음을 짓던.
얄미운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도발하던.
그러면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머리를 뭉개버리던.
그 괴물의 모습.
여기. 여기로 오는 건가?
어떡하지?
어디로 도망쳐야 하는 거야?
애초에 도망치는 게 의미가 있나?
그 괴물이라면 분명 내가 어디로 가더라도 쫓아올 텐데?
그 년은 도대체 뭐야.
아드리는 그 자그마한 여자가 싫었다. 미웠다.
허나 그보다도 그 여자가 무서웠다.
자신의 상식을 부수어버리는 괴물이 두려웠다.
바깥에서 점차 커져가는 목소리에 몸을 떨던 아드리는 문득 그 얼굴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음을 깨달았다.
‘자.’
어라?
나 그 괴물을 알고 있었어?
어떻게?
그 사람은 우리 가문의 사람이 아니잖아.
사령술사와는 정반대에 서 있는 존재잖아.
그런 사람을 내가 어떻게.
혼란 속에서 머리를 잡아 뜯던 아드리는 문득 자신의 머리에 리본이 장식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이건 분명.
‘찾던 게 이거지? 가져가.’
…
그리고 나서 떠올렸다.
자신이 사령이 되고서 있었던 일들을.
아무런 연유도 모른 채 폐허가 되어버린 저택에 홀로 머무르던 일.
외로웠던 나머지 자신과 놀아줄 사람을 찾았지만 모두가 자신을 보고 도망쳤던 일.
그러던 어느 날에 나타나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었던 비시.
이 저택에 존재하던 던전을 없애주고 자신에게 리본을 선물해 주었던 여자아이.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든 아드리는 메이스를 어깨에 멘 채 여유로이 웃음을 흘리는 아이의 모습을 발견했다.
“루시…”
분명 비시는 저 여자아이를 보고 그렇게 말했었지.
자신의 이름이 불릴 줄은 몰랐던 걸까.
여자아이는 눈을 살짝 치떴다가 이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흐흥. 신기하네. 유령 할망구라 오래 전에 치매가 온 줄 알았는데 말이야.”
*
“누가 할망구라는 거야.”
아드리는 자신의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자주 보던 모습이었다.
투덜거림이 많은 성질 나쁜 여자아이.
그런 주제에 사령술사로써의 실력은 무척이나 뛰어나 유저에게 사령술을 가르쳐주던 NPC.
아드리.
언젠가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벌써 만나게 될 줄이야,
이게 다 우리 쪼잔 악신님의 은혜라고 해야 하나.
‘다 기억나세요?’
“외톨이 할망구. 다 기억났어?”
“그러니까 누가 할망구라는 거야. 이 빌어먹을 꼬맹아.”
나이를 언급해서 많이 화가 난 건 알겠지만 너 나이만 따지고 보면 할머니 맞지 않아?
내 전생이랑 현생의 나이를 모두 합해도 너보다 적을 테니까 충분히 그렇게 불릴 연배인 것 같은데.
그리고 있잖아.
네가 아무리 투덜거려도 난 어쩔 수 없다고.
메스가키 스킬이 널 할망구라고 부르는 걸 어쩌겠냐.
‘나가죠. 비시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만 투덜거리고 가자 할망구. 손녀 만나러 가야지.”
“그러니까… 하. 비시가 왜 널 싫어하는지 알겠네.”
아드리가 한숨을 쉬며 저리 말하는 걸로 보아 앞에선 못 할 말들을 저택에 와서 많이 내뱉었던 모양이다.
하긴 비시만큼 나 때문에 고생을 한 사람이 흔치 않으니 뒷담화를 좀 할 수도 있지.
“야. 꼬맹이.”
‘왜요?’
“뭔데. 외톨이 할망구.”
“오늘 이 안에서 있었던 일은 비시한테 비밀이다. 특히 나에 대한 건 더더욱.”
얼핏 들으면 영문도 모를 부탁이었지만 난 아드리가 왜 이런 부탁을 하는 지 알고 있었다.
이 사람 비시 앞에서는 내숭을 부리거든.
정확히 말하자면 이 던전의 쐐기가 되기 전엔 살아있을 적의 기억이 없어서 천진난만하게 다녔고.
모든 기억이 돌아온 지금도 비시의 앞에서는 천진난만한 체 하고 싶은 것이다.
그녀는 진지하게 비시를 친구로 생각하니까.
‘알겠어요.’
“알았어. 할망구가 오들오들 떨면서 부탁하는데 그 정돈 들어줄 수 있지.”
“내가 언제! 으!…”
나를 상대하는 게 답답한 지 가슴을 두드리는 시늉을 하는 아드리를 보고 있자니 그녀가 유령이라 다행이다 싶었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나이도 있는데 고혈압을 훅 갔을 게 분명해.
짧은 대화를 끝마친 후 나는 아드리를 데리고 방에서 빠져나왔다.
이전까지의 아드리는 이 던전의 보스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사령이 되고 난 후의 기억을 모두 되찾은 그녀는 하나 뿐인 친구를 소중히 여기는 투덜이일 뿐.
그러니 이제 던전 바깥으로 나가서 아드리를 비시에게 데려다 주기만 하면 이번 일은 끝이다.
이제 시험을 치러 가면 된다.
아직도 왜 자신이 할망구냐며 투덜거리는 아드리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정문에 도달한 순간.
– 띠링.
하는 소리가 내 귓가에 울렸다.
누구인지 의문을 품을 이유는 없었다.
내가 가장 안심하고 있을 순간에 엿을 먹이고 싶을 사람은 한 명 밖에 없지 않은가.
[아그라가 당신을 노려봅니다.]
안녕하세요. 쪼잔 악신님.
언제 오시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카데미 인근의 던전을 공략할 때까지 매일매일 저를 구경하던 스토커께서 왜 아무 짓도 안 하나 싶었는데 마지막을 기다리고 계셨던 거군요?
하여간에. 주신이건 악신이건 제대로 된 신이 없다니까.
아. 실수. 이번에 아르마디님은 제대로 일해주셨으니 빼는 게 맞겠네.
평소에 버릇이 돼서 나도 모르게 끼워 버렸다.
하여간 악신 새끼들은 다 악질밖에 없다니까.
내 앞에 메시지가 떠오르기 무섭게 던전 바깥으로 나가는 입구와 보상이 자취를 감추더니 저택의 정문에 갑옷을 입은 사령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들은 처음에 나를 가로 막았던 기사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피묻은 갑옷을 입은 이들은 저택의 기사들과는 격을 달리했다.
무기를 잡는 것도.
진형을 갖추는 것도.
나를 노려보는 눈빛도.
어느 하나 모자란 것이 없었으니 저들은 능히 베테랑이라 불릴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주신 교회의 좆같은 기사들이네.”
<쯧. 교회의 기사라는 자들이 악신에게 붙들려 사령이 되다니. 한심하구나.>
저 사람들이 이 가문을 습격한 주신 교회의 사람들인 거야?
어쩐지 내 메이스에 깃든 신성을 보고서도 물러서질 않더라.
– 신의 힘을 지닌 아이야. 사령의 앞에서 비켜서라.
– 세상에서 사령술사는 지워져야 할 존재이니.
– 비키지 않는다면 그대를 이단으로 여기리라.
이단? 내가?
말도 안 되는 헛소리가 들려와서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아르마디의 사도인 내가 이단이면 대체 주신 교회에 이단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냐.
내가 뭘 하든 간에 너희들이 하는 말보다 신의 뜻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을 걸.
“뭐래는 거야?♡ 허접 기사들♡ 신의 목소리도 들어본 적 없는 잡몹들 주제에♡ 건방져♡”
일단 질러 놓긴 했지만 저들을 쓰러트릴 수 있을 거란 확신은 없었다.
예전에 봤던 연금술사처럼 막막한 상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만만한 놈들도 아니란 말이지.
적어도 1대1이라면 한 번 이 악물고서 싸워 볼 생각을 해보겠는데 저 숫자는 무리다.
단체로 싸우는 법을 훈련 받은 기사들은 단순한 단체가 아니다.
저들은 여럿이면서도 하나인 악몽이다.
과거 알른 가문에서 훈련을 할 때 기사들이 뭉치면 어찌되는 지를 보았던 나는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저들이 마음을 먹는다면 나 하나 사냥하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겠지.
아무리 상성상의 유리를 점했다 하더라도… 지금은 무리야.
그렇지만.
음.
물러설 수는 없지.
밤새도록 그 개고생을 했는데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실패를 인정하라고?
미안한데 도저히 그건 못하겠거든?
난 치졸하고 쪼잔한 인간이라서 일방적으로 손해보고 물러설 생각이 조금도 없답니다!
그리 결정을 하고서 메이스를 치든 순간 저택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던 물건들이 하나 둘 허공으로 떠올랐다.
“꼬맹이. 도망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강단이 있네? 그건 칭찬해 줄게.”
뒤에서 들려온 아드리의 목소리에 난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아직까지 아드리는 이 던전의 쐐기다.
보스로써 지니고 있던 힘을 그대로 지니고 있더라도 잘못된 점은 없다.
없는데.
게임 속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진 적 없단 말야.
변수.
내가 이 세상에 들어오고 나서 매 순간마다 나를 위협했던 변수.
시도 때도 없이 나에게 엿을 먹였던 변수.
그 변수가 처음으로 내게 도움을 주려하고 있었다.
“뭘 봐. 건방진 꼬맹아.”
‘저한테 발리셨으면서 말이 많으시네요.’
“나한테 처발린 허접 할망구 주제에 허세부리긴. 늙어서 그런가 추하네.”
이럼 할 만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