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8
“…너 날 구해준 게 아니었다면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을 거야.”
아드리의 말을 들은 순간 가만 내버려두지 않으면 어쩌실 건데요. 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기껏 도와준다는 사람한테 더 도발했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으면 어쩌려고.
이미 도발을 해버린 것 같지만 참아주겠다니 말을 아껴야겠다.
…
어째 점점 스킬에 침식되어가고 있는 느낌이 든다.
이러다 나중에 스킬이 없어져도 무의식 중에 남들한테 허접소리를 하게 되는 거 아냐?
“빌어먹을 꼬맹이. 맨 앞에 있는 거나 맡아. 나머진 내가 처리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알겠어. 외톨이 할망구.”
맨 앞에 있는 거라면 내게 비키라는 이야기를 했던 이 기사를 이야기하는 건가.
<자연스레 짐을 떠맡겼구나.>
‘진짜요?’
<저 놈이 이 기사들의 우두머리다. 지휘관을 붙잡아 달라 이야기했단 거지. 무슨 소리인지 알겠느냐?>
알죠. 아무리 뛰어난 기사들이라 할지라도 중심을 잡아 줄 사람이 없으면 연계가 삐걱거리기 마련.
대부분의 이성을 잃어버린 사령의 경우엔 그 중요도가 더할 터.
그러니 아드리의 부탁은 내가 저 중에서 가장 강하고 귀찮은 우두머리를 붙잡고 있는 동안에 아드리가 잡몹들을 처리하겠단 소리였다.
오랫동안 구천을 떠돌아서 그런가 아주 영악하시네.
자기가 다 처리해줄 것처럼 폼을 잡아 놓고는 제일 무거운 걸 떠넘기다니 말이야.
그래도 이게 어디냐.
아드리가 없었다면 나 혼자 저 놈들을 모두 상대해야 했을 텐데.
방패를 치켜들고 사령기사들을 바라본다.
저들의 시선은 내가 아닌 아드리에게 꽂혀 있다.
그 이유는 기사들이 사령을 증오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와 동시에 아드리가 더 위협적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리라.
당연한 이야기다.
한 던전의 보스를 맡을 수 있는 사령과 방패를 들고 있는 자그마한 여자아이 중에 무엇이 더 두렵겠는가.
보통의 탱커라면 여기서 어그로를 끌지 못하겠지.
아드리에 비하면 내 존재감은 한없이 가벼우니까.
그렇지만 난 보통의 탱커가 아니다.
성능 하나만큼은 끝장나는 도발 스킬을 지닌 탱커지.
“허접 주신의 기사면서 쪼잔 악신에게 놀아나는 쓰레기들♡”
한 마디를 내뱉자마자 저들의 시선이 내게로 꽂힌다.
“폼 잡고 있으면 안 창피해?♡ 나 같으면 진작에 부끄러워서 자살했겠다♡”
– 치욕은 각오했다. 우리는 신의 뜻에 따라 세상에 존재하는 사령을…
“허접 주신을 말하는 거야?♡ 진짜?♡”
– 감히 주신의 이름을 더럽히다니!
아그라의 손에 놀아나면서도 아르마디의 이름을 잊지 않은 건가.
참 한심하고도 불쌍하네.
저렇게 성질을 내는 걸 보면 지금 자기가 진짜로 옳은 일을 하고 있다 믿는 거잖아.
“있지♡ 있지♡ 그거 알아?♡ 허접 주신은 사령을 싫어하지 않는다?♡”
– 무슨 헛소리를.
– 그걸 네가 어찌 아느냐!
“내가 허접 주신의 사도니까♡ 좆밥 기사들아♡”
너희들이 그토록 믿고 따른다 생각하는 허접 주신은 내가 아드리를 구하는 걸 망설이고 있자니 등을 떠밀었다.
그가 사령이란 존재를 싫어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겠지. 안 그래?
– 어디서 우리를 속이려 드는가!
“진~짜 멍청하네♡ 그런 병신이니까 악신한테 놀아나는 거야♡ 허접 지능♡ 신의 목소리도 못 들어 본 이단♡ 십자가 보면 정화 당하는 거 아냐?♡”
– 닥쳐라!
감정에 휩쓸려 맨 앞에 서 있던 기사들의 우두머리가 달려듬과 동시에 주변을 날아다니던 여러 물건들이 그 뒤의 기사들을 노린다.
본래라면 저에 대처하기 위한 방법을 우두머리가 지시했을 터이지만 지금 그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다.
그의 눈동자 안에는 내 얼굴만이 비치고 있으니까.
두 손으로 붙잡고 내리치는 검의 일격을 방패로 받아냈다.
확실히 강하긴 하네.
방패를 붙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어.
그렇지만 버틸 만 해.
이런 경험은 수도 없이 해봤으니까.
“너 기사단장 맞아? 차라리 오크가 주먹질 하는 게 훨~씬 강하겠다♡ 응?♡”
검을 상대하는 것은 내게 너무도 익숙한 일이다.
처음에 내가 방패를 들기 시작했을 때에 내 대련 상대가 되어 주었던 것이 칼이었고,
최근 나와 시도 때도 없이 대련을 하는 상대가 프레이였으니까.
둘 다 검술이라는 영역에선 드높은 재능을 지닌 이들.
그 녀석들을 상대로 방패를 들다 보면 말이야.
어중간한 검사를 만났을 때 자연스레 비교를 하게 되거든.
프레이였으면 지금 훨씬 더 세차게 몰아쳤겠지.
칼이었다면 오른 쪽의 빈틈이 내가 일부러 내어준 틈이라는 걸 눈치 채고 다른 곳을 공격했을 거고.
둘 중 어느 누구라도 내가 메이스를 휘두를 시간을 내어주지 않을 거야.
단적으로 말해서.
기사들의 우두머리의 검술은 두 사람에 비해 부족했다.
신체의 스펙만을 따진다면 프레이보다 한참 높고,
어쩌면 칼에 비견될 지경일 수도 있겠지만.
검을 휘두르는 기술이 모자라니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이딴 게 기사단장이라니♡ 옛날의 주신 교회는 얼마나 허접했던 걸까?♡”
– 닥쳐라!
“너 같은 허접 쓰레기를 믿고 따라 준 부하들한테 사과해♡ 너 같은 좆밥을 기사 삼아 준 교회에 사과해♡”
– 닥치라고 했다!
“화났어?♡ 그럼 어쩔 건데♡ 방패에 금 하나 못 내는 좆밥 주제에♡”
애초부터 프레이보다 검술의 기본이 부족하던 기사 우두머리다.
그런 그가 감정에 붙잡혀서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른다면 어찌 되겠는가.
당연히 검술 그 자체가 망가질 수밖에 없지.
지금의 그는 기사가 아니었다.
기술이라곤 조금도 없이 자신의 육신만을 믿고 내달리는 이에게 어찌 기사란 호칭이 어울리겠는가.
그는 마물이었다.
지성이 없는 주제에 그렇다고 신체능력도 애매한 좆밥 마물 말이다.
상대가 내리친 검을 방패로 밀어내며 메이스를 휘둘렀다.
퍼억!
상대의 갑옷이 아무리 튼튼하다 할지라도.
상대의 육신이 아무리 강건하다 할지라도.
그 존재가 사령인 이상 아르마디의 신성이 담긴 메이스의 앞에서 멀쩡할 수는 없으니.
기사는 자신이 얻어맞은 옆구리를 부여잡고서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푸훗♡ 신성에 얻어맞으니까 아픈가 봐?♡ 허접한 사령♡ 지옥에서도 안 받아 줄 쓰레기♡”
– 빌어먹을 년이!…
웃음을 흘리며 뒤편을 살피면 아드리가 펼치는 마법에 기사들이 하나 둘 무너지는 것이 보였다.
원래는 저게 정상이지.
이 저택 자체를 무기로 삼는 아드리는 단순히 숫자가 많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니까.
방금 전에는 상대가 나빠서 고생을 했지만 지금 저 기사들은 수만 많을 뿐 아드리의 패턴을 모르는 멍청이들이잖아?
지휘를 맡아 줄 기사단장이 있었다면 저들끼리 연계를 해서 저항을 해보았겠지만 그 기사단장님께선 지금 이글거리는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으니.
지휘를 잃어버린 오합지졸이 자기보다 강대한 상대에게 저항할 수 있겠는가.
아드리가 기사들을 괴롭히며 미소 짓고 있는 걸 보면 저 쪽은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처리가 될 테고.
내가 할 일은 그 전에 기사단장님을 박살내버리는 거겠네.
저 기사들이 다 쓰러질 때까지 버티기만 해도 충분할 테지만 그럼 아드리가 나한테 한 마디를 할 것 같거든.
숨을 들이쉬며 속으로 기도문을 외웠다.
신체의 능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수많은 신성 마법들.
아르마디의 신성이 내 몸을 감싼다.
<쓰러트릴게냐?>
‘그러려고요.’
<네 편한 대로 해 보거라.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게다.>
할배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속으로 그리 대답을 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다.
다시금 내게 달려드는 우두머리를 본다.
그의 검을 본다.
단조롭고도 정직하다.
노림수는 없다.
그저 감정에 치우쳐 마구잡이로 내지른 검.
저를 받아치는 건 너무도 손쉬운 일처럼 보였다.
방패를 앞으로 내밈과 동시에 철벽이 내게 무어라 이야기를 했다.
스킬이 고한 방법은 방금 전 내가 하고자 결정한 것과 완벽히 일치했으니.
나는 확신을 지닌 채 방패를 움직였다.
방패와 검이 부딪히고 어설프게 휘둘러진 검이 다시금 튕겨난다.
검이 위로 치켜 올라가며 드러난 빈틈.
그를 노려 방금 전 후려쳤던 옆구리에 다시 한 번 메이스를 꽂아 주자 우두머리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난다.
자. 어디 한 번 기사단장님의 내구성 테스트를 해볼까?
어깨를 후려침으로써 검을 떨어트리고.
얼굴을 후려침으로써 시야를 빼앗고.
중심을 잡으려 필사적인 우두머리의 복부를 걷어차 그를 넘어 트린 후에.
그 몸 위에 자리를 잡고는 우두머리의 머리를 내리 찍었다.
몇 번이고.
계속해서.
그 형체가 사라질 때까지.
그 끝에 우두머리의 육신이 무너져 재가 되어 사라진 후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기사들은 이미 아드리의 손에 쓰러진 뒤였다.
“야. 건방진 꼬맹이. 더럽게 살벌하네.”
그랬나?
나는 내가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없으니까 잘 모르겠는데.
“그래서 널 좋아할 남자가 있기는 하겠냐.”
‘괜한 걱정이시네요.’
“남자 손 한 번 잡아 본 적 없는 노처녀 할망구가 날 걱정해 주는 거야? 너~무 감동적이네.”
“야! 너 진짜!”
노처녀 할망구라는 단어가 마음 속 어딘가를 자극한 것인지 방방 뛰는 아드리를 지나쳐서 던전의 문으로 향했다.
이번 던전 공략의 보상은 사령기사단장이 사용하던 검인가.
이거 성능이 괜찮은 편이긴 하지만 나한테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야 나는 언젠가 다시 무기를 들 일이 없을 때까지 할배를 써먹을 생각이니까.
준종결급 무기가 손 안에 있는데 할배말고 다른 무기를 들 이유가 어디 있겠어.
뉴먼 가문을 경유해서 다른 곳에 팔아넘기거나 아니면 칼이나 프레이한테 선물이나 해줄까.
으음. 프레이한테는 어차피 나중에 전용 무기가 들어갈 테니까 줄 필요 없고 칼한테 짬처리 해야겠다.
검을 집어 들고서 아드리와 함께 바깥으로 나오니 저택의 벽에 기대어서 졸고 있는 비시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깨워도 되겠지만 그래서야 멋이 없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드리를 쳐다보자 내 의도를 눈치챈 듯 그녀가 입술을 굳혔다.
아드리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조심스레 비시의 옆에 다가섰다.
– 일어나요. 비시.
유령의 목소리에 느릿하게 눈을 뜬 비시는 아드리의 웃는 얼굴을 보고서 그를 꾹 껴안았다.
“아드리! 돌아왔구나!”
– 네. 저 분이 도와주신 덕이에요.
“저 분? 아! 알른 영애! 정말로 감사합니다! 진짜 감사해요! 다시는. 다시는 당신에 대해 나쁜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 소리는 예전엔 나쁜 말을 했다는 거지?
내 평판이 떨어지는 데 너도 어느 정도 기여를 했구나?
그건 좀 괘씸하네?
눈물 콧물 질질 짜고 있는 여자애한테 차마 뭐라 할 수가 없으니 지금은 넘어가겠지만.
나중에 연신 고맙다는 말을 내뱉는 비시를 지나쳐 아드리 쪽을 살피니 그녀의 입가가 부들부들 떨리는 게 보였다.
안에서는 제 성격대로 말하고 다니다가 비시 앞에서 내숭부리려니까 힘들지? 응?
걱정 마. 네 비밀을 지켜주긴 할 테니까.
언제까지 컨셉충 짓을 할 수 있나 구경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거든.
그런 생각을 담아 슬며시 웃어준 나는 저택 바깥이 이상할 정도로 밝은 것을 보고 멈칫했다.
‘비시.’
“들러리 영애.”
“네!”
‘지금…’
“지금 몇 시야?”
“지금이… 8시 47분이에요!”
<여아야. 오늘 네 첫 시험이 9시라 하지 않았느냐?>
미친. 미친. 미친. 미친.
좆됐다.
감동적인 재회고 나발이고 신경 쓸 때가 아냐.
이러다가 시험 시간에 늦게 생겼다고!
‘저 먼저 갈게요!’“허접들! 나 먼저 간다?!”
“네?!”
– 알른 영애?!
부서진 2층 창문을 넘어 저택에서 빠져나온 나는 다급히 시험 장소를 향해 달렸다.
지각으로 실격당하는 것만큼은 피해야 해!
이번 시험에는 허접 주신이 내어 준 퀘스트가 걸려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