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커다란 보름달과 작은 붉은 달과 푸른 달.
3종류의 달이 둥실둥실 떠오른 하늘.
누워서 보는 까만 밤하늘에는 반짝이는 별이 가득했다.
“당연히 죽었을 줄 알았는데….”
금발 소녀는 약간 잠긴 목소리로 혼잣말했다.
조금 불편한 것을 제외하면 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날카로운 날붙이로 심장을 한 번에 꿰뚫린 것 같은 가슴팍의 상처도 사라졌다.
불편한 점은 두 가지, 입속에 남아 있는 약간의 피 냄새.
그리고 거친 질감의 자갈이 등 뒤로 느껴져서 조금 아팠다.
누군가가 금발 소녀의 손을 단단하게 쥐고 있어서,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에는 검은 요원이 앉아 있었다.
걱정과 염려가 새겨진 얼굴을 한 검은 요원.
소녀는 그 얼굴을 보자, 안도감이 마음속을 퍼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소녀와 남자는 서로의 얼굴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불편하지만은 않은 침묵이 지나간 뒤, 검은 요원은 소녀를 품 안에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바스락거리는 자갈밭 위를 천천히 걸어 나갔다.
소녀는 요원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아저씨.”
“괜찮습니다.”
약간 답답한 목소리로 소녀는 말을 이어갔다.
“이제 어떻게 하죠? 심장의 인도를 따라왔지만, 역부족이었어요.”
“분명 방법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도움을 줄 법한 녀석을 찾아가 보기로 하죠.”
“아, 설마. 그 노란색 양복을 입은….”
소녀의 뇌리에 화려한 색깔의 노란 양복을 입은 남성이 떠올랐다.
“네, 그 녀석이라면 분명 도움을 줄 수 있을 겁니다.”
소녀의 기억에 노란 탐정은 약간 신용하기 힘든 인상이었지만, 그런 의문을 덮어둔 채 남자의 의견에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아저씨의 조언이 틀린 적은 없었으니까.
금발 소녀는 검은 요원의 품에 얼굴을 숨기고 살포시 웃었다.
***
말세다.
미니 사신 정원에 말세가 도래했다.
미니 사신 정원에 누워서 과자들을 집어 먹다 보니 묘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기 몸통만큼 커다란 푸른 모자들.
황금 사신들에게 푸른 사신 스타일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디를 둘러봐도 물로 만들어진 커다란 모자를 쓰고 다니는 황금 사신들이 하나쯤은 보이고 있었다.
모자를 쓰고 당당히 정원을 걷는 황금 사신과 그걸 부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는 황금 사신들.
그러면 모자를 쓴 황금 사신은 자기 모자를 부러워하는 사신에게 씌워주며 헤실헤실 웃었다.
모자를 받은 사신은 나름대로 멋지다고 생각하는 자세를 취하고, 주변에서는 짝짝 박수.
푸른 사신이 마법으로 만든 모자라서 그런지, 원본과 달리 1시간 정도 지나면 물로 돌아가는 마녀 모자였지만 그것만으로도 황금 사신들은 즐거워 보였다.
아직은 나처럼 뭔가를 입는 것을 불편해하는 황금 사신이 좀 더 많았지만, 점점 뭔가를 입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황금 사신이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이러다가 다들 모자를 쓰는 것을 넘어서 옷이나 신발까지 착용하게 되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조만간 푸른 사신에게 옷이 얼마나 불편한 것인지 알려줘야겠어.
이대로라면 황금 사신이 나쁜 버릇이 들어버릴지도 몰라!
옴뇸뇸.
마녀 모자를 가지고 신나게 노는 황금 사신을 보면서 폭신한 케이크를 조금씩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도중, 미니 사신이 쓰기에는 너무나도 커다란 마녀 모자가 시야 한구석에 나타났다.
둥실둥실 공중을 날아서 움직이는 마녀 모자는 어느새 내 앞에 도착해서 내려앉았다.
푸른 사신이 천천히 다가와서 내 얼굴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뭐지?
푸른 사신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뭔가 바라는 표정으로 나를 계속 쳐다보기만 했다.
설마 저걸 써달라는 건가?
푸른 사신과 눈을 맞대길 몇 초, 내가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자 푸른 사신은 허공에 문자열을 수놓기 시작했다.
<커다란 모자를 만들었어요!>
그래, 그래. 잘했어.
나는 잘했다는 마음을 담아서 푸른 사신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기쁜 듯한 표정을 짓는 푸른 사신이었지만 좀 지나자, 고개를 갸웃하면서 물어왔다.
<모자…. 안 써주시나요?>
음.
불편해서 싫은데.
내려다보니, 마치 울 것 같은 표정의 푸른 사신.
물리 면역도 없는 약한 막내니까 어쩔 수 없지.
나는 커다란 모자를 들어서 머리 위에 툭 하고 올려놨다.
내가 모자를 쓰자, 푸른 사신은 활짝 웃으면서 좋아했다.
쓰고 보니 너무 크고, 그리고 엄청 불편했다.
모자챙이 이불로 써도 될 정도로 넓은데?
당장이라도 벗고 싶었지만, 주변에서 구경하던 황금 사신들까지 몰려와서는 놀기 시작했다.
커다란 모자챙에 주렁주렁 매달려서 웃으면서 좋아하는 황금 사신들.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좋아하는 푸른 사신.
미니 사신들이 너무 좋아하니, 불편해도 1시간이 지날 때까지만 참아야겠지.
<멋져요!>
<귀여워요!>
<어울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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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를 만들어서 가져온 푸른 사신은 내 무릎 위에 올라타서 온갖 어휘로 칭찬 세례를 퍼붓고 있었다.
나에게 무한히 호의적인 미니 사신에게 듣는 말이라도,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 정도의 칭찬 세례였다.
이거 설마 내가 계속 옷을 입게 하려고 세뇌 중인 건 아니겠지?
***
트리니티 제3 연구소의 지하 깊숙한 곳, 기괴하게 비틀린 지하 실험실이 있었다.
제3 소장의 허가를 받은 사람만 들어올 수 있는 실험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제3 소장이 말하는 ‘진화’된 인류만이 들어올 수 있는 실험실이었다.
제3 연구소에 전체적으로 깔린 석유 냄새가 이 지하 실험실에는 코가 마비될 정도로 짙게 깔려 있었다.
이 냄새는 실험실 구석구석 달라붙어서 떨어질 것 같지 않을 정도였다.
깜빡이는 형광등 불빛이 비치는 이 지하 공간은 마치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실험실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커다란 유리관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는데, 각 유리관은 기괴하게 비틀려서 이미 죽어버린 생명체들을 보관하는 투명한 석관처럼 보였다.
물론 여전히 움직이는 생물들도 있었지만, 그것은 이미 생물이라고 부를 수 없는 상태였다.
어떤 생명체는 탁한 액체 속에서 떠다니며 섬뜩한 고요함을 자아내고, 어떤 생명체는 유리에 달라붙어 기괴한 실루엣을 드리웠다.
그 유리관을 살피면서 돌아다니는 연구원들도 정상은 아니었다.
팔다리는 뒤틀리고 반투명한 피부 사이로 장기가 비춰 보이는 괴상한 인간들.
그런 뒤틀리고 미쳐버린 영역에서 미간에 깊은 주름을 새긴 채, 사나운 표정을 지은 제3 연구소장이 있었다.
“이번에도 성공하는 게 당연한 일이 실패했군.”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소장의 목소리는 탁자를 앞에 두고 서 있는 사람들을 물어뜯는 것처럼 들렸다.
소장의 말에 트리니티 보안대 복장을 한 남자가 대답했다.
“실패할 수밖에 없죠. 소장님은 회색 사신을 너무 얕봅니다. 그렇게까지 무시하는 이유가 뭡니까?”
“이유야 당연히 있었지. ‘회색 사신’의 존재 자체가 내 승리의 증거였으니까. 하지만 이렇게까지 실패하는 꼴을 보면 내 판단이 틀렸던 것 같군.”
소장은 표정을 지우고 담담한 표정으로 명령을 내렸다.
“회색 사신이 가장 큰 변수인 것을 인정하고, 지금부터 최우선 목표로 설정한다.”
보안대 복장을 한 남자는 소장의 결정에 감탄했다.
“드디어!”
“회색 사신 처리 계획은 간단하지. 우선 회색 사신을 제3 연구소로 이관시켜서 홈그라운드에서 확실하게 처리한다. 그전까지 회색 사신에 대한 데이터를 확실하게 검토하도록.”
소장의 지시를 묵묵히 듣고만 있던 실험실 가운을 입고 있는 여자가 답했다.
“그러면 오브젝트 협회를 통해서 대여 형식으로 잠시 이관받을 수 있도록 계획을 잡겠습니다. 소장님.”
보안대 복장을 한 남자는 입이 찢어져라 웃으면서 즐거워했다.
“드디어 회색 사신이랑 제대로 싸워보겠군요. 아무리 특급 오브젝트라도 제3 연구소에서 싸우면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이것으로 회의를 마친다.”
제3 연구소장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회의는 끝이 났다.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가 텅 빈 회의실의 구석, 자그마한 보라색 소라게가 유리관 안에서 잠들어 있었다.
***
해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 늦은 밤.
금발 소녀와 검은 요원은 탐정 사무소 앞에 도착했다.
“아저씨, 조금 긴장되네요. 정말 괜찮을까요?”
“믿을만한 녀석이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아가씨.”
똑똑.
탐정 사무소의 문을 두들기자, 안에서 노란색 정장을 갖춰 입은 남자가 튀어나왔다.
“어서 와, 친구. 기다리고 있었어. 환영회를 하려고 후배들도 기다리고 있었지.”
노란 탐정 뒤로 탐정 사무소 직원들이 보였다.
직원은 총 3명이었는데, 모두 여성이었다.
커다란 망치를 닦고 있는 사람.
머리 위에 두 개의 황금뿔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리고 10살도 채 되어 보이지 않는 소녀.
금발 소녀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소녀를 보고는 검은 요원의 등을 콕콕 찔렀다.
“아저씨,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초등학생을 직원으로 부리는 탐정 사무소?
금발 소녀는 왠지 수상쩍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