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9
아카데미의 입학생들은 서로 간의 연대감이 뚜렷하지 않다.
서로 같은 년도에 입학한 아카데미의 학생이라는 마음은 가지고 있지만 그 뿐.
같은 교실에 앉아 같은 사람들끼리 계속 수업을 듣는 게 아니라 여러 교실을 옮겨 다니며 자신이 바라는 수업을 듣다 보니 같은 학년이라는 연대가 생기기 어려운 것이다.
친한 사람은 신경을 쓰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겐 자연스레 무관심해질 수 밖에.
그렇다 보니 누군가가 결석을 하더라도 교수가 그를 신경 쓸 뿐 학생들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허나 아침 9시 역사학의 중간고사 시험이 시작되기 직전 그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한 사람의 공백을 느끼고 있었다.
현재 소울 아카데미의 1학년 중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내뿜고 있는 백작 영애.
루시 알른이 여태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다.
기이한 일이었다.
그녀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수업에 빠진 일이 없었다.
수업을 들으러 와서는 칠판을 보는 시간보다 책상을 보는 시간이 더 많기는 했지만 분명 꾸준히 참여를 하긴 한 것이다.
그런 그녀가 왜 갑자기 시험에 나타나지 않은 걸까.
좋은 것보다 안 좋은 것들이 더 많기는 했지만 항상 소문의 한 가운데에 있던 루시 알른이다.
여러 학생들이 그에 의문을 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왜 안 온 걸까?
이번 시험을 잘 칠 자신이 없는 게 아닐까?
부정한 수단을 사용하려다 못 쓰게 되니까 도망친 걸 거야.
아파서 시험을 못 친 척 하려고 하는 거라고?
그러고 보면 어제 기숙사감님이 루시 알른을 찾아 헤맸어.
어제 기숙사에 없었어?
또 무슨 이상한 일을 벌이려고.
학생들의 수근거림 속에서 문이 열리더니 역사학 교수가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와 자글거리는 주름을 지닌 그는 지팡이를 짚고서 느릿하게 교실 안으로 들어오더니 학생들을 둘러봤다.
“없는 사람이 있네요?”
교수가 말하는 사람은 지금 학생들 사이에 언급되는 사람과 동일했다.
그가 루시 알른이 없는 이유를 아는 건 딱히 그가 모든 학생들의 얼굴을 외우고 다니는 열성적인 교사여서가 아니었다.
단순히 자신을 틀딱 교수라고 부르는 당돌한 백작 영애의 모습이 자연스레 뇌리에 남았을 뿐.
망명 높은 역사학자인 그가 다른 이에게 틀니가 딱 어울리는 늙다리 노친네라는 모욕을 들어볼 일이 어디 흔하겠는가.
“무슨 사정이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시험은 시험이니까요. 지각을 하더라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콰앙!
역사학 교수가 원칙대로 해야 한다는 말을 이어가던 중 뒤편의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투를 겪고 오기라도 한 듯 상흔이 남아 있는 갑옷.
등에 메어져 있는 어지간한 남성의 몸통보다도 커다란 방패.
급하게 달려온 듯 마구잡이로 뒤엉킨 머리카락.
루시 알른.
방금 전까지 이 교실에서 화제의 중심이 되었던 사람은 거친 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리고는 교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알른 영애? 그 모습은 대체.”
방금 전까지 무언가 전투라도 하고 온 듯한 모습에 역사학 교수가 당혹스러워하며 말을 꺼냈지만 루시 알른은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뭔가요? 틀딱 교수님.”
“시험을 치르는 데 갑옷을 입고 온 이유가 뭡니까?”
“갑옷을 입으면 안 된다는 규정은 없잖아요? 아 혹시 섬망이 오셔서 오락가락하신가요? 그게 아니라면 문제 될 건 없는 것 같은데요.”
역사학 교수는 입술을 꾹 씹었다.
할 말이야 많았다.
아무리 규정에 없다 하더라도 예의와 상식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시험을 치르는 자리에 전투를 위한 복장을 입고 와 다른 학생들을 위협하는 게 말이 되느냐.
이외에도 따지고 들려면 따질 것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렇지만 역사학 교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괜히 한 마디를 더했다가는 수 마디의 독설을 들을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점 더 감수성이 깊어지고 있는 역사학 교수는 당돌한 학생과 말싸움을 하며 마음의 상처를 더하고 싶지 않았다.
“빈자리에 앉으세요. 조금 있다가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
‘저기 죄송한데요…’
“들러리. 필기구 남는 거 있지? 네 허접한 필기구를 내가 특별히 써줄 테니까 내놔.”
“ㄴ…넵!”
내 앞에 앉아 있는 학생의 친절한 협력으로 펜을 구한 나는 건틀릿을 벗어 옆에 놔둔 후 기지개를 켰다.
흐으. 진짜 시험에 지각하는 줄 알았네.
우리 허접 주신이 아카데미 시험에서 1등하라는 퀘스트를 줬는데 하마터면 그걸 날려먹을 뻔 했잖아.
그게 평범한 거였으면 몰라도 인벤토리를 주는 귀중한 퀘스트인데 그럴 수는 없지.
인벤토리 기능을 쓸 방법이 무궁무진하다고.
지금 같은 경우에도 인벤토리가 있었다면 갑옷을 벗고 교복을 입을 수 있었을 거 아냐!
그러면 지금처럼 ‘뭐 하다 오신 거지?’‘뭐 박살내고 온 거 아냐?’‘무서워.’‘차라리 오지 말지.’ 같은 수군거리는 소리를 안 들어도 될 테고!
하아. 다른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고 신경 끄자.
그보다 로그 기능을 켜서 시험 내용을 미리 펼쳐 놔야지.
합법적으로 컨닝을 할 수 있단 사실에 웃으며 로그 창을 열었던 나는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문장으로 가득한 로그를 보고서 멈칫했다.
허접♡
좆밥♡
쓰레기♡
병신♡
할망구♡
로그 창 안은 어제 아드리의 저택에서 일어났던 전투와 그 와중에 일어났던 대화의 내용들로 가득했던 것이다.
어?
어어어어?!
설마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다급히 로그창을 올린 나는 그 맨 위에 적혀 있는 ‘좆밥 기사주제에♡’ 라는 단어를 보고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말도 안 돼.
아니 이건 이상하잖아.
어제 저녁부터 밤 동안 하루 종일 전투를 지속했다고 해서 로그 창이 가득 차버리다니!
내가 읽어두었던 역사 교과서의 내용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건데!
이 허접한 로그창아!
내가 필사적으로 기록해 두었던 공부의 내용을 돌려줘!
게임 속에서 무능하고 쓸모없는 기능이었다고 현실에서까지 무능한 쓰레기로 남을 거야?!
인생의 패배자로 남을 거냐고!
이럴 때라도 쓸모가 있어야 할 거 아냐! 이 쓰레기 기능아!
<여아야. 왜 그러느냐?>
‘…할아버지. 저 좀 살려주세요!’
할배에몽! 나 좀 살려줘!
나 이러다가 시험을 치르는 게 아니라 역사학 시험지를 가지고서 도박을 해야 할 것 같아!
물론 그래도 어느 정도 점수는 나오겠지만 아카데미 중간고사에서 1등을 차지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확신할 수 없단 말야!
그러니까 도와줘! 할배에몽!
<그러게 평소부터 공부를 해왔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 아니냐.>
‘그치만.’
<그치만이고 나발이고 본인은 그대를 돕지 않겠다 이야기 했을 터. 그대의 업보다. 달게 받거라.>
안돼에에에. 할배에몽.
나에게 모질게 굴지 말아줘요!
내가 잘못했어요!
다음부터는 이러지 않을 게요! 제발요!
내가 간절히 빌었지만 쪼잔스러운 할배에몽은 단호했다.
아직까지 화장실 변기에 처박힌 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거에요?
그 날로부터 며칠이나 지났는데 전설적인 성기사라는 양반이 그거가지고 툴툴거려서야 되겠습니까?!
젠장.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 역사학 시험은 다이스 갓에게 맡기자.
아그라의 저주를 하나 더 해주하면서 지난 번 시험보다 운 수치가 올랐을 테니 평균보다 더 높은 점수가 나오기는 하겠지.
역사학 시험은 그걸로 만족하고 다른 시험에서 높은 성적을 받는 걸로 하자.
그리 각오를 하고 속으로 필기구의 각 면마다 번호를 지정해주고 있으려니 할배가 슬며시 목소리를 냈다.
<한 가지만 약속하면 내 그대에게 도움을 주마.>
‘…뭔가요?’
<이번 시험이 끝나면 기초부터 제대로 공부를 하는 것이다.>
이에에에에! 할배상!
시험 점수를 걸고서 내가 가장 귀찮아하는 걸 조건으로 걸다니!
실제 사악한!
이 세상에 붓다는 존재하지 않는가!
없긴 하지!
우리 허접 주신님이 신이랍시고 뻣대고 있는데 하늘의 자비를 어찌 기대할까!
<어떠냐?>
‘알겠어요.’
잠시 고민을 하긴 했지만 대답이 나오는 것은 빨랐다.
안 그래도 기초 정도는 익혀 두는 편이 괜찮다고 생각을 하는 중이었고.
밤중에 마력을 늘리는 훈련을 하며 할 일도 필요했으니까.
분명 지루하고 재미없는 일이 되겠지만 그래도 한 번 해보긴 해야지.
<약속한 게다?>
‘걱정마요. 지킬 테니까.’
제가 애초부터 거부를 하긴 해도 한 번 꺼낸 말을 안 지키지는 않거든요.
무너지지 않는 의지도 있으니까 어떻게든 시작만 하면 계속 공부를 할 수 있을 거에요.
아마도.
<좋다. 그럼 우선 1번 문항이다. 솔라딘 왕국의…>
*
자칼은 한 쪽 구석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여자아이의 모습을 살폈다.
피곤에 찌든 눈가.
입이 헤벌려진 허술한 얼굴.
긴장감이라고는 하나 보이지 않는 자그마한 여자아이.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으면 어디 장식장에 들어가 있는 인형처럼 보이기도 하는 겉모습만큼은 아름다운 꼬마.
루시 알른.
입을 다물고 있으니까 그나마 봐줄만 하군.
입이 열리기 시작하면 재앙이 펼쳐지지만 말이야.
자칼은 이전의 사건으로부터 꽤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루시 알른을 싫어했다.
자신의 천재적인 재능을 믿고서 마구잡이로 행동하는 것이 마음 속 어딘가를 자극해서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제멋대로 콧대를 세우지 못할 것이다.
듣자 하니 그녀는 이번 학기에 수업을 듣는 동안 제대로 수업을 들은 적이 없다시피 하다더군.
더욱이 개인적으로 공부를 하는 모습을 본 자도 없다고 했다.
아무리 루시 알른이 뛰어난 이라 할 지언정 책 한 번 제대로 펼치지 않고 제대로 된 성적을 거둘 수 없을 터.
저 자는 이번에 자신의 방만함에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자신이 무시하던 이들에게 뒤쳐졌을 때 저 자가 어떤 얼굴을 지을지 궁금하군.
크흐. 그 날이 오면 어찌 비웃어 주어야 할는지.
“다음! 알른 가문의 루시 영애! 그리고 켄트 가문의 프레이 영애!”
두 학생의 대련이 끝난 후 전투학 교사 안톤이 다음으로 시험을 치를 사람을 지목했다.
안톤의 목소리가 꽤 컸음에도 불구하고 루시 알른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평소에 게을렀던 대신 어젯 밤을 세워가며 공부라도 한 것인가.
그 불성실함을 자칼이 한심하고 생각하고 있던 때에 프레이 켄트가 루시 알른에게 다가가 그녀의 뺨을 꾹 눌렀다.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루시 알른에 무례를 저질렀단 사실에 주변의 학생들이 경악했지만 정작 프레이 켄트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일어나.”
프레이 켄트가 재차 뺨을 찌르자 루시 알른이 눈을 떴다.
루시 알른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프레이 켄트의 몸을 덮쳐 그녀를 깔아뭉개고는 그 위에 올라타 주먹을 치켜들었다.
상대에게 저항할 틈조차 주지 않는 완벽한 기습.
넘어지며 충격을 받았을 터인데도 프레이 켄트는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고 평소와 같은 목소리를 냈다.
“아직 대련 시작 안 했는데.”
그제야 정신을 차린 루시 알른은 눈을 끔뻑이며 그 위에서 비켰다.
사과의 말은 없었다.
“진짜 성격 더럽다.”
“아무리 잠에서 깬 게 기분 나빴다지만 저건 너무 하지 않아?”
그를 본 학생들이 무어라고 수근거렸지만 자칼은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저건 단순한 화풀이가 아냐.
그보다는 무의식적인 반응에 가깝지.
알른 가문의 기사는 대체 어떤 훈련을 받기에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것인가.
경악스럽군.
괜히 대륙 제일의 기사 가문이 된 것이 아니란 거겠지.
루시 알른이 비킴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난 프레이 켄트는 자기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입을 열었다.
“루시.”
“뭔데. 허접 검사.”
“내가 선공 가져가도 되지?”
“맘대로 해.”
그녀는 방금 전 공격을 당했단 사실보다 선공을 거머쥐었단 사실에 기뻐하는 모양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