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1
‘그걸 어떻게?’
“얼빵 영애. 그걸 어떻게 알아? 스토커야? 극혐. 징그러워.”
“이미 소문이 다 났습니다. 알른 영애.”
소문?
분명 나 어젯밤에 아무에게도 안 들키고 바깥에 나갔을 텐데 이야기가 나돌 게 있나?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조이가 손바닥으로 미간을 꾹 눌렀다.
“어제 기숙사감님이 영애께서 사라졌다고 한소리를 하셨답니다.”
아 맞다.
어제 저녁 즈음에 바깥에 나갔으니까 기숙사감이 내가 없어진 걸 알아챘겠구나.
그걸 기점으로해서 소문이 퍼진 건가.
크게 문제될 건 없다.
기숙사감이 잔소리는 하겠지만 그 뿐.
백작 가문의 영애인 나에게 뭔가를 할 수는 없으니까.
만약 나한테 벌을 주려 한다 치더라도 아카데미에서 일어났던 여러 사고를 읊어주면 알아서 진압될 걸.
내가 여태까지 겪은 사고가 어디 한 두 개던가.
나한테는 이럴 권리가 있어!
내가 여태까지 아카데미로 찾아오려는 베네딕을 달랜다고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나크라드한테 죽을 뻔 했을 때 나한테 아카데미 따위 졸업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없으니 그냥 돌아오라고 그랬다니까?!
아카데미에서 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어서 가까스로 말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대신 요즘에는 매일 수정구로 연락을 건다고.
만날 조금만 더 통화하자면서 달라붙는 징그러운 아저씨를 상대하는 건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야. 진짜.
“그 뿐만이 아닙니다. 오늘 아침에 뒷골목에서부터 아카데미로 달려오는 영애님을 보았다는 분도 계시고. 여기저기 잔상처가 남은 갑옷을 입은 채 시험을 치러 온 걸 봤단 학우님들도 넘쳐납니다. 알른 영애께서 지난밤 기숙사에 있지 않았다는 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란 거죠.”
무덤덤하게 읊어지는 팩트의 나열 속에서 나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다는 소리는 내가 어제 기숙사에 없었다는 걸 아카데미의 모두가 알고 있단 소리겠네.
하아. 또 어떤 괴상한 소문이 퍼져나가려나.
먹잇감을 던져주면 바로 물어뜯을 생각을 하는 게 이 아카데미의 사람들이니까.
정직하게 선동과 날조로 승부하는 걸 보고 있자면 저기에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하나 싶더라.
그나마 요즘엔 조이나 아서가 중간에 끊어줘서 덜하지만.
“그러니 답해주시죠. 어제 무얼 하고 오신 건가요?”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지?
아카데미의 시험에서 일어날 재난을 막아내고 왔어요?
이건 너무 정신나간 소리 같으니까 빼고.
친구를 도와주고 왔어요?
나한테 조이말고는 친구가 없잖아.
이것도 패스.
뒷 세계의 사람들과 거래를 하고 왔어요.
이건 괴소문이 퍼지는 데에 박차를 가할 것 같으니까 안 되고.
그럴 듯한 이야기를 짜내려 눈을 굴리고 있자니 조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말해주기 곤란한 거에요?”
곤란하다고 해야 하나.
말을 해줘도 안 믿을 일을 하고 왔다고 해야 하나.
악신의 사도가 아카데미의 시험을 망치기 위해 만들어낸 던전을 공략하고 왔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납득가게 설명을 해주냐고.
그 과정을 다 본 게 아니라면 헛소리라고 생각할 게 분명한데.
“그럼 이렇게 물어볼게요. 나쁜 일은 아니죠?”
‘당연히 아니죠!’
“난 얼빵 영애처럼 험악한 사람이 아니거든? 당연히 아니지.”
“그거면 됐어요.”
더 캐물으면 어쩌나 고민을 하고 있었지만 조이는 생각보다 순순히 물러섰다.
“당신이 헛된 일을 하실 분은 아니니 믿죠. 대신 다음번에 무언가 일을 할 땐 말이라도 하고 가주시겠어요? 저 엄청 걱정했거든요?”
어깨를 으쓱이며 미소 짓는 조이의 얼굴을 본 순간 난 진지하게 눈물이 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조이! 그거 반칙이잖아!
내 최애캐가 나를 걱정해줬다니!
흑! 너무 감동이야!
어떡하지. 방금 그 말 녹음할 수는 없나?
로그의 맨 윗줄에 평생 박제해 두는 것도 불가능한가?
속으로 잔뜩 호들갑을 떨고 있던 나지만 겉으로 드러난 반응은 도도했다.
메스가키 스킬은 그런 호들갑이 메스가키에게 어울리지 않다 판단한 것 같았다.
조이를 끌어안고서 방방 뛰고 싶단 생각을 했지만 메스가키 스킬이 취한 행동은 전혀 달랐다.
메스가키 스킬은 나의 손과 입꼬리만을 움직였다.
웃음을 가리려는 척만을 하는 손동작과 얄미운 입술.
‘정말 고마워요! 조이!’
“흐응. 걱정했다고? 겁쟁이에 허접인 얼빵 영애를 지켜 줄 사람이 없어서 불안해 한 건 아니고?”
“제가 그 정도로 겁이 많진 않습니다만.”
조이는 여느 때와 같은 내 모습을 보고는 안도한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다른 영애들이 있는 쪽으로 돌아가 버렸다.
나와 같이 아카데미 던전을 공략했기에 시험을 치를 이유가 없는 조이가 왜 여기에 있나 했더니 다른 영애들에게 조언을 해주고 있었구나.
정말 외모와는 다르게 정말 착한 사람이라니까.
조이도 떠났겠다 이제 원래 하려던 일을 시작해볼까.
‘할아버지.’
<안 그래도 탐색하고 있었다. 기다려 보거라.>
게임 스토리대로라면 마도구를 사용한 그 학생은 당시에 붙잡히지 않는다.
곧이어 일어난 소란 때문에 마도구를 사용한 흔적이 사라져버린 탓도 있지만 그 마도구 자체가 악신의 권능을 지녀 감지하기 어려운 것이 근본적인 문제였다.
허나 내게는 그 사람을 찾아낼 방도가 있다.
메이스 겸 고성능 탐지기인 할배에몽이 있으니까.
던전에서도 가까운 것부터 저 멀리에 있는 마물의 흔적까지 잡아내는 할배다.
마와 관련된 일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 날카로운 후각을 지닌 그에게 마도구가 사용되는 걸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렵잖은 일일터.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지금 네가 서 있는 곳에서 동북 방향. 예전에 네가 밀어 넘어트렸던 아이. 보이느냐?>
얼마 있지 않아서 할배가 마도구가 사용된 흔적을 찾아낸 것이다.
할배가 이야기해준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나무 뒤편에 서서 검은 돌을 보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영애가 보였다.
저 애 기억난다.
지난번에 내가 조이를 만나러 양호실에 가려는 데 내 앞을 막아섰던 애였지.
이름이… 뭐였더라.
조이 주변에서 여러 영애들을 이끄는 입장이었던 것만큼은 기억하는데.
메스가키 스킬은 뭐라고 불렀지.
그것도 기억 안 나.
으으음. 뭐 알바인가?
지금 중요한 건 나를 무척이나 싫어하고 나에 대해서 여러 안 좋은 이야기를 퍼트리던 영애의 약점을 내가 붙잡았다는 거지.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영애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지금 몸에 쌓여있는 피로가 싹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벌써부터 입꼬리가 주체가 안 되네.
어떤 식으로 갑질을 하면 좋을까.
아무런 죄책감 없이 메스가키짓을 해도 되는 거잖아.
메스가키 스킬.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네 목에 달린 족쇄를 풀어주도록 하겠다.
어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해봐.
시험 삼아서 가장 많이 내뱉을 단어를 입에 담아 볼까?
“허~접♡”
준비는 완벽해.
자. 가자고.
완벽한 사유와 명분을 가지고서 저 영애를 괴롭히러.
*
젠장. 왜 안 되는 거야.
이 돌에다가 마력을 흘리면 나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소란이 일어날 거라고 그랬잖아.
그리고 그 소란 속에서 루시 알른이 상처를 입을 거라면서!
왜 아무런 일도 안 일어나는 건데!
마력을 흘려 넣고 있잖아!
작동해! 작동하란 말야!
빨리 루시 알른 그 시건방진 년에게 벌을 내리라고!
악신이라는 놈이라면 그 정도는!
“야.”
속으로 검은 돌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던 애버리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돌을 감추었다.
“좆밥 영애♡ 여기서 음침하게 뭐 하는 거야♡ 생긴 것처럼 행동하기로 결심 했어?♡”
귀를 찌르는 듯한 얄미운 웃음소리를 들은 순간 애버리는 고개를 들지 않았음에도 자길 찾아온 사람이 누군지를 알 수 있었다.
“알른 영애.”
지금 그녀가 가장 증오하는 사람.
그녀에게서 그녀가 가장 좋아하고 선망하는 사람을 빼앗아 간 썅년.
고갤 든 애버리는 자신의 아래에 있으면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웃음기 서린 눈동자에 입술을 씹었다.
“무슨 일이시죠?”
“혼자 뭐 하고 있나 싶어서?♡ 아! 너 혼자 아카데미를 왕따 시키기로 한 거야?♡ 어울린다~!♡”
루시 알른이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들을 때마다 가슴 속 깊은 곳에 있는 무언가가 끌어오르는 느낌이 들었지만 애버리는 애써 그를 억눌렀다.
지금 이 곳에는 파트란 영애님이 계신다. 내가 루시 알른에게 소리치는 걸 그 분이 보신다면 분명 싫어하실 거야.
그래선 안 돼.
난 그분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은 걸.
“하. 왕따는 그 쪽이겠죠.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 영애면서.”
“아닌데? 나 친구 있는데?”
“또 거짓말을.”
“난 조이한테 사랑 받고 있거든♡ 응?♡ 음침한 너랑은 다르게 말야♡”
“그건 다 당신!…”
끓어오르는 분을 참지 못하고 애버리가 목소리를 높인 순간 루시 알른이 손을 뻗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애버리는 필사적으로 그 손을 떼어내려했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사가 되기 위한 훈련을 거듭하고 있는 루시 알른의 완력을 마법사 지망생인 애버리가 이길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당혹 속에서 치뜬 애버리의 눈을 본 루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얄미운 웃음을 지었다.
“진정해 좆밥 영애♡ 음침한 쓰레기 악신을 믿는 좆밥이란 걸 광고하고 싶어? 관심병이야? 기분 나빠~♡”
그걸 어떻게.
애버리의 눈동자가 황망히 흔들림에 따라 루시의 입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흘러 나온다.
아냐. 아닐 거야.
그냥 던진 말일 거야. 아카데미의 교수들조차 알아채지 못한 이 마도구를 루시 알른 같은 꼬맹이가 어떻게.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해?♡ 그 돌. 허세 멀대가 준 거잖아. 아~ 현실부정 중인 거야?♡ 악신의 아래에 기어 들어간 좆밥 영애답네♡ 진짜 멍청하다니까♡”
허세 멀대.
누군가를 지칭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애버리는 그 사람이 누군지를 알 것 같았다.
애버리에게 검은 돌을 건네준 자.
스스로를 어둠이라 불러달라던 남자.
애버리에게 여러 정보와 함께 저 돌을 건네주었던 이.
루시 알른은 무작정 애버리를 위협하기 위해 말을 꺼낸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알고서 확신을 가진 채로 애버리에게 온 것이었다.
“머리가 굴러가?♡ 좆밥 영애?♡”
너 지금 낚싯줄에 걸린 거야.
루시 알른이 입을 풀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애버리는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했다.
내뱉을 수 없었다.
아직 학생이라 한들 애버리도 사교계를 오랫 동안 다녔던 귀족이다.
최소한의 정치적 감각 정도는 존재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결코 붙잡혀서는 안 될 이에게 결코 붙잡혀서는 안 될 약점을 붙잡힌 애버리는 순해져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자가,
주신 교회와 친분을 가지고 있다 알려진 이 자가 여느 때처럼 얄미운 웃음을 지으며 애버리를 화형대 위로 올려버릴 테니까.
“조~용히 이야기 할 수 있는 곳으로 갈까? 돼지가 꿀꿀대더라도 괜찮은 곳으로 말야♡”
“…네.”
애버리에게 허락된 일이라곤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