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니티 연구소의 차갑고 견고한 철창 안에서 한 남자가 깊은 후회 속에 잠겨있었다.
그는 조용히 자신을 꾸짖었고, 머릿속은 자책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한때 신뢰와 과학적 우수성의 정점이라고 믿었던 트리니티 연구소에 딸을 데려온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자책의 태풍이었다.
회색 사신을 너무 보고 싶어 하는 딸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고자 했을 뿐인데, 이런 일이 되어버리다니.
회색 사신을 가장 안전하게 볼 수 있는 타이밍이라고 생각하고 회색 사신을 구경하기 위해서 예약까지 하고 왔건만….
지금 그와 그의 딸은 겁에 질린 수많은 사람을 가두는 철창 속에 갇혀 있는 신세였다.
이런 암울한 상황 속에서 두려움으로 가득 찬 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괜찮아. 괜찮을 거야.”
남자는 최대한 두려움을 억누르고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위로를 전했다.
남자는 평소 밝던 딸의 얼굴이 공포로 인해 어두워진 모습을 보니, 다시 한번 후회가 밀려왔다.
오브젝트와 관련된 사람들은 믿을 수 있는 놈들이 없건만!
“지금 이거 납치, 감금이에요!”
“너희들 지금 큰일 난 거야! 내가 누군지 알아?”
현재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분노하는 사람들.
남자의 주변은 다른 사람들의 항의와 탄원의 불협화음으로 가득 찼다.
그는 두려움에 떠는 딸을 꼭 끌어안으면서 생각했다.
수감된 피해자들의 항의와 분노는 지금 상황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 뻔하다고.
실제로도 이 주변을 서성거리는 연구소 직원들은 이런 항의에 신경조차 쓰는 기색이 없었다.
이런 대담한 납치극을 일으킨 사람들에게 저런 위협이 과연 통할까?
자신의 정체를 숨기지도 않고 당당히 돌아다니는 직원들을 보면, 한 가지 나쁜 예감이 들었다.
단순 강도도 얼굴을 본 목격자를 죽이는데, 트리니티 연구소 직원들은?
당연히 살인 멸구를 노리고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겠지.
오히려 저들이 풀어준다고 말해줘도, 믿지 못할 상황이었다.
그의 뇌리에는 중앙 연구소 붕괴 당시 밝혀진 수많은 비리가 떠올랐다.
살인 교사, 시체 은닉 그리고 오브젝트의 먹이로 던져진 부랑자들.
온갖 끔찍한 일들이 뇌리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중앙 연구소라는 끔찍한 사례가 있었는데, 트리니티라고 믿었던 게 큰 실수였다.
남자의 바로 옆에서 천둥 같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당신! 내가 당신 얼굴 기억했어! 여기서 나가게 되면 넌 끝장이야. 이놈아!”
그 말소리는 공기가 밀려나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사나운 기세를 품고 있었다.
남자가 고개를 돌려서 확인해 보자, 그곳에는 근육질의 화통한 노인이 있었다.
그 노인의 얼굴은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얼굴색이 새빨갛게 변할 정도로 분노한 노인은 천둥 같은 목소리로 위협을 계속해 나갔다.
소리를 지르면서 웃통을 벗어서 연구원들에게 집어던지기까지 했다.
그 고함은 이제까지 계속 무관심했던 연구원들의 태도를 바꾸는 촉매가 되었다.
지금까지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던 연구원들이 갑자기 행동의 변화를 보인 것이다.
그들의 눈동자는 번들거리는 광채로 빛이 났고, 얼굴에는 기묘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남자의 원초적인 보호 본능이 솟구쳤다.
남자는 손을 뻗어 딸의 손을 단단히 잡고는 군중 사이를 파고들었다.
연구원들의 꺼림직한 시선으로부터 피하고자 사람들 사이로 숨어든 것이다.
딸을 품에 꼭 껴안고, 군중 속에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갑자기 태도가 변한 연구원들은 노인에게 천천히 다가섰다.
그리곤 마치 정육점의 고기를 품평하듯이 지켜보더니, 뒤를 바라보며 동료들에게 말했다.
“이 사람들 전부 다 살려둬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아?”
“어? 어어어.”
그와 동시에 사람들 사이에서 공포와 당혹감이 마구 번져나갔다.
저들의 섬뜩한 말 때문이 아니었다.
연구원의 팔이 인간의 그것이 아니라 괴물의 것처럼 변했기 때문이었다.
날카로운 손톱이 달린 흉측한 팔이 노인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으드득.
뼈가 이리저리 갈리고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노인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뱉으며 목숨을 구걸했지만, 그대로 목이 꺾여 죽어버렸다.
이제 트리니티 직원들이 평범한 연구원으로 보이지 않았다.
아니, 인간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악의와 굶주림으로 뒤틀린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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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으로 이리저리 뒤틀린 신체.
끔찍한 괴물들이었다.
인제야 살아 돌아갈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철창 안이 조용해졌다.
고요 속에서 퍼져나가는 공포와 당혹감 그리고 절망.
공포가 사람들을 좀먹어 들어갈 때, 남자는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그의 딸이 바닥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것이다.
“아빠, 사신이 나타났어요!”
남자의 딸은 주변에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어떤 한 곳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 분위기에 동화되어서 공포에 빠지지 않은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사신이라니?
소녀는 바닥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앞에는 엄청 조그맣고, 푸른색을 띤 사신이 있었다.
***
여자는 격리실에 들어서자마자 회색 사신을 볼 수 있었다.
그 유명한 회색 사신이 눈앞에 있었지만, 특별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한국에서 가장 위험한 오브젝트.>
<특급 위험도의 오브젝트.>
수많은 악명을 가진 존재였지만, ‘특급 오브젝트’ 특유의 압도적인 아우라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사나운 기세도 없고, 주변을 짓누르는 거대한 질량감도 없었다.
이게 ‘한국 최고 위험도의 오브젝트’?
무언가의 착오가 아닐까, 싶어질 정도였다.
회색 사신은 주변 환경에 거의 무관심했다.
이쪽을 보고 있었지만, 시선은 공허했다.
얼굴은 무표정했고, 자기 앞에 무엇이 있든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약해 보여도 조심해야겠지.
여자는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농축된 진화액이 들어있는 병을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그리고 진화액을 한 모금 마시면서 말했다.
“마셔라. 회색 사신.”
여자의 말을 듣고는 회색 사신의 공허한 눈동자에 약간의 관심이 서렸다.
여자가 화면을 켜자, 커다란 화면에 어떤 철창 속 장면이 비쳤다.
죽은 남자의 시체와 공포에 빠진 사람들이 갇힌 철창이었다.
“네 녀석이 인간을 아낀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이 진화액을 마셔라. 마시지 않는다면 저 인간들을 한 명씩 죽일 것이다.”
연구소 분석에 따르면 회색 사신은 최소한 상황을 이해할 지능을 가지고 있거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인간을 아끼는 회색 사신은 이 진화액을 마실 수밖에 없겠지.
그 어떤 오브젝트도 침식시키는 진화액이니, 마시는 순간 승리는 확정되는 것이다.
여자는 반복해서 진화액을 마시면서, 회색 사신에게 진화액을 마시라는 시늉을 했다.
자, 이 답이 없는 상황에서 어쩔 거냐?
하지만 회색 사신의 반응은 여자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회색 사신은 여전히 시큰둥한 표정으로 여자를 보고 있었다.
아직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여자는 핸드폰으로 명령을 내렸다.
“인질 한 명을 죽여. 지금 당장!”
이해할 때까지 반복하면 짐승이라도 알아듣겠지.
명령을 들은 연구원들이 진화한 본신을 드러냈다.
화면에 비친 연구원들은 천천히 철창을 향해 다가가더니.
사방에서 뿜어져 나온 물줄기에 갈기갈기 찢겨버렸다.
“!!!”
도대체 뭐지?
이해할 수 없는 사태에 회색 사신 쪽을 돌아봤더니, 회색 사신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고되지 않은 새로운 능력인가!
인질극은 실패로군.
하지만 쉬운 길이 없어졌을 뿐,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었다.
“모두 나와서 회색 사신을 죽여!”
격리실의 양쪽 벽이 열리고, 진화한 연구원들이 들어섰다.
뇌수술을 받아 공포가 거세된, 소모품으로 쓰이는 병사들이었다.
정식 연구원들에 비하면 재생력도 없고 약하지만, 숫자가 많고 충분히 강한 녀석들이었다.
회색 사신은 병사들을 보자, 약간 놀란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뭐지?
병사들을 보고 놀랐다고 하기에는 조금 반응이 이상한데?
충성스러운 병사들은 여자의 명령을 따라서 회색 사신에게 그 흉악한 발톱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빙글빙글 돌고 박수 짝.
그때 회색 사신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그리고 이해하기 힘든 결과가 튀어나왔다.
한 바퀴 빙글 회전하는 회색 사신을 공격하다가, 서로를 공격하고 쓰러지는 병사들.
처음은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아귀 전투 때에 보고된 능력이었지만, 그때는 지형을 파괴하는 정도에 그쳤었으니까.
연구소 분석에서도 오브젝트에 영향을 직접 줄 수 없는 반푼이 능력으로 취급했었다.
회색 사신이 우측으로 두 번 뛰고, 바닥을 콩.
그러자 4발로 쫓아가던 병사가 견고한 전선에 휘감기며 목이 뚝 하고 부러졌다.
병사들은 회색 사신의 장난스러운 몸짓에 스러져 갔다.
말도 안 돼, 이런 능력이 오브젝트에게 통하다니!
회색 사신이 박수를 두 번 짝짝 치고 전선을 손가락으로 꾹.
그러자 천장에서 전선이 폭발하듯이 튕겨 나오며 남은 병사들을 전기로 지져버렸다.
순식간에 십여 명의 병사들이 죽어버렸다.
병사들은 여전히 회색 사신에게 달려들고 있었지만, 여자는 뒤로 슬금슬금 물러섰다.
병사들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회색 사신의 시선은 대상을 보는 것 같으면서도 다른 무언가를 보는 것만 같았다.
본능의 영역에서 느껴지는 꺼림직함이 전신을 잠식하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이성으로 억눌러도, 불안함이 가시질 않았다.
도대체 회색 사신의 시선에는 뭐가 비치고 있길래?
여자는 뒤로 돌아서 정신없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시간을 끌어야 해.
보안대로 도망가자.
그곳이라면 시간을 끌 수 있겠지.
저 괴물을 죽이려면 소장님만이 희망이야!
짝짝.
콩콩.
박수 소리와 발 구름 소리만으로 병사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면서 여자는 정신없이 도망가기 시작했다.
***
연구원들은 무언가의 연락을 받더니, 철창 내부의 사람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연구원들은 겉모습조차 인간의 탈을 벗어 던진 괴물이 되어버렸다.
모두가 끝장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정체불명의 문자열이 허공에 나타난 것이다.
<물로 만든 바늘 100개!>
미세한 물줄기가 날아가서 연구원 하나를 너덜너덜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물로 만든 바늘 1,000개!>
<물로 만든 바늘 10개!>
푸른 사신들은 아름다운 문자열을 허공에 수놓으며 연구원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연구원들은 끈질겼다.
아무리 다쳐도 재생하면서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숫자도 너무 많았다.
주변의 건물에서 연구원들이 끊임없이 몰려나오고 있었다.
푸른 사신 10기로는 도저히 막아낼 수 없는 숫자였다.
그러자 푸른 사신 10기가 모여서 커다란 문자열을 허공에 수놓았다.
<세상에서 제일 강한 엄마 골렘!>
<골렘!>
막대한 양이 물이 허공에서 뭉치더니, 지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5m 높이의 거대한 회색 사신 모양 물 덩어리가 포효했다.
“크아아앙!”
그리고 회색 사신 골렘은 막대한 질량과 속도로 연구원들을 피떡으로 만들었다.
<엄마 강해!>
<강해!>
주변을 모두 정리한 골렘은 다시 우렁찬 고함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