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 사신 정원 중심부에서 비밀스러운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황금 사신들이 회색 사신의 눈을 피해 장난스러운 계획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함정을 만들듯이 깊은 구덩이를 파는 황금 사신들.
황금 사신들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땅을 파다가도 서로 눈을 마주치면 키득키득 웃었다.
그 구덩이의 위치는 푸른 사신이 정교하게 계산한 위치였다.
회색 사신이 미니 사신 정원으로 입장할 때 튀어나오는 곳 바로 밑!
그곳에서 구멍 함정을 만드는 황금 사신들은 평소보다 훨씬 즐거워 보였다.
황금 사신들은 서로 장난스러운 미소를 주고받으며 은밀한 작전의 스릴로 눈을 반짝였다.
황금 사신들의 작업은 어린아이들의 장난처럼 천진난만했지만, 그 결과물은 노련한 장인이 만든 것처럼 정밀함이 돋보였다.
평소처럼 평온한 미니 사신 정원에서는 회색 사신은 모르는 귀엽고 은밀한 음모가 점점 진행되고 있었다.
***
으 끈적끈적해.
나는 온몸을 뒤덮은 검은 점액을 유령화로 털어내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트리니티에서 나에게 내어 준 격리실은 완전히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뭐, 트리니티 연구소는 처음부터 나를 처리할 생각으로 부른 것 같으니까 당연한 결말이었다.
악취를 풍기는 오브젝트는 정말 순식간에 처리할 수 있었다.
뚜방뚜방.
도망간 여자를 천천히 쫓아가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사실 격리실에서 오브젝트들이 습격해 왔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다.
물론 습격한 오브젝트들이 특별하거나 강하다는 의미에서 놀란 것이 아니었다.
오브젝트면서 파괴의 궤적이 보여서 깜짝 놀란 것이다.
보통 오브젝트는 ‘눈’으로 봐도 파괴 조건만 보일 뿐 실행 방법을 알려주진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오브젝트에게도 그 파괴의 궤적과 방법이 보이기 시작했다.
<3초 뒤에 박수 두 번 치고, 백 텀블링하면 건물이 무너짐.>
이런 방법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원래 오브젝트는 송파구 아귀 때처럼 주변을 파괴해서 영향을 주는 방법이 한계였는데 말이다.
그래서 너무 신을 냈더니, 주변이 완전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아마, 요즘 오브젝트를 냠냠하다 보니 힘이 너무 세져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게 아닐까 싶었다.
물론 확실한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냥 트리니티 잡졸들이 너무 약한 거일 수도 있으니, 다른 오브젝트에게도 보이는지 실험해 봐야겠지.
여자를 쫓아서 움직이다 보니 차단벽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쿵쿵.
격벽들이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굉음과 충격파를 뿌리면서 바닥에 내리꽂혔다.
그 소리는 거대한 강철 턱이 닫히는 소리 같았고, 연구소의 분위기가 일변하는 신호탄이었다.
비상등이 붉은빛을 흩뿌리며 빙글빙글.
붉은 비상등은 춤추는 듯한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격벽으로 쪼개진 공간들을 한층 불길한 분위기로 바꿨다.
비상등과 함께 울리기 시작한 시끄러운 부저음이 강철 벽 사이를 메아리치며 울려 퍼졌다.
밝게 빛나던 복도는 이제 음침한 붉은 빛으로 뒤덮였고, 격벽으로 잘게 찢어져 이질적으로 변화했다.
이제 척 보기에도, ‘트리니티 연구소 비상사태’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기기 시작했다.
오, 왠지 격리 픽션에서 괴물이 탈출한 연구소를 보는 것 같네.
신기해.
여자의 기척을 쫓아서 가다 보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열려. 열리란 말이야!”
차단벽 근처에서 콘솔을 열고, 뭔가를 조작하는 여자가 보였다.
***
갑자기 연구소 전체가 차단되었다.
연구소장님은 아직 누워 계실 테니, 분명 그 남자의 짓이다.
보안대장, 그 재수 없는 남자의 짓이겠지.
탁, 타닥.
손가락으로 콘솔을 두드리는 소리가 긴장된 공기 속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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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더 신경질적으로, 더 강하게 두드리는 소리는 점점 커지는 여자의 불안감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처음에는 감시 카메라를 향해서 제발 열어달라고 사정했었지만, 지금은 포기한 상태였다.
그 남자는 열어줄 생각이 아예 없는 것이 분명했다.
“열려. 열리란 말이야!”
뒤에서 그 능력의 정체를 가늠할 수 없는 괴물이 쫓아오는데!
저런 괴물과 싸우고 싶지 않아.
싸우는 건 연구원 말고 보안대가 하란 말이야!
마치 이곳에서 낭비하는 1초마다 수명이 마구마구 잘려 나가는 것 같았다.
절로 식은땀이 흐르고 점점 초조해졌다.
정체불명의 한기가 그녀의 깊숙한 곳까지 파고드는 것 같았다.
공포가 그녀의 정신을 몰아붙이고, 갉아먹고, 혼란스럽게 했다.
마치 괴물이 등 뒤까지 쫓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후우, 침착하자.
여자는 눈을 감고 마음을 차분하게 내려 앉혔다.
병사들을 금방 죽일 수는 없을 거야.
병사가 100마리도 넘으니까 최소한 300초, 5분의 여유가 있어.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트리니티 부소장답게,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여자의 두근두근 뛰던 심장은 점점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래, 이제 차분하게 차단문을 열자!
여자는 차분한 마음으로 눈을 떴다.
“꺄아아아아악!”
그리고 여자는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콘솔 모니터 자리에, 회색 사신의 머리가 돋아나 있었다.
기묘한 웃음을 띤 회색 사신의 모습을 보고 여자는 기절할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고, 숨은 짧고 가쁘게 몰아쳤으며, 심장은 흉곽을 뚫을 것처럼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여자는 침착함은 어디론가 내팽개쳐 버린 채 뒤로 돌아서 허겁지겁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아하아.
하지만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패닉에 빠진 채 정신없이 도망가다 보니 막다른 골목에 부딪혀 버린 것이다.
치명적인 실수였다.
여자는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가슴을 부여잡고, 공포를 삼키며 왔던 길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붉은 비상등이 빙글빙글 돌면서 복도를 비춰주고 있었지만, 그 불길한 불빛 아래에 회색 사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따돌린 건가?
그런 희망적인 생각을 떠올린 순간, 붉은색 조명 아래 회색 사신이 귀신처럼 불쑥 튀어나왔다.
어두운 그림자에 잠겨 고개를 푹 숙이고 서 있는 회색 사신.
“!!!”
붉은 조명의 회전에 맞춰.
한 칸씩.
한 칸씩.
발걸음을 옮기지도 않는데도, 마치 유령처럼 가까워져만 갔다.
패닉에 빠진 여자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손으로 몸을 뒤로 밀었다.
“싫어. 안 돼. 오지 마.”
하지만 금세 벽이 그녀의 등을 막아 세웠고, 회색 사신은 깜박거리면서 여전히 다가오고 있었다.
피할 수 없어!
여자는 공포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아. 하아.
거친 숨소리가 어둠과 적막 속에서 홀로 들려왔다.
한참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너무 겁을 먹어서 환각을 본 건가?
여자가 이런 의구심을 안고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회색 사신의 작은 발 두 개.
“아…. 안 돼.”
그리고 고개를 드니 보이는 것은 이제 놀 만큼 놀았다는 표정으로 주먹을 날리는 회색 사신의 모습이었다.
***
머리가 사라진 여자의 시체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오, 제2 페이즈인가?
아귀 아종의 1.5배 치고는 너무 겁이 많고 약하게 느껴지기는 했다.
여자의 파괴 조건은 아귀 아종과 동일한 <재생력의 고갈.>이었으니까 이 정도에 죽지는 않겠지.
“하, 하하하하.”
마구잡이로 갈라지고 찢어지는 목소리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시체에서 터져 나왔다.
“무섭지않아무섭지않아”
퍽 소리를 내면서 바닥을 내리치는 거대한 칼날.
악취를 풍기면서 끓어오르는 시체를 찢어발기듯이 거대한 칼날로 이루어진 오브젝트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아귀 아종보다 딱딱해 보이고 강해 보이긴 했다.
게다가 ‘눈’에서 유발된 공포를 완전히 떨쳐낸 것처럼 보여.
과연 얼마나 강할까?
***
트리니티 연구소의 시설 제어실.
첨단 설비들이 어지럽게 놓여있는 그곳에서 보안대 복장을 한 사람들이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대장님. 유도 작업이 끝났습니다.”
“음, 그래. 좋아.”
트리니티의 부소장을, 격벽을 이용해서 유도하는 작전을 지시한 보안대장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이래도 되는 걸까요? 부소장님을 미끼로 쓴다니….”
“괜찮아, 괜찮아. 부소장은 연구소에 하등 필요 없는 존재니까. 그냥 충성심이 투철하고 진화액 적성이 높아서 부소장 된 거니까 말이야.”
보안대장은 비웃는 듯한 미소를 띠고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럼, 이제 회색 사신 테스트를 시작하지. 유령화 방해 주파수 실험부터 시작해.”
“네! 알겠습니다.”
보안대장은 진지한 표정으로 다짐하듯이 말했다.
“소장님이 안 계시니까, 우리는 우리의 본분을 다해야겠지. 처치하면 좋고, 데이터라도 최대한 쌓아보자고.”
***
철창 안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여전히 감금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철창 주변을 벗어나려고 하면 저 파란색 미니 사신들이 단호한 표정으로 못 가도록 길을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사람들의 분위기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와, 나비다!”
“나도, 나도!”
사방에서 울리는 아이들의 소란스러운 웃음소리 덕분이었다.
가족 단위로 놀러 온 관람객들이 많아서 그런지 아이들이 상당히 많았는데, 푸른 사신들이 여러 가지 마법으로 아이들을 즐겁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빛나는 나비가 날아다녀요!>
<커다란 비누 거품이 나타나요!>
정체불명의 문자열들이 하늘을 수놓으면 꺄르륵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퍼져나갔다.
그리고 적들을 강력한 힘으로 제거한 거대한 물 덩어리 사신은 지금 바닥에 누운 채,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어있었다.
“말랑말랑해!”
아이들은 거대한 물 골렘 위에 올라서서, 폴짝폴짝 뛰고 있었다.
이름하여, 거대 회색 사신 트램펄린!
납치까지 당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즐거운 분위기가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