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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5

다은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넓네….”

유스티나가 다은에게 제공한 손님용 방은 상당히 컸다.

나무로 만들어진 침대 헤드가 번들번들 빛이 났다.

다은이 손을 대자 만질만질한 나무의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런 걸 손때라고 하던가?’

헤드를 매만지며 생각에 잠긴 다은.

어떤 것이든 오래 쓰면 그렇지 않겠냐마는, 나무를 써서 만든 가구는 유독 손때가 잘 타는 느낌이 들었다.

다은이 만지고 있는 번들거리는 빛바랜 침대는 많은 사람의 손이 닿고, 오랜 세월이 흘렀다는 증거였다.

청결을 중시하거나, 새로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기겁하고 도망갈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다은은 그런 부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좋고 싫음을 따지면, 다은은 오히려 이런 가구에 더 정감이 가곤 했다.

“낭만 있잖아. 뭔가 고즈넉한 느낌도 들고.”

마당 딸린 전원주택에서, 손때가 탄 흔들의자에 앉아 바깥을 바라본다.

짧게 자란 잔디가 바람에 흔들리고, 이따금 들려오는 새의 지저귐이 한줄기 빗방울이 되어 삭막한 마음을 부드러이 어루만져 주는.

-그런 평화로운 삶을, 다은은 바랐다.

한국에서 길 가던 사람에게 ‘어떤 집에서 살고 싶어요?’라고 물으면, 아마 열에 다섯 정도는 다은과 비슷한 대답을 하지 않을까?

아파트에 사는 게 익숙한 이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봐왔던 영화나 드라마, 만화 속 전원주택에서의 삶은 그들의 이상으로 자리 잡기에 충분했으니까.

실제로 살아본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마당을 비롯한 시설 관리도 힘들고, 벌레를 무서워하면 절대 살 수 없을 거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전원주택은 많은 이들의 이상으로 남아 있었다.

비록 다은이 지금 있는 방은 그런 전원주택은 아니었으나, 가구와 방 곳곳에 묻어 있는 세월의 흔적은 그녀의 취향에 꼭 들어맞았다.

눈에 띄는 화려함은 없어도 이곳에 머무를 손님을 신경 써서 만든 방이었다.

“이거 봐.”

다은이 손가락으로 가구를 쓸었다.

보란 듯이 들어 보인 그녀의 손가락은 먼지 한 톨 하나 묻지 않고 새하얀 빛깔을 유지하고 있었다.

“찾아 올 손님이 없다는 걸 알면 그냥 내버려둘 법도 한데, 이렇게 깨끗한 걸 보면 꾸준하게 관리했나 봐.”

언젠간 일상을 되찾을 수 있을 거란 믿음이었을까?

그렇게 다은이 시청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방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똑똑.

“네에! 잠시만요!”

벌컥!

노크 소리에 다은이 문을 열자 무뚝뚝한 인상의 남자가 그녀를 반겼다.

“…마을 안내를 원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아, 맞아요! 혹시 당신이…?”

“….”

남자가 말없이 끄덕였다.

‘과묵한 사람이네.’

아주 잠깐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다은은 그의 성격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과묵하다는 게 무례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아니, 어쩌면 생전 처음 보는 인간이 낯설 법한데도 남자는 어색함이나 의문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할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하듯 묵묵히 제 역할을 다할 뿐.

“지금 출발하는 건가요?”

“…편하신 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으…렇군요. …그러면 지금 갈게요.”

그래도, 조금 불편하긴 하네….

다은의 성격상 과묵한 사람보다 말이 많은 사람이 편한 건 사실이라, 그녀는 은근히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카나와 친해질 땐 왜 그러지 않았냐고?

‘어린애랑 친해지는 것과 어른과 친해지는 건 다르잖아.’

아무리 어른스러운 척해도 카나는 어린아이티가 팍팍 났는걸.

하물며 성별도 다르고, 접점이 있었던 것도 아닌 탓에 더욱 조심스럽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를 따라 방을 나선 다은은 옆에 붙은 동료들의 방을 두드리고 다녔다.

“셀린! 마을 구경할 건데 같이 가실래요?”

“카나야 마을 구경하러 가지 않을래?”

그렇게 문을 두드린 후, 오랜 시간이 지나기 전에 금발의 여인이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마을 구경이요?”

“네. 같은 나라에 속한 마을들도 위치에 따라 생활 양식이 다르잖아요. 바다를 건너왔으니 아르디나 대륙에서 봤던 마을들과 매우 다르지 않을까요? 전 그런 걸 보는 게 재밌더라고요.”

“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아요. 듣고 보니 저도 흥미가 생기네요.”

고개를 끄덕인 셀린이 일행에 합류했다.

남은 사람은 이제 한 명.

파티의 실질적인 리더이자, 전투원이자, 마스코트이자, 피로해소제이자….

‘어라. 카나가 맡은 역할이 이렇게 많았었나…?’

카나를 생각하던 다은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심지어 여행 경비도 거의 다 카나의 지갑에서 나오니, 물주 역할마저 빼앗긴 상황.

‘조별 과제였다면 이름이 빠지고도 남을 상황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 정도는 아니지…’라고 생각하다가도, 묘한 불안감 때문에 쉽사리 단언할 수 없는 다은이었다.

근데,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거지?

똑똑.

“카나야~?”

간드러진 목소리로 재차 불렀으나 분홍색 소녀가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고,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기척도 없었다.

“왜 말이 없지?”

“주무시는 거 아닐까요?”

의아해하는 다은에게 셀린이 가설을 내놓았다.

“…벌써요?”

들어간 지 이십 분도 안 된 것 같은데…?

“어린아이들은 잠이 많으니까요.”

“그 얘기, 카나가 들었으면 싫어했을 거예요.”

“후후.”

능글맞게 느껴지는 웃음을 뒤로 하고 다은이 문을 두드렸다.

노크가 두어 번 정도 더 이어졌을 때, 마침내 문이 살짝 열리며 틈새로 분홍색 머리가 빼꼼 모습을 보였다.

“…왜.”


“자고 있었어?”


“아니.”

아니라고 하기엔 머리가 눌려 있는데.

으음… 이걸 말할까 말까.

귀여운 소동물을 보는 듯한 눈으로 푹 눌린 분홍색 머리카락을 보던 다은은 이내 말하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편이 더 귀여웠으니까.

“그래? 그러면 마을 구경하러 갈 생각인데 카나도 같이 갈래?”


“마을 구경? 싫어.”


“왜? 아까는 궁금해했잖아.”


“아까는 아까고, 지금은 지금이지.”

카나가 마음이 바뀌었다고 새침하게 말했다.

여자의 마음이 갈대 같다고 하던가.

다은이 생각하기에, 어린아이의 마음은 갈대밭이었다.

그것도 쌩쌩 부는 강풍 앞의 갈대밭.

그러니 언제 마음이 바뀐다 해도 딱히 이상할 건 없지만.

“흐음…?”

묘하게 불퉁한 카나의 얼굴을 본 다은은 카나가 단순히 변덕을 부리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아직도 삐져 있는 거야?”

“….”

반쯤 나왔던 얼굴이 문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갔다.

이제는 한쪽 눈만 빼꼼 내민 채 다은을 보는 카나.

말을 하진 않았지만 대답했다고 볼 수 있는 행동이었다.

셀린이 난감한 목소리를 냈다.

“말했잖아. 그건 그냥 해본 말이라니까….”

사건의 발단은 다은의 한마디에서 시작되었다.

“근데 카나야. 이제 그 능력도 어느 정도 익숙해진 것 같으니까 아르키쉬로 말해도 되는 거 아니야?”

그동안은 말이 통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다은이 통역을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카나가 새로운 능력을 익힌 덕에 셀린과 일대일로 대화하는 것이 가능해졌으니 굳이 통역할 필요가 없지 않냐는 생각이었다.

그라닉으로 말하면 카나의 말은 셀린에게 전해져도, 다은의 말은 전해지지 않았으니까.

통역의 과정을 거쳐 알아들을 수는 있지만 딜레이가 생기는 건 자연한 수순이었다.

다은의 말을 들은 카나의 볼이 빵빵하게 부풀었다.

“…이제 귀찮다는 거지?”

늘 평탄하던 어조에도 삐죽한 가시가 돋아 있었다.

그것을 느낀 다은이 실책을 바로잡기 위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셀린이 소외되는 것 같아서…!”

“….”

카나의 볼은 여전히 빵빵하게 부풀어 있어서, 다은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필사적으로 카나를 달랬다.

유스티나가 내준 방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열심히 싹싹 빌었더니 기분이 조금 풀린 것 같아서 안심했건만.

‘삐진 게 완전히 풀리진 않았나 보네. 그래도, 왜 삐졌는지 알 수 있어서 다행이다….’

성국 때는 왜 기분이 나쁜 건지 짐작도 할 수 없어서 힘들었지….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카나와 더 끈끈한 사이가 되는 계기가 되었지만, 아직도 다은은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한 느낌이 들곤 했다.

반면 이번에는 삐진 것도, 삐진 이유도 명확하게 알 수 있으니 귀찮기는커녕 귀엽기만 보였다.

“읏샤!”

문을 확 열어젖힌 다은이 카나를 꼭 안아 들었다.

“내가 이렇게 사랑스러운 카나를 두고 한눈을 팔 리 없잖아. 나한테 일 순위는 언제나 카나인걸. 아까도 말했다시피 따돌리는 건 좋지 않으니까 그런 거야. 카나는 착하니까 따돌림이 나쁘다는 걸 알고 있지?”


“자꾸 애 취급하지 말라고 했지.”


“흐으음~? 만약 카나가 계속 삐져 있으면 나는 애 취급을 할 수밖에 없는걸?”


“…삐진 거 아니니까 빨리 내려놔.”

정말 싫었으면 힘을 써서 나가면 됐을 텐데.

문을 열어젖히는 것도, 안아 드는 것도 막지 않았으면서 싫은 척하기는.

하지만 이런 소리를 말하면 곧바로 문을 닫고 들어가 버릴 게 뻔해서, 다은은 솔직하지 못한 소녀를 내려놓으며 말을 삼켰다.

“…뭐, 좋아. 안 그래도 나도 신경 쓰고 있었으니까.”


“그러면 아까는 왜- 음, 아니야.”

하마터면 같은 실수를 반복할 뻔했네.

다은이 식은땀을 닦았다.

다행히 카나는 다은이 하려던 말을 눈치채지 못했다.

“응, 착하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

“….”

말버릇을 도둑맞은 카나가 눈을 뾰족하게 떴다.

다은은 날카로운 눈빛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소녀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자아. 이제 나가볼까? 이러다 해가 져버리겠어.”

지금도 어둡긴 하지만, 해가 완전히 지는 것보다는 낫잖아?

그렇게 말하며 다은이 밝게 웃었다.

* * *

“저거 봐! 소야!”

다은이 방방 뛰었다.

그러다가 문득, 뛰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왜 다리가 여덟 개지?”

“그걸 이제 알아챈 거야?”

굉장히 빠른 다은의 반응에 박수를 보냈다.

칭찬의 의미로 한 말이 아니니까 쑥스러운 표정은 짓지 않아도 되는데.

한숨을 쉬며 다은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마물이네.”

언뜻 아르디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저것의 정체는 소가 아니라 마물이었다.

“마물을 사육한다니. 마족들이라서 할 수 있는 생각이네.”

아르디나인이 이런 짓을 했다간 곧바로 처형장에 끌려가서 목이 댕겅 잘렸을 것이다.

위험 요소를 방치하는 것도 모자라 마기 중독과 혼란을 야기했다는 명목으로.

애초에 마물들이 인간들을 저렇게 온순하게 따르지도 않을 테니 불가능한 일이지만.

어떻게 길들인 건지 신기하네.

“식용으로 키우는 건가요?”

“…예.”

“…앗, 네.”

신이 나서 마족에게 말을 걸었던 다은이 한마디에 풀이 죽어 시무룩해졌다.

‘식량을 어떻게 조달하나 했더니 이렇게 하고 있었구나.’

물론 가축을 키우는 것만으로 수많은 마족을 먹여 살릴 만큼의 식량이 나오진 않는다.

그래서인지 마을 곳곳에 농작물을 기르는 밭이 눈에 띄었다.

마대륙이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지어 먹고사는 건 별 차이 없네.

하기야 이들도 본래는 정화자 일족이라고 불리는 인간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려나.

“카나! 이거 봐봐! 다리가 여섯 개 있는 닭이야!”

“…그건 닭이 아니라 마물이라니까.”

퉁명스럽게 대꾸하면서도 내 몸은 다은을 향해 가고 있었다.

닭 다리가 여섯 개라니, 이걸 어떻게 참아?


           


I Became a Raid Boss

I Became a Raid Boss

레이드 보스가 되었다
Score 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One day, when I came to my senses, I found myself reincarnated in another world. After enduring a rough life post-reincarnation, I thought I could finally settle down, quietly tending to a flower garden in the mountains… …But something feels 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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