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니티 연구소의 시설 제어실.
제어실 메인 모니터에는 회색 사신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모니터에 비치는 것처럼, 파괴 테스트는 완벽한 실패였다.
그 때문인지 회색 사신의 유령화를 성공적으로 차단한 뒤, 약간 들뜬 것 같은 분위기는 완전히 사라졌다.
화면에는 수많은 알림이 깜빡이며 보안대원들의 얼굴에 섬뜩한 빛이 드리워지고, 그들의 표정은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효과가 없군.”
빠르게 울리는 자판 소리와 간헐적으로 울리는 신호음 사이로 보안대장의 자조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성을 잃고 오브젝트가 된 부소장은 이미 녹아서 흔적조차 남지 않았지만, 회색 사신은 멀쩡했다.
트리니티 연구소에서 준비한 온갖 종류의 파괴 수단이 모두 무력했다.
아귀를 녹이는 고열도.
유령을 찢는 칼날도.
그림자를 뭉개는 충격파도.
모두 소용없었다.
부서지지 않는 거품을 포함한 몇몇 행동 제한 조치들만 동작하고 있을 뿐이었다.
[타격대, 저격에 성공. 안전한 위치에서 계속 공격하겠음.]
그때, 인질 쪽을 공격하러 간 타격대의 성공 소식이 들려왔다.
보안대장은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모니터에 비친 회색 사신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 순간, 거대한 진동이 울렸다.
제어실의 모니터는 애처롭게 계속 깜박거리고, 사람들은 제대로 자세를 잡지 못하고 바닥에 엎드렸다.
그리고, 정전.
제어실의 모든 전기가 끊어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엄숙했던 제어실 내부는 어수선해지고, 다급한 대화 소리로 가득 찼다.
다행히 몇 초 뒤, 제어실의 전원이 회복되었다.
비상 발전기가 맹렬하게 돌아가는 소리가 울리자, 다시 제어실은 원래 분위기를 되찾았지만, 모니터 너머는 그렇지 못했다.
회색 사신이 사라진 상태였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파괴할 수 없었던 거품들은 모두 박살이 난 상태였다.
오브젝트를 막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합금 벽도 종잇장처럼 찢어져 있었다.
그리고 갈라진 벽 끄트머리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유심하게 보지 않으면 모를 만큼 작은 흔적.
공허.
빛을 끊임없이 먹어 치우는 검은색.
살짝 보인 그 흔적에 꺼림칙함을 느낀 보안대장은 어떤 예감을 느끼고 서둘러서 제어실을 나섰다.
“아….”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공허의 진면목을 목도했다.
땅끝에서 땅끝까지, 하늘이 찢어졌다.
태양은 사라져서 지면에 그림자를 드리웠고, 공허에서는 끝없는 공포감이 밀어닥쳤다.
“허, 이게 무슨. 정말 저게 회색 사신이 한 짓이라고?”
하늘을 가로지르는 은하수처럼, 하늘이 다섯 줄기로 찢겨 있었다.
그 상흔은 거울에 비춘 것처럼 지상에도 다섯 줄기.
트리니티 연구소가 찢겼다.
말도 안 된다.
인간이 저런 것을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어.
인간이 저런 것을 어떻게 상대하란 말인가?
보안대장은 황급히 제어실로 돌아왔다.
도망가야 해.
보안대장의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만이 가득했다.
“대장. 타격대의 전멸이 확인되었습니다.”
차량 열쇠를 황급히 챙기는 보안대장에게 하얗게 질린 표정의 대원이 보고했다.
대원의 말에 모니터를 올려다보자, 갈기갈기 찢긴 타격대의 모습을 비추는 CCTV의 화면이 보였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타격대가 전멸한 것이다.
보안대장은 목소리에서 최대한 공포를 지우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보안대 전원은 들어라! 모두 연구소 내부로 흩어져라. 최대한 시간을 끄는 거다! 지금 이 시점부터 회색 사신의 격리, 제거를 포기한다.”
보안대장은 최대한 엄숙하고 차분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격리 중인 모든 오브젝트를 풀어놔라. 최대한 회색 사신을 귀찮게 만들고 시간을 끄는 거다. 소장님이 나오실 때까지 기다리면 이길 수 있다. 알았나?”
“네!”
그리고 보안대장은 진지한 표정으로 코트를 걸치고 제어실 밖으로 나왔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찢긴 하늘은 어느새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다행이야. 부하들이 그 끔찍한 상흔을 보면 도망가려고 할 테니 말이야.
부하들은 시간을 끌어줘야 해.
안전하게 도망칠 때까지!
느긋한 발걸음을 연기하고 있던 보안대장은 점점 걸음을 빨리하더니, 이젠 뛰기 시작했다.
보안대장은 소장이 강할지, 회색 사신이 강할지는 잘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소장이 나타나기 전에 죽을 게 뻔하다는 것이다.
트리니티 연구소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보안대장은 차량의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다.
“하하, 살았어!”
보안대장의 얼굴에서 불안이 가시고, 미소가 떠올랐다.
쿠웅.
하지만 그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노랗게 불타오르는 눈빛의 괴물이 차량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회색 사신은 사나운 표정으로 양손을 넓게 벌리더니, 그 사이를 조금씩 좁혔다.
공간이 우그러든다.
보안대장은 자동차의 문을 열려고 내려쳤지만, 딱딱하게 굳어버린 공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돼. 살려줘!”
점점 좁혀드는 공간 속에서 보안대장은 사방을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렸지만, 소용없었다.
작게, 좀 더 조그맣게 우그러들어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리고 그 자리에는 희미하게 감도는 초코향만이 살짝 남아있었다.
***
아, 실수했다.
막내는 물리면역이 없어서 연약한데, 트리니티가 너무 형편없어서 방심하고 있었어.
트리니티 특제 사우나 볼풀에서 놀고 있을 때 느껴진 의지.
약간 슬프면서 고통스러운 단말마.
푸른 사신의 <엄마….>를 듣고는 정신이 새하얗게 돼버렸다.
그래서 그런지 격벽을 찢어버릴 때 장작을 좀 과하게 써버렸다.
그나저나, ‘엄마’인가.
‘언니’나 ‘친구’ 같은 취급일 줄 알았는데, 의외네.
위험 요소 제거를 위해서, 막내에게 총을 쏜 녀석들이랑 비슷한 느낌을 풍기는 녀석들은 모두 추적해서 죽여버렸다.
검은 펭귄 텔레포트로 푸른 사신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서, 손바닥 위에 역 소환되었던 푸른 사신을 소환했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이, 죽은 것처럼 널브러져 있는 푸른 사신.
괜찮아. 괜찮아.
마음속으로 위로를 전하며, 푸른 사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 상냥해.>
잠에서 깨어난 푸른 사신은 헤실헤실 웃으면서 좋아했다.
<엄마, 지금은 상냥해! 신기해!>
<엄마, 상냥해!>
나머지 푸른 사신들도 우르르 내 품 안으로 몰려들었다.
나는 언제나 상냥한데, 엄마라고 부르면서 은근슬쩍 음해하네.
과자 먹을 때랑 귀찮을 때, 그리고 TV를 볼 때만 무시할 뿐인데.
품에 달려든 귀여운 푸른 사신들을 마구 쓰다듬어 주었다.
***
하얀색 불꽃이 사방으로 번지면서 관악구 주민들을 불태웠다.
아니, 관악구 주민들이었던 것을 불태웠다.
“제임스! 괜찮을 거라면서요?”
통역사는 긴장으로 인해 숨을 가쁘게 쉬며 말했다.
“하하, 자네도 모르지 않았나? 관악구가 이런 죽은 자들의 도시가 되었을 줄 누가 알았겠나?”
“역시 이럴 줄 알았어!”
통역사의 절규가 관악구 거리에 울려 퍼졌다.
제임스 일행은 끝없이 몰려드는 사람들을 피해서 건물 안으로 숨어들었다.
태워도 태워도, 끝없이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좁은 입구를 막고 농성할 수밖에 없었다.
통역사가 보기에 제임스의 경호원들이 들고 온 무기는 굉장히 신기했다.
겉보기에는 쇠로 만든 그저 고풍스러운 횃불처럼 생겼는데, 뭔가를 조작하니 하얀 불꽃을 맹렬하게 토해내는 화염방사기로 변한 것이다.
이것이 미국의 기술인가! 하고 호신용으로 빌려준 횃불을 자세히 살펴봤더니 개구리가 있었다.
횃불 불붙이는 곳에 사지가 결박된 채, 애처롭게 묶인 개구리가 있었다.
“STOP!”
너무너무 불쌍한 개구리를 쳐다보고 있을 때, 경호원 중 한 명이 소리치며 횃불을 뺏어 들었다.
“아, 미안하군. 미리 설명을 해줬어야 했어.”
그때 제임스가 사과했다.
“횃불 안에 묶인 개구리를 절대로 바라보지 말게.”
“그냥 불쌍한 개구리 같던데요.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흐음, 하고 침음성을 낸 제임스는 설명을 이어 나갔다.
“자네, 저 개구리가 엄청 불쌍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나?”
“네, 그야 그렇죠. 저렇게 묶여서 양 눈과 입까지 꿰매져 있으니까요.”
“그리고 풀어주고 싶었고 말이야.”
“네, 우선 풀어줘서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했죠.”
짝, 손뼉을 치면서 제임스가 말했다.
“바로 그거네. 개구리가 왜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어?”
통역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도대체 왜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지?
“저 개구리는 눈빛과 말로 사람을 현혹하는 사악한 개구리라네. 물론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람을 현혹하는 힘이 있지.”
“너무 위험하잖아요!”
통역사는 질겁한 표정으로 횃불에서 멀어졌다.
“제임스!”
그때 입구를 막던 경호원이 소리쳤다.
제임스가 가서 확인해 보니, 집요하게 쫓아오던 관악구 주민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하늘을 올려다보니, 끔찍한 상흔이 하늘에 번져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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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공간을 찢어버린 손자국.
제임스 일행은 하늘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을 만큼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그리고 제임스가 쥐고 있는 서류 가방 깊숙이 숨겨진 0호 유물.
‘하얀 돌.’
그 하얀 돌이 심장 박동처럼 일정 주기를 가지고 빛을 뿜기 시작했다.
***
태양 빛이 감히 침범할 수 없는 깊은 싱크홀.
그 그늘진 영역에는 깊은 침묵과 어둠이 가득했다.
이곳의 공기는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굳어있었다.
눅눅하고 정체된 공기와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는 오브젝트들의 공간이었다.
어둠이 지배하는 이 심연 한가운데서 아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감겨있던 아귀의 눈은 빛나는 구슬처럼 어둠을 꿰뚫으며 빛났다.
지성은 흩어지고 본능만 남은 아귀였지만, 익숙한 감각을 느끼고 눈을 뜬 것이다.
그리움.
창조주.
하얗고 따스한 불빛.
아귀의 뇌리에 잊어버린 지 오래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 지■■. 그리고 ■■해질 때■지, ■■■■ 전부■ 먹어 치■줘.”
아귀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달리기 시작했다.
익숙한 따스함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