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6
왜 당신만 신의 목소리를 듣는 건가요?
왜 당신에게만 신의 말씀이 닿는 건가요?
어째서?
당신과 저 사이의 무슨 차이가 있기에?
이해할 수 없어요.
이해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잖아요.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한 건 저인데.
그 분의 도움이 되기 위해 생을 바친 건 오롯이 저인데.
행동 하나 말 하나 조심해가면서 당신을 위한 삶을 살았던 것은 오롯이 저인데.
왜 당신에게만 목소리를 내시는 건가요?
왜?
“저기.”
가만 앞을 바라보던 페이비는 루시의 목소리를 듣고서 다급히 뒷걸음질을 쳤다.
내가 방금 무슨 짓을.
바보.
멍청이.
다른 사람을 또 다시 시기하다니!
“허접성녀님?”
“아! 그! 이 검에 담긴 저주를 해주하겠다고 하셨죠?! 잠시 안에서 기다려주세요! 제가 다 끝마치고 가지고 올게요!”
페이비는 그리 소리를 치고는 도망치듯이 교회 안으로 뛰었다.
어느 사제가 본다면 성녀님 경거망동하시면 안 됩니다. 같은 소리를 할 행동이었지만 페이비는 그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루시를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자신의 마음속에 깃든 검은 감정들이 점점 더 크기를 키웠으니.
도망치지 않으면 검은 색에 잡아먹힐 것 같았던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어느 방 안에 도착했을 때 혼자임을 깨우친 페이비는 가쁜 숨을 내쉬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신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을 한 두 번 본 게 아니잖아.
기다리고 있으면 언젠가 답해 주실 걸 알잖아.
그런데 왜 알른 영애를 볼 때마다 이러는 거야.
대체 왜.
지난 번 아카데미 거리에서 일어났던 사고 이후로 페이비는 의도적으로 루시를 피했다.
그녀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그녀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볼 때마다,
가끔씩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는 메이스를 볼 때마다 자꾸만 이상한 감정이 차올라서 어찌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페이비는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천성이 하얀 데 그 위에다 하얀 색으로 덧칠을 한 그녀다.
거뭇한 감정을 느낄 틈새란 존재하지 않았으니.
하얀 도화지를 침범하는 검은 색에 서투를 수밖에 없었다.
허나 지금은 아니다.
페이비는 자신의 마음속에 차오르는 감정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이는 질투였다.
신의 사랑을 독점하는 자에 대한 질투.
페이비가 생각하기에 루시 알른은 분명 아르마디께 사랑을 받고 있었다.
이는 의논이나 토론이 필요한 명제는 아니었다.
평생 한 번 듣기도 어려운 아르마디의 목소리를 매 달마다 듣는 그녀다.
루시가 주신께 사랑을 받는 게 아니라면 그 누가 아르마디의 사랑을 얻는다 할 수 있을까.
그리 생각을 했기에 페이비는 루시를 볼 때면 과거 고아원에 머무를 적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직 그녀가 성녀라 불리기 이전에.
다른 사람에게 내가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일까를 의심하던 때의 기억을 말이다.
그 곳을 운영하던 고아원장님은 분명 좋은 분이었다.
자신에게 득 되는 것 하나 없음에도 고아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었지.
허나 사람인 이상에 그 사랑이 완벽할 수는 없었다.
사람은 적은데 보살펴야 할 아이는 많으니 어찌 그 자비가 모두에게 닿겠는가.
어쩔 수 없이 고아원장님의 손길에서 벗어나 구석에 있을 때면 페이비는 그 손길의 아래에서 웃음을 짓는 아이들을 보고서 가끔씩 불안감을 가졌다.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저 손길이 다시 나에게 오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말이다.
허나 그는 말도 안 되는 걱정이었다.
고아원장님은 좋은 사람이었고 자신의 사랑이 베풀어지지 않은 곳을 보면 그 곳을 따스하게 만들어주러 왔으니까.
지금도 페이비는 같은 걱정을 품고 있었다.
만약에 아르마디께서 알른 영애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그 사랑에 눈이 멀어서,
그 따스함을 널리 퍼트려야 함을 잊고 한 사람에게만 따스함을 전하지 않을까하는 말도 안 되는 걱정을 말이다.
이 걱정의 결론이 같을 거란 걸 페이비는 모르지 않았다.
아르마디께서는 존귀하시고 고귀하신 분이시니 누군가를 편애할 리가 없다.
설령 그것이 편애처럼 보일지라도 그는 더 큰 영광을 위한 선견일지니.
신의 뜻을 믿는 자로써 의심을 가져서는 안 될 일이다.
평생을 교회에서 성녀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은 페이비는 당연히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결국에 페이비도 사람이어서.
성녀라 할지라도 그 이전에는 한 사람의 여자아이에 불과해서.
의심이 생겨나는 것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아르마디시여.”
부디 저의 이 검은 마음들을 거두어가 주십시오.
당신의 사랑이 세상에 널리 퍼져 있음을 알려 주십시오.
이 의심 많고 부족한 신자에게 당신의 기적을 허락해 주십시오.
제발.
벌컥.
눈을 감은 채 기도를 하던 페이비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성녀님 여기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
“…잠시 쉬고 있었습니다.”
페이비는 애써 침착한 체를 했지만 흐트러진 머리와 옷 그리고 눈물이 묻어난 눈가는 감출 수 없었다.
교회의 사제는 이상함을 눈치 챘으나 그 이상 캐묻지 않았다.
대신 아무런 일도 모르겠다는 것처럼 페이비가 들고 있는 검에 대해서 물었을 뿐이었다.
*
“아가씨께서 저 따위에게 선물을?!”
페이비가 해주를 시켜 준 검을 건네주었더니 칼은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그 검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무슨 마법이라도 본 것처럼 동그래진 눈으로 검을 바라보다가 그를 품 안에 안고 뒤로 넘어가 버렸다.
그 무엇도 없는 길바닥이었던지라 칼이 넘어짐에 따라 요란스러운 소리가 났지만 정작 칼은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
“뭐야?!”
“칼 교수님 왜 저래?!”
“설마 또 알…”
“야. 목소리가 커.”
칼. 너 주변에 안 보이냐?
네가 호들갑을 떤 덕분에 알른 영애 괴소문의 레파토리가 더 늘어날 것 같잖아!
왜 호위에게 잘해주려고 선물을 해줬는데 내가 고통을 받아야 하는 거야!
그게 짜증이 나서 칼의 허벅지를 걷어찼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평온했다.
이 정도는 아프지도 않다 그거냐?!
열받네. 진짜!
“허접♡ 여자애한테 짓밟히고 싶은 마조인거야?♡ 이딴 게 기사라니♡ 징그러워♡ 변태♡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화가 나서 일어나기를 바라며 매도를 던졌지만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행복한 지경에 이른 칼에게는 먹혀들어가지 않았다.
진짜 이딴 게 내 가장 믿음직스러운 기사라니.
나를 좋아해주는 건 고맙지만 좀 정상적인 인간이 되어줬으면 좋겠는데.
하아. 언젠가는 일어나겠지.
그 때까지는 다른 일을 하고 있자.
마침 확인해야 할 것도 있으니까.
원래 확인을 하려다가 세실이 말을 거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던 것.
퀘스트.
[현장학습에는 이벤트지!]
[숲의 주인에게 인정을 받으십시오.]
[보상 : ???]
[실패시 : 정말 굴욕적인 무언가]
현장학습은 매 학기마다 정기적으로 일어나는 이벤트다.
항상 아카데미에서 정형화된 전투만을 거듭하던 학생들에게 실전을 경험시켜주는 일종의 수업이지.
성적에 따라서 보상이 주어지는데다가 각각 장소마다 특정한 이벤트가 있어서 그걸 클리어하면 부가적인 것도 얻을 수 있다.
1학년 1학기 현장학습의 이벤트는 바로 저 숲의 주인이다.
일정 조건을 통과하지 못하면 만날 수 없는 숲의 주인을 만나 전투를 하는 형식으로,
보상이 꽤 쏠쏠해서 고인물이라면 반드시 하고 넘어가는 이벤트이기도 하다.
어차피 숲의 주인을 만날 생각이었는데 거기에 보상까지 준다니.
아르마디님.
이렇게 주신 행동을 계속하시는 건 정말 고마운데요.
저 좀 무섭습니다.
원래 이러지 않으시던 분이 갑자기 저에게 득이 되는 일만 계속해 주시니까 대체 이 다음에 뭐가 기다리고 있는 건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어요.
특히 제 불안을 가속화 시키는 건 저거에요.
실패시에 들어있는 정말 굴욕적인 무언가.
저건 대체 뭔가요?
굴욕적이라는 단어가 왜 들어있는 지도 모르겠고 정말이라는 강조어가 붙어 있는 이유도 모르겠어요.
물론 저 퀘스트를 실패할 일은 없겠지만 만약에 라는 게 존재하잖아요.
혹시나 퀘스트를 실패하게 되면 전 어떻게 되는 거죠?
대체 무슨 꼴을 당하는 건가요?!
사디이자 마조이자 변태이신 허접 주신님이 생각하는 굴욕이라는 게 뭘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고요!
젠장!
모처럼 요즘에 여유가 생겼는데 저 단어 하나 때문에 여유를 즐길 수 없게 됐잖아!
이 빌어먹을 허접 주신아!
으으. 스트레스 받아.
뭔가 박살내고 싶어.
괴롭히고 싶어.
이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곳을 원해!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이에 최적화된 존재가 있음을 떠올렸다.
나크라드.
소울 아카데미 외각에서 개짓거리를 벌이고 있는 놈.
악신의 사도는 애초부터 토벌해야 하는 존재잖아.
지금 준비가 부족한 만큼 그 녀석을 잡아 족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괴롭히는 건 충분히 할 수 있지 않나?
아직은 악신들의 봉인이 거의 풀리지 않았을 시점이니까 힘이 허약할 테고.
칼이랑 알새틴을 데리고 가면 충분히 울상을 짓게 할 수 있겠지.
날 굴복시키기 위해 죽기 직전의 상태에서 가지고 놀던 놈이 울상을 짓는 풍경?
키야. 이모!
밥 가져와! 밥!
상상만으로도 벌써 맛있네!
분명 아서가 이야기하길 걔가 저녁에 출몰한다고 했었지.
그럼 지금부터 슬슬 움직이면 되겠네.
“허접한 강아지야♡ 언제까지 주인의 말을 무시하려는 거야?♡ 유기견이 되고 싶어?♡”
“아닙니다!”
마지막 한 마디에 벌떡 일어난 칼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일어날거면 진즉에 일어나라고.
매도 당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허접 주신에 이어서 너까지 마조 변태가 되려는 거냐? 어?!
진짜 유능하지만 않았어도 당장에 유기 했을 거야.
*
“정말 감사합니다!”
나크라드는 자신에게 고개를 숙인 후 떠나가는 아카데미의 학생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고맙기는.
오히려 내가 더 고맙지.
이렇게 조금씩 아카데미에 타리키님의 기운이 퍼져나가고 있으니 말이다.
지난 번 자신의 계획이 실패했을 때에 나크라드는 절망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 날 저녁 외진 곳에 만들어 둔 던전이 누군가의 손에 공략되다니!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실패의 좌절 속에서 나크라드의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은 하나였다.
저주받을 아르마디의 사도.
그 놈이 개만도 못한 아르마디의 계시를 받아 무언가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니까.
상황이 어찌 흘러갔던 간에 나크라드가 실패를 한 것은 사실이었다.
자신의 방심 탓에 타리키의 계획에 문제가 생겨나다니!
나크라드는 좌절하며 자신의 목숨으로라도 그를 속죄하고자 했으나 타리키께서는 자비로웠다.
그 분은 나크라드에게 새로운 기회를 준 것이다!
그 자비에 감동한 나크라드는 자신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계획을 짰다.
그것이 바로 이거다.
아카데미의 학생들에게 조금씩 타리키의 기운이 흘러들어가게 하는 것.
저들은 모르리라.
나크라드와 자신이 거래를 시작 하는 순간에 계약이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자신의 몸 안에 타리키의 기운이 스며든다는 것을.
그가 모시는 타리키는 어둠의 악신.
한 번 스며들게 되면 아르마디 그 개자식도 찾아내지 못할 은밀함을 자랑하니.
그 누구도 모르는 상태에서 아카데미의 안에는 악신의 기운이 점차 퍼져나가고 있었다.
아아.
오늘도 한 사람이 늘어났구나.
이대로만 가면 된다.
그러면 언젠가 악신의 뜻을 아카데미의 안에 펼칠 수 있는 순간이 오리라.
그 생각에 웃음을 짓던 나크라드는 그가 한없이 증오하는 기운을 느끼고서 걸음을 멈췄다.
호오. 이것은 아르마디의 사도가 아닌가.
부주의하구나.
어둠이 세상을 뒤덮을 시간에 이 곳에 방문하다니 말이야.
무능한 아르마디가 위협을 경고하지 않더냐?
좋다. 나의 아가리 안으로 먹잇감이 제발로 걸어 들어왔으니 어찌 물러서겠는가.
턱을 움직여 먹잇감의 맛을 봐야지.
아르마디의 사도여. 그대는 나를 방해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