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
무너지지 않는 의지라는 스킬을 지닌 나는 근성이란 부분에 있어서 다른 누구에게 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허나 오늘이 되어서 알게 되었다.
천외천.
하늘 위에는 하늘이 있는 법.
포셀이 지닌 체력은 내 체력으로는 감히 짐작할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
이 빌어먹을 아저씨는 어떻게 6시간 동안 나를 가르치면서도 쌩쌩한 거야?
대체 체력 스텟이 얼마나 되길래?
메이스를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방패를 든 팔은 너무 많은 공격을 막은 탓인지 내 말을 잘 듣지 않았다.
휴식 없이 움직인 덕분에 폐는 찢어질 것처럼 아팠고 머리는 이미 생각을 멈춘 지 오래였다.
스킬이 억지로 날 일으켜 세우고 있지만 지금의 난 사람보단 좀비에 가까웠다.
본능에 따라 흐느적흐느적 몸을 움직이는 좀비 말이다.
“아가씨?”
근데 그것도 이제 한계다.
이만큼 버텼으면 엄청 잘 버틴거라고 생각해.
이전에도 말했지만 의지는 어디까지나 의지에 불과하다.
몸이 한계를 맞이하면 나는 거기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냐고?
“포셀.”
“네. 아가씨.”
“나 이제 잘 테니까 건드리지 마. 이 정신 나간 훈련 중독아.”
당신은 지독할 정도로 심각한 훈련 중독입니다.
뭐? 인정할 수 없다! 대련으로 그걸 증명해라!
대련이라니.
싫어. 나 대련 싫어. 차라리 듀얼을 할래…
*
그 날 저녁. 자신의 방에서 술을 자작하고 있던 포셀은 문 바깥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목소리를 냈다.
“가주님. 그냥 들어오셔도 됩니다.”
“크흠. 알고 있었나?”
“숨길 생각도 없으시지 않으셨습니까.”
문을 열고서 나타난 건 베네딕이었다.
보통 밤 늦게까지 집무실에 박혀 있는 그가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냈음에도 포셀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가 올 것을 알고 있었기에.
“루시 아가씨 때문에 오신 거지요?”
“그래. 앉아도 되겠나?”
“그러십시오.”
베네딕이 포셀의 반대편에 앉자 책상 양 쪽이 가득 찼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한 쪽에 두 명은 여유롭고 잘 앉으면 셋도 앉을 수 있는 책상이지만 덩치 둘이 나란히 앉으니 책상이 꼭 2인용처럼 보였다.
“오랜만에 술이나 같이 하시죠.”
“무슨 술이지?”
“예전에 흡혈공의 성에 쳐들어갔을 적에 털어온 겁니다. 술을 잘 아는 녀석에게 보여줬더니 손을 바들바들 떨더군요.”
“그래서 이름은?”
“기억 안 납니다. 그 놈이 술을 보고 경악을 하다 졸도 한 것만 떠올라서 도저히 술 이름을 떠올릴 수가 없더군요.”
포셀은 너털웃음을 흘리며 그래도 귀한 거니 맛있지 않겠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포셀이 유리잔을 찾는 동안 베네딕이 목소리를 냈다.
“올 줄 알고 있었나?”
“백작님이 루시 아가씨에 관한 일이라면 사족을 못 쓴단 건 저택의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크흠.”
불편하다는 듯 헛기침을 내뱉은 베네딕이지만 차마 포셀의 말을 부정하진 못했다.
자신이 지닌 딸사랑 때문에 저지른 잘못이 워낙에 많은지라 도저히 부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네가 보기에 루시는 어떤가?”
“재능이 있습니다.”
포셀은 잠시 고민도 하지 않고 그리 대답했다.
그는 여태까지 수많은 이들을 가르쳐 보았다.
세상에 이름을 떨칠 천재부터 아무런 재능도 없으나 노력만으로 기사가 된 둔재까지.
그런 포셀이 보기에 분명 루시는 재능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녀가 가진 재능이 한 두 개는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특출난 것을 역시 방패를 다루는 능력이었다.
보통 처음 방패를 든 사람은 방패를 방어용으로 밖에 사용하지 않는다. 방패라는 단어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상대의 공격을 받아내기에 급급해진다.
허나 루시는 달랐다. 그녀는 방패의 가능성을 이끌어 낼 줄 알았다.
단순히 막는 것만이 아니라 때로 상대에 공격에 끼어들어 흐름을 끊고, 밀어내서 상대를 괴롭게 하고.
심지어 그런 것을 하는 와중에도 방어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건 평범한 재능이 아니었다. 가히 신이 내린 무재라 할 만 했다.
아직 제대로 된 배움을 받지 않았음에도 이 정도인데 그 재능을 몇 개월이고 몇 년이고 갈고 닦는다면?
도대체 어떤 괴물이 나타날까.
“알른 가문의 피는 속일 수 없나 봅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부터 계속 제가 맡아 키우고 싶습니다. 루시 아가씨는 분명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을 겁니다.”
“우리 딸을 칭찬해주어서 고맙다만 그런 부분을 묻는 게 아닐세.”
“아아. 이해했습니다.”
루시 아가씨의 변화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는 건가.
아가씨는 요 몇 일 간 급격하게 바뀌셨다. 어느 기사가 말을 하길 죽었다가 깨어나도 저렇게 바뀌지 않을 거라 할 정도로.
본래 루시는 근성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공부도 운동도 뭣도 조금이라도 힘들면 내던지기 급급한 그녀는 도저히 철혈백의 딸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한 사람이었다.
오죽하면 루시의 모습을 본 다른 귀족이 저게 정말 철혈백의 딸이 맞느냐는 물음을 던졌을까.
허나 어느 날을 기점으로 그녀가 달라졌다.
포셀이 그 변화를 직접 목격한 건 루시가 훈련장에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메이스와 방패를 들고서 훈련장에 나타난 그녀를 상징하는 단어는 끈기였다.
하루도 빠짐 없이 어지간한 기사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최선을 다해 훈련을 거듭하는 그녀의 근성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방법이 일반적인 기사들이 보기엔 괴이해 보이긴 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방법으로 분명 성과를 내 보였다.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긍정적인 변화죠. 다른 누구에게 물어보더라도 똑같이 대답할 겁니다.”
과거의 루시와 지금의 루시 중 누가 더 낫냐고 묻는다면 모두들 한결 같이 지금의 루시라고 대답할 것이다.
여전히 언행이 귀족답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예전에 그녀가 하던 패악질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지. 그렇긴 한데.”
“무언가 걱정이 되십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네.”
갑작스러운 변화가 항상 좋은 방향으로 뻗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더라도 실제로는 그 속이 썩어 문드러져가는 중일 지도 모르니까.
비슷한 일을 경험해 본 적 있는 베네딕은 루시의 변화가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다.
“자네도 알겠지만 우리 딸은 이 못난 애비 때문에 많이 비뚤어져 있었네.”
“그랬죠.”
베네딕이 자책을 하자 포셀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께서 돌아가신 후 하도 아가씨를 오냐오냐 하다 보니 아가씨는 구제불능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루시는 분명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허나 그것이 모두 다 그녀의 잘못이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만은 않았다.
결국 자식의 잘못은 곧 부모의 잘못인 법이니 말이다.
베네딕이 좀 더 엄격하게 루시를 키웠더라면 루시의 횡포가 그토록 심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아이가 하루 아침에 정신을 차리다니. 이게 정상적인 일을 아니잖나.”
“그렇죠.”
“혹시 짐작가는 부분은 없나? 오늘 하루 종일 루시를 지켜 보지 않았나.”
“그걸 알아봐야 하는 건 부모인 백작님의 역할입니다만.”
포셀이 진심어린 조언을 건네자 베네딕이 시선을 돌렸다. 아직까지도 베네딕은 진심으로 자신의 딸을 마주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분명 그녀를 아끼고 사랑하지만 동시에 그녀에게 진심으로 다가가는 걸 두려워하는 구제불능의 아버지를 보다 포셀이 한숨을 내쉬었다.
루시 아가씨가 망나니처럼 살았던 건 백작님을 닮아서 그런 게 아니었을까.
머리를 마구잡이로 휘저은 그는 잔에 든 와인을 단번에 들이키고는 목소리를 냈다.
“아가씨께선 축복을 받은 걸지도 모릅니다.”
“축복?”
“예. 칼 그 머저리가 말을 하길 자신이 루시 아가씨의 도발을 들은 후 감정조절을 하기 어려워졌다더군요.”
한 번 지울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긴 했지만 그 전까지 칼은 한 사람의 훌륭한 기사였다.
그 어떤 극한 상황 속에서도 돌발행동 한 번 벌이지 않고 해야 할 일만 냉정히 수행한 그는 믿음직스런 사람이었다.
괜히 그가 처벌 받지 않기를 기사단의 모두가 바랐던 것이 아니었다.
그런 녀석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할 정도였다면 칼이 어제 한 변명은 사실 변명이 아닐 수도 있었다.
“축복이라.”
“그 정도면 사람이 한 순간에 바뀔 이유잖습니까.”
“그렇지. 그렇고 말고.”
신께서 인간에게 내리는 축복이 하루아침에 사람을 바꾸어 버리는 일은 흔하다. 그런 사례가 어디 한 둘이던가.
만일 포셀이 추측하는 대로 루시가 축복을 받았다면 그녀의 변화는 그와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축복인가.”
“잘 된 일 아닙니까. 루시 아가씨도 언젠가 가문을 잇고 귀족의 의무를 져야 할 날이 올 테니까요.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베네딕은 포셀에게 답을 하지 않고 그의 손에 들린 와인 병을 빼앗아 자신의 잔에 따랐다.
와인을 한 모금 들이킨 베네딕은 입 안에 퍼지는 여러 복잡한 향기에 미간을 찌푸렸다.
“고급이긴 한 모양이야. 하지만 내 취향은 아니군.”
“귀족이시면서 와인도 못 드십니까?”
“나한테는 드워프들이 마시는 맥주가 훨씬 나아.”
베네딕이 그리 투덜거리자 포셀은 한바탕 웃음을 지은 후 자신의 잔에도 와인을 따랐다.
“에반스의 던전으로 가는 게 지금으로부터 일주일 뒤인가.”
“예. 그렇습니다.”
“돌아올 때까지 우리 딸을 잘 좀 부탁하겠네.”
“걱정 마십시오. 저희가 에반스 던전에 훈련을 가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입니까? 아무런 일도 없을 겁니다.”
*
포셀과 함께 지옥 같은 며칠을 보낸 어느 날 훈련장에 왔더니 몸을 풀고 있는 칼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자기 덩치의 두 배는 될법한 짐을 멘 채 훈련장을 내달리고 있었다.
비 오듯 땀이 쏟아지는 걸로 보아서 십분 이십분 달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감옥에서 나온 걸 보면 처벌은 끝난 거 아닌가? 왜 저러고 있는 거지?
몸을 풀며 그를 구경하고 있으려니 지난번부터 부쩍 아는 체를 하기 시작한 대머리 기사가 내게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아가씨.”
‘안녕하세요. 기사님.’
“안녕. 대머리. 오늘도 반짝반짝하네?”
“물론이죠! 매일 깨끗하게 닦고 있으니까요!”
자신의 말끔한 머리에 자부심을 지닌 이 기사는 대머리라는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이는 특이한 인간이었다.
덕분에 메스가키 어로 아무리 모욕을 해대도 아무런 데미지도 입지 않더라.
‘기사님. 칼이 왜 저러고 있나요?’
“대머리 기사. 저 허접은 왜 저러고 있는 거야?”
“벌 받고 있는 겁니다.”
대머리 기사가 설명하길 근신은 어디까지나 가문에서 내린 처벌일 뿐. 기사단에서 내리는 처벌과는 별개라는 듯 했다.
그 처벌이 지금 하는 달리기인거야? 군대로 따지면 군장을 이고 연병장을 도는 느낌인가.
‘언제까지 저러고 있어요?’
“쟤 언제까지 저러는데?”
“출정을 나갈 때까지는 계속 할 겁니다.”
계속이라는 건 자고 먹는 것 같은 시간은 빼고 말하는 거지? 맞지? 그치? 설마 잠도 안 자고 계속 달리게 할 건 아니잖아.
“아마 계속 할 것 같은데요.”
우와. 게임 속 세상이라서 그런가 처벌의 수위도 장난이 아니네.
저걸 하루 종일? 그냥 뛰다가 뒤지라는 거 아냐?
그건 곤란한데. 저 녀석 내 부하란 말야.
“괜찮을 겁니다. 예전엔 저런 걸 일주일 넘게 한 적도 있거든요.”
‘…그러고도 어떻게 살아 있어요?’
“그러고도 살아 있다고?”
“기사니까요.”
소울 아카데미 속 기사라는 존재가 인외의 다른 표현이었던가?
…잘 생각해보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보다 아가씨. 포셀님이 전해달라는 말이 있습니다.”
‘뭔가요?’
“뭔데?”
“몸을 풀고 나서 대련장 쪽으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내일 출정을 하기 전에 실전을 경험해봐야 하지 않겠냐 그러셨습니다.”
실전? 이 훈련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