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Chapter 120

유스티나의 집 앞에는 적당한 크기의 광장이 있다.

옛날… 아주 먼 옛날에는 종종 일족 전체가 이 광장에 모여 대소사를 의논하거나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일이 많았다.

아니, 사실 일족 전체라는 말은 어폐가 있었다.

그때 당시 정화자 일족의 수는 지금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아서, 이 광장에 다 모일 수 없었으니까.

‘그때 이후로 이 광경을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거늘….’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

질서정연하게 도열한 모습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한데 모인 광경은 유스티나로 하여금 감회에 젖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족장님?”

“…음? 왜 부르느냐?”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아.”

감회에 젖은 시간이 너무 길었던 걸까.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린 유스티나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얼굴들에 걱정이 담겨 있는 것을 눈치챘다.

“아무것도 아니니 내려가거라.”

“예.”

단호하게 내려진 축객령에 남자가 단상 밑으로 내려갔다.

유스티나는 아무 의문도 갖지 않고 자신의 말을 따르는 뒷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아티샤는 이런 걸 싫어했었지.’

권위적으로 느껴진다고 했던가.

하지만 유스티나는 정당한 권위는 통솔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했다.

일족과 허물없이 지내는 것도 물론 좋지만, 통솔하는 자는 무게를 보여야 할 때가 있었으니.

‘이 사람은 믿고 따를 수 있다’라는 신뢰를 주기 위해선 그편이 더 나았다.

유스티나의 말을 들은 아티샤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루지 않은 것으로 대우받고 싶지는 않아….’

“제법 귀여운 생각이니라….”

아티샤는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과 대우를 받는 게 부모 덕분이라고 생각했지만.

유스티나가 보기에 아티샤는 대우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이건 그녀가 아티샤의 어머니라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의 행동을 보고 자라서인지, 아티샤는 언제나 일족의 안녕을 위해 고민했으니.

차원수가 나타났을 때 누구보다 앞에 싸운 것이 그 증거 중 하나였다.

짧은 회상을 마친 유스티나의 시선이 좌중을 훑었다.

그녀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웅성거리던 소리가 차츰 잦아들더니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사정은 다들 알고 있다고 믿겠느니라.”

유스티나는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맥락 없이 시작된 말임에도 고개를 젓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혹시, 이 계획을 반대하는 녀석이 있느냐? 물론 반대한다고 해도 철회할 생각은 없느니라.”

농담조로 곁들인 말에 작은 웃음소리가 군데군데에서 터져 나왔다.

미소를 지은 채 내려다보던 유스티나가 얼굴을 굳혔다.

“또한, 이제 와서 미주알고주알 떠들 생각도 없느니라. 그런 건 이미 한차례 하지 않았더냐. 같은 말을 두 번 해봐야 지겹기밖에 더 하겠느냐.”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에게 설득당한 직후, 유스티나는 일족을 불러 모아 계획을 설명했다.

물론 그때도 동의를 구한 건 아니었다.

그렇게 결정했으니, 너희는 마땅히 따라야 한다는 태도.

반박은 없었다.

“이 일이 끝나면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니라.”

변화가 좋든 싫든, 지금의 삶으로는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유스티나는 그녀를 향해 당당하게 말하던 어린 소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소녀의 얼굴엔 한 치의 의심도 어려 있지 않았다.

에델의 말 때문에?

그렇다고 하기엔 말하는 걸 보면 딱히 신앙심이 깊어 보이지 않는다.

아마 소녀가 믿는 것은 소녀 자신의 강함이지 않을까, 라고 유스티나는 오랜 세월로 인해 쌓인 연륜으로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반면, 유스티나와 그녀의 일족은 창조주인 에델의 말을 믿었다.

유스티나가 소녀에게 설득된 결정적인 이유도 에델이 했다는 말 때문이었으니, 그들의 신앙심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서로 믿는 것은 다르지만 향하는 곳은 같다.

그러니 힘을 합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생각이 바뀐 녀석은 아무도 없는 것 같구나.”

유스티나의 말이 끝나고 제법 시간이 흘렀는데도 광장에 모은 이들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오히려 아까보다 결연한 빛을 띤 면면을 찬찬히 훑어보던 유스티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하겠느니라.”

유스티나의 손이 올라가고.

마을을 감싼 거대한 결계가 서서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 * *

살다보면 한 번 정도는 그런 일 있지 않나?

옷에 튀어나온 실밥이 거슬려서 쭉 당겼더니 옷이 풀려서 당황했던 경험 말이야.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광경이 딱 그것과 비슷했다.

결계는 옷, 마기는 옷을 이루는 실.

결계에서 떨어져 나온 마기의 실이 나풀나풀 흩날렸다.

저대로 놔두면 분명 공기 중으로 덧없이 흩어져 버리겠지만.

유스티나를 비롯한 마족들은 그것을 능숙하게 유도해서 한 곳으로 차곡차곡 모았다.

“숨이 조금 답답하네요….”

결계가 반 정도 허물어졌을 때.

지켜보던 셀린이 말했다.

힘들어도 곧이곧대로 말하지 않는 셀린이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지금 느끼는 압박감이 상당한 모양이었다.

“그렇긴 하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거리가 좀 있는데도 이 정도의 압박감이 느껴진다니.

공기 중의 모든 마기가 나를 굴복시키기 위해 압박하는 느낌.

…인정하긴 싫지만, 뱀 새끼를 처음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드네.

며칠 전, 승천 의식을 치르기 전에는 지금보다 마기가 최소 두 배 이상 짙었다는 거잖아.

그런 환경에서 몇 날 며칠을 버틸 수 있을까.

‘글쎄.’

나라고 해도 그건 자신이 없었다.

솔직히 지금까지는 조금 만만히 봤었는데, 이렇게 마기가 모이고 나니 락시아에 ‘마대륙’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를 실감했다.

물론 인간들은 마족들의 고향이라는 의미로 그렇게 지은 거겠지만 말이야.

“켈록…!”

“…괜찮아? 힘들면 들어가도 돼.”

“으, 으음…. 아냐. 아직은 버틸 만해….”

제일 경지가 높은 나.

나만큼은 아니어도 보통 사람들은 쉬이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있는 셀린.

우리 둘이 압박을 느끼고 있는데, 가장 경지가 낮은 다은이 멀쩡할 리 없었다.

셀린의 신성력이 강렬하게 빛을 발하며 다은을 감싸고 있는데도, 다은의 안색은 금방이라도 피를 토할 것처럼 창백했다.

꿀꺽-

품에서 병을 꺼내든 다은이 내용물을 들이켰다.

피처럼 붉은 포션을 단숨에 해치운 그녀가 잠시나마 숨을 돌렸다.

벌써부터 저렇게 힘들어하면 나중에는 졸도해도 이상하지 않겠는데.

‘그라시드.’

-…왜 부르나.

‘…삐졌어?’

왠지 모르게 그라시드의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들렸다.

아차, 목소리가 아니라 사념이지.

-딱히 그런 건 아니다. 말을 걸어도 무시하다가 용건이 있을 때만 찾는 게 괘씸해서 그럴 뿐.

‘음.’

확실히, 내가 그러긴 했지.

아니라고 하기엔 내가 한 행동이 있어서 차마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시답잖은 말을 하는 게 대부분이라 일부러 무시했는데, 듣고 보니 조금 미안하….

‘그럼 다른 사람한테 가든가.’

…기는 개뿔.

얹혀사는 주제에 불만이 많아.

무엇보다 아쉬운 건 저쪽이지, 내가 아니라서 굽힐 이유가 하나도 없는걸.

-크흠. 그 정도로 괘씸하진 않았다.

‘그건 조금 아쉽네.’

-…후우. 그래서 나는 왜 불렀나.

‘아, 그렇지. 다은이 느끼는 부담을 덜어줄 수 있어?’

-농담하는 거냐? 제법 재미있는 농담이었다.

‘역시 안 되나.’

-마기 대신 마나로 터뜨려 죽일 생각이라면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하기야, 그라시드의 마나를 다은이 견딜 수 있을 리 없지.

혹 떼려다 혹 붙이는 격이려나.

반지를 빼서 다은에게 주면 되기야 할 텐데.

-싫다.

‘응. 그러시겠지.’

예상을 조금도 빗나가지 않은 반응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에? 카나야?”

“이러면, 조금 더 낫지?”

반지를 낀 손으로 다은의 손을 맞잡았다.

직접 끼는 것보다는 못하겠지만, 무려 드래곤이 직접 만든 물건이니 어느 정도 효과가 있겠지.

내가 불쑥 손을 잡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던 다은이 배시시 웃었다.

“응. 확실히 낫네.”

“그렇지?”

“역시 카나가 최고야. 헤, 부드럽다아….”

“…괜찮은 거 맞지?”

효력을 느끼라고 했지, 내 손 감촉을 느끼라고 한 적은 없는데.

분명히 효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 반응을 보니 살짝 의심이 가는 것도 사실이었다.

…정 안 되겠다 싶으면 강제로 집에 밀어 넣어야겠다.

그러는 사이에도 결계는 빠른 속도로 허물어졌고, 그에 따라 주변에서 느껴지는 압박감도 심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결계가 완전히 사라졌다.

“…후우.”

이미 한참 전부터 셀린의 성법이 강하게 발현되고 있는데도 허리를 쭉 펴고 꼿꼿하게 서 있는 게 쉽지 않았다.

셀린은 휘청거리면서도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지만, 다은에 이르러서는 아예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있었다.

다은의 옆, 빈 포션병들이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모든 준비가 됐느니라.”

마족들도 안색이 한층 창백해진 가운데, 홀로 멀쩡한 빛을 띤 유스티나가 나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물끄러미 나를 보던 그녀가 문득 입꼬리를 올렸다.

“그다지 평안해 보이지 않구나. 이제 물러날 생각이 들었느냐?”

“물러나고 싶다고 해서 물러날 수는 있고?”

“당연히 안 되느니라.”

“실없는 소리하기는.”

“…앗!”

핀잔을 주며 다은의 손을 놓았다.

한발 늦게 손을 놓은 걸 눈치챈 다은이 아쉬운 소리를 내며 애꿎은 허공을 휘어잡았다.

“다녀올게.”

“나, 나도 같이 가면….”

“안 되는 거 알잖아.”

“….”

내가 가리킨 것은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검은색 소용돌이였다.

다은이 저기에 발을 들인다면 마기 중독으로 죽는 건 고사하고, 온몸이 갈기갈기 찢길 것이다.

그렇기에 셀린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돕기로 한 것 아닌가.

“걱정하지 마. 금방 끝내고 돌아올 테니까.”

“아…!”

작별 인사도 아닌데 질질 끌 필요 없겠지.

뒤에서 들리는 탄식을 무시하며 나는 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덩치는 작은 녀석이 속은 사내대장부 못지않구나.”

“칭찬이야?”

“그건 네 성공 여부에 따라 달라지느니라.”

“그럼 칭찬이네.”

유스티나의 말을 적당히 받아넘기며 마기를 향해 한 발 더 나아갔다.

“까먹었을 수도 있으니 마지막으로 알려주겠느니라.”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저 안에 들어가면, 몸에 있는 마나를 모두 비우고 네가 흘려보내는 마기를 받아들이라는 거잖아.”

“그렇느니라.”

승천 의식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는 몇 번이나 들었다.

내가 기억하는 게 맞다는 확답까지 들은 이상 더 지체할 필요 없겠지.

“갈게.”

“부디, 성공하시길….”

나는 셀린의 짧은 배웅을 끝으로, 마기의 소용돌이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흐윽!”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압박감이 짓쳐들어왔다.

잠시라도 힘을 뺀다면 압박감에 무너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느낀 나는 이를 악물고 마나를 끌어올렸다.

카가가각!

몸에 일어난 분홍색 마나와 황금색 신성력이 부드러이 어우러져 마기의 칼날에 맞서 싸웠다.

한 발, 그리고 두 발.

태산처럼 몸을 내리누르는 압박감을 이겨내며 걷다 보니, 어느 순간 귀에 들리던 불쾌한 소음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러나, 숨을 쉬기 힘들 정도의 마기는 그대로였다.

‘태풍의 눈도 아니고….’

속으로 투덜거리는 것도 잠시.

할 일을 깨달은 나는 곧바로 몸에 있는 마나를 풀어놓았다.

상당히 많은 양을 풀어놓은 덕에 주변 마기가 희석됐는지 호흡이 조금 더 편안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아무 차이 없는데 그냥 그렇게 느끼는 걸지도.

“하아.”

돌이킬 수 없다는 말은 이미 몇 번이고 했지만….

이제는 정말, 정말로 돌이킬 수 없어.

마나를 모두 비워낸 이상, 밖으로 나가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래서 나는, 쓸데없는 짓에 시간을 할애하는 대신 두 팔을 쫙 펼쳤다.

“…!”

마기를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을 먹자마자, 주변을 떠돌던 마기가 일제히 몸에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난폭한 그라시드의 마나와도, 내가 다루던 마나와도 다른.

질척하고 끈적한, 오염된 마기.

“쿨럭!”

미처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어렴풋한 빛 속, 바닥에 토해낸 핏덩이는 평소의 붉은색이 아닌 칠흑 같은 검은색을 하고 있었다.

“아….”

털썩!

다음 순간.

나는 어느새 무릎을 꿇은 채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일어서기 위해 몇 번이고 안간힘을 썼지만, 축 늘어진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굳이 일어나야 할까.’

문득 그런 생각이 스치자, 마음이 평온하게 가라앉았다.

그래. 굳이 애써서 일어날 필요 없어.

어렵지 않잖아?

그냥, 눈을 감고 나를 어둠 속으로 이끄는 손길에 몸을 맡기면 되는 거야.

그렇게 하면 몸을 갉아 먹는 이 고통도 느끼지 않아도 될 테니까.

“…응. 그렇게 하자….”

나는 나를 반겨주는 포근한 어둠 속으로 고요히 침잠했다.


           


I Became a Raid Boss

I Became a Raid Boss

레이드 보스가 되었다
Score 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One day, when I came to my senses, I found myself reincarnated in another world. After enduring a rough life post-reincarnation, I thought I could finally settle down, quietly tending to a flower garden in the mountains… …But something feels off.”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