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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20

트리니티 연구소는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고, 관악구는 지옥처럼 변모했다.

사방을 휘젓는 촉수들.

모든 것을 삼키는 검은 물.

제임스가 보기에 하늘도 지상도 안전하지 않았다.

하늘 대신에 자리 잡은 뒤집힌 검은 바다에서 솟아오른 촉수들이 헬기들을 붙잡고 검은 바다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원거리에서 촬영하던 방송국 헬기들이었다.

아마 저 헬기들은 이 정도 거리면 안전할 거라고 판단 했던 거겠지만, 이미 관악구 전체는 촉수로 가득한 위험 지역이었다.

관악구에서 안전한 곳은 아마 이곳뿐일 것이다.

회색 사신이 만들어 낸 백색의 대지만이 관악구에서 안전했다.

제임스는 고개를 숙여서 하얀색 보드라운 대지를 쓰다듬었다.

이건… 마시멜로인가?

지옥에서 올라온 것 같은 촉수들을 막아주는 마시멜로 섬이라.

마치 동화 속 이야기 같군.

하늘에서는 끊임없이 거대 촉수들이 내려치고 있었지만, 저 촉수들이 제임스 일행에게 도달하는 일은 없었다.

회색 사신의 머리 위에서 타오르고 있는 0호 유물 덕분이었다.

0호 유물이 뿜어내는 태양 같은 빛은 가까이 다가오는 촉수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태워버리고 있었다.

“허, 0호 유물에 저런 능력이 있었다니….”

제임스는 자신이 오랜 기간 연구했던 0호 유물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고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얀빛은 왠지 성스럽고 신비롭게 느껴졌는데, 언제나 공포에 질려 호들갑을 떠는 통역사도 입을 다물고 얌전히 구경할 정도였다.

하얀 광원 아래, 바닥에 쓰러져 회색 사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귀.

그 앞에 서서, 아귀를 바라보는 회색 사신과 황금 사신들.

아귀와 시선을 교환하던 회색 사신은 천천히 손을 위로 뻗었다.

손을 향해 점점 다가오는 하얀 구체.

구체가 회색 사신의 손에 닿는 순간,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빛에 제임스는 눈을 감았다.

제임스가 다시 눈을 뜨고 상황을 확인했을 때는 이미 하얀색 구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대신 회색 사신의 몸이 하얗게 빛났다.

빛나는 회색 사신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가, 쓰러진 아귀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그러자, 아귀가 재로 변해서 흩날리기 시작했다.

흉포하게 생긴 아귀였지만, 재로 변해서 날아가는 모습은 왠지 편안해 보였다.

아귀가 재로 변하자, 태양처럼 빛나던 회색 사신은 더 이상 빛나지 않게 되었다.

회색 사신이 0호 유물을 먹어버린 건가?

정황상 그렇게 보는 게 맞겠지.

아귀는 재가 되어버렸고, 빛나던 0호 유물도 사라졌다.

하지만 회색 사신의 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회색 사신이 쪼그려 앉아서 마시멜로에 손을 얹자, 마시멜로 대지에서 뭔가가 튀어나왔다.

둥글고 커다란 마시멜로 동산.

그 동산에 팔다리와 꼬리가 돋아났다.

그리고 눈과 입이 생겨나자, 그것은 어떤 오브젝트의 형상을 띄기 시작했다.

귀여워지고.

촉수가 없고.

엄청나게 커다래진 하얀 아귀.

기존 아귀보다 배는 커진 아귀는 커다란 입을 벌리고 돌고래 같은 소리를 냈다.

뀨!

그러자 마시멜로로 된 피부에서 하얀색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 그대로 해파리를 향해서 돌진했다.

순식간에 촉수를 태우는 불꽃의 갑옷을 두른 채로!

***

해파리의 촉수에 온몸이 뚫리고, 마시멜로의 대지 위에 널브러진 아귀.

그 아귀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왠지 그 눈빛이 자신을 죽여달라는 것으로 보였다.

아귀의 파괴 조건은 <시작의 오브젝트가 만든 돌.>이었다.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아귀.

갑자기 내 머리 위로 날아와서 활활 타오르는 하얀 돌멩이.

이 두 가지를 엮어서 생각해 보면, 역시 내 머리 위에 떠있는 구체가 ‘시작의 오브젝트가 만든 돌’인 거겠지.

고개를 올려서 돌멩이를 바라보자, 어떻게 해야 할지 느낌이 왔다.

해본 적이 없지만 익숙한 느낌.

나는 능숙한 동작으로 한 손을 돌을 향해 뻗었다.

돌이 내 손에 닿는 순간, 내가 ‘모르는 기억’이 떠올랐다.

기억 속의 나는 커다랗고 하얀 무언가를 대면하고 있었다.

엄청 커다란 개구리?

아니면 반들반들해진 아귀?

어쨌든 지금의 아귀랑 비교도 안 되게 커다란 하얀 개구리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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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의 나는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말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따뜻하고 슬픈.

부탁하는 느낌의 언어.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모르는 기억’ 속에서 본 것과 똑같은 개구리가 내 눈앞에 있었다.

아귀가 파괴되고, 새롭게 생겨난 미니 사신 정원의 오브젝트.

하얀 아귀.

미니 사신 정원 때문인지, 기억 속에서 봤던 하얀 녀석이랑은 사소한 차이가 있었다.

흙이 아니라 마시멜로로 만들어졌다는 사소한 차이.

그래서인지 왠지 맛있어 보였다.

말랑말랑해 보여서 한입 베어 물고 싶게 생겼다.

맛있을 것 같아.

뭔가 기대하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길래, 천천히 다가가서 다리를 통통 두들겨 줬다.

그리고 손으로 살짝 뜯어서 냠냠.

옴뇸뇸.

역시 예상대로 뽀송뽀송하고 맛있는 진짜 마시멜로였다.

내가 먹는 걸 보고 기쁜 듯이 웃던 하얀 아귀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돌고래처럼 울리는 목소리로 귀엽게 울었다.

뀨!

그리고 온몸에 하얀 불꽃을 두르고 해파리를 향해서 돌진했다.

촉수를 태우고 종횡무진 뛰어다니는 하얀 아귀.

와, 생각보다 잘 싸우네.

저 정도면 제임스 일행의 보호는 맡겨놔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저런 식으로는 거대 해파리를 쓰러트릴 순 없다.

해파리의 파괴 조건은 꽤 난해하니까.

<말을 할 수 없지만 말이 많은 해파리를 죽이고, 폭풍의 눈에서 밤의 진주를 부숴라.>

흐음, 도대체 말이 많은 해파리가 뭘 의미하는 걸까?

나는 검은 점액의 바다를 가득 메운 미니 해파리들을 바라보면서 막막한 감정을 느꼈다.

우선 생각나는 방법을 모두 시도해 봐야겠어.

***

제임스는 마시멜로 위에 편하게 앉아서 하얀 아귀의 분투를 구경하고 있었다.

거대한 하얀 아귀가 하늘을 지배하는 거대 해파리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상당히 커다란 하얀 아귀였지만, 거대 해파리와 비교하면 어른과 갓난아기 이상의 크기 차이가 났다.

그 엄청난 크기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얀 아귀가 몸에 두르고 있는 하얀 불꽃은 거대 해파리를 상대로 우위를 가지게 해줬다.

해파리의 거대한 촉수들은 하얀 아귀에게 닿는 것만으로도 허무하게 불타올랐다.

하얀 아귀는 기회가 날 때마다 거대 해파리에 점프로 올라타서, 그 몸통을 사정없이 물어뜯고 찢어발겼다.

하지만 해파리는 순식간에 상처를 재생하며, 아귀를 떨쳐내었다.

그야말로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 괴수들의 전쟁이었다.

그런 치열한 전투 한복판에서 제임스는 편하게 앉아서 과자를 먹고 있었다.

기묘한 상황이었다.

분명 위험한 곳인데도, 편안한 기분이 느껴지는 이 기묘한 상황.

하얀 아귀가 분투하는 동안, 황금 사신들은 어디선가 먹을거리를 들고 와서는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문제는 주는 음식이 자기 취향에 맞춘 것인지 마시멜로, 푸딩, 사탕 같은 것뿐이었다.

그리고 회색 사신 아종이 또 한 종류가 늘어나 있었다.

푸른색을 띠고 반투명한 미니 사신.

푸른 사신은 사람들 시선을 부담스러워하는지 시야 밖에서 움직였는데, 시선을 주면 투명해진 채로 도망가 버렸다.

과자를 먹어도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상황은 대부분 푸른 사신이 한 짓이었다.

가장 중요한 회색 사신은 뭔가 이상한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검은 점액 속에서 해파리를 건져내서 쪼개거나, 귀를 가까이 가져가거나, 주먹으로 때리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가끔 해파리를 고문하는 것 같기도 했는데,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뭔가를 노리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아무런 결과를 못 내고 있는지 회색 사신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회색 사신이 앉은 자리 옆에는 건져낸 해파리 사체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회색 사신은 그 시체의 산을 발로 차서 점액 속에 집어넣어 버리더니, 박수를 쳐서 황금 사신들을 잔뜩 불러 모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황금 사신들과 회색 사신의 시선 교환.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이어진 시선 교환이 끝나자, 황금 사신들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검은 물속으로 잠수를 시작했다.

퐁당퐁당.

황금 사신의 표정은 정말 싫은 표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한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검은 바다 위로 수많은 해파리의 사체가 둥실둥실 떠오르기 시작하자, 회색 사신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찰싹찰싹.

잠을 자고 있었는데, 눈꺼풀을 누군가 마구 때렸다.

정신 차리고 보니, 보이는 것은 매우 화난 황금 사신이들의 모습.

아, 그러고 보니 나도 같이 검은 물속에 들어간다고 했었던가?

뚜시뚜시.

내 표정에서 원래부터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황금 사신이들이 마구 달려들어서 작은 주먹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황금 사신들과 투닥거리던 도중 커다란 소리와 진동이 울렸다.

깜짝 놀라서 바라보니, 검은 바다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용오름이 솟아오르고, 맹렬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말을 할 수 없지만 말이 많은 해파리를 죽이고, 폭풍의 눈에서 밤의 진주를 부숴라.>

파괴 조건에서 말하던, 폭풍의 등장이었다.


           


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Artist: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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