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0
페이비는 이전에 교회의 성기사들과 함께 던전 공략을 해 본 일이 몇 번인가 있었다.
아카데미의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던전을 공략할 줄을 알아야 했으니 그를 배우기 위해서라도 던전에 들어가야만 했었지.
위험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주신 교회의 성녀인데 그녀와 함께하는 이들이 어찌 가볍겠는가.
어지간한 가문이라면 단장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실력자들이 급이 낮은 던전을 공략하러 온 셈이었으니.
굳이 따지자면 페이비는 던전을 공략했다기보다는 던전을 체험하고 왔다고 해야하리라.
그렇지만 그녀를 가르친 이들의 실력이 출중했으니만큼 페이비는 일반적인 던전 공략이 어떤 형식으로 진행되는지에 대해선 제대로 배웠다.
그녀가 아는 던전 공략은 조금 더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던전이라는 것은 언제나 미지에서 시작되는 공간이니만큼 모든 것을 상정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야했다.
어떤 마물이 어디에서 나타날까.
이 길에는 함정이 있지 않을까?
이게 올바른 길인 걸까?
우리 체력은 다음 전투에도 버틸 수 있는 수준인 걸까?
물론 압도적인 기량으로 모든 변수를 깨부숴버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지만 보통은 얼어붙어 있는 호수를 건널 때처럼 조심스러워야만 했다.
허나 루시 알른의 던전 공략은 달랐다.
그녀의 던전 공략은 대본이 쓰여 있는 하나의 극이었다.
던전이라는 무대의 위에서 루시 알른이라는 감독이자 각본가이자 배우가 연극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건 던전을 공략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루시가 말을 하는 대로 이루어지는데 이를 어찌 공략이라 하겠는가.
“열 걸음 뒤에 코너를 돌아서 정면. 좆밥 오크 셋. 내가 선두에 서고 밀어 넘어트리면서 지나갈 거야.”
마물이 있는지 없는지도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루시가 지시를 내렸지만 그 누구도 토를 다는 사람이 없었다.
페이비도 그러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골목을 돌자마자 오크 셋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던전에 들어왔을 적에 페이비는 루시가 하는 말을 의심했다.
아무리 루시가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무수한 변수로 가득한 던전에서 단정을 짓듯 지시를 내리는 건 불가능하다 생각했으니까.
허나 루시는 당연하단 것처럼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다.
최초에 페이비는 그를 우연이라 생각했다.
허나 그 우연이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반복이 되었으니 우연은 필연으로 바뀌었다.
루시는 던전의 안에서는 신의 기적을 얻은 것처럼 전지했던 것이다.
그 기적을 몇 번이고 구경하던 페이비는 자연스레 이런 생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게 바로 아르마디의 사도라는 걸까.
아르마디의 사랑을 받는 자는 이런 일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걸까.
“흐엑!?”
페이비의 생각은 루시가 오크에게 들이 받음에 따라 무너져 내렸다.
루시의 어깨에 업혀 있던 그녀는 루시가 충격을 받음에 따라서 똑같이 충격을 받아야 했으니까.
바닥에 나부러진 오크를 루시가 자신의 갑옷으로 짓밟고 통과한 후 페이비는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고는 자신에게 멀미방지의 기적을 사용했다.
흐으.
어쩔 수 없이 업히기는 했지만 이것도 편하지는 않네요.
물론 알른 영애와 똑같이 달리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만요.
페이비는 처음에 루시에게 업히는 걸 거절했다.
아무리 그래도 페이비는 성녀다.
최소한의 위엄과 품위는 지켜야 하는 입장에서 자기보다 한참은 자그마한 체구를 지닌 사람의 어깨에 짐짝처럼 업히는 것은 쉬이 수긍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괜찮겠어요? 성녀님의 허접한 체력으로는 중간에 나가떨어질 텐데?’
‘괜찮아요.’
아무리 체력적으로 힘들다 할지라도 버텨내보겠다 다짐했던 페이비였지만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오만했음을 인정해야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폐가 아파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상황에서 세 걸음 걷다 넘어져 바닥에 머리를 박기를 반복하다보면 자연스레 고개를
숙이게 됐던 것이다.
세상에는 정신력만으로 되지 않는 것도 있는 법이었다.
그렇게 페이비는 치욕을 감수하고 루시의 어깨 위에 올라탔고 방금 전까지 루시가 자신을 배려해 속도를 늦추고 있음을 깨닫게 됐다.
으으. 조이.
당신은 이럴 걸 알고 있었을 텐데 왜 아무것도 알려주시지 않은 건가요?
미리 말씀을 주셨다면 바닥에 널부러져 부끄러움을 살 일도 민폐를 끼칠 일도 없었을 텐데.
설마 조이 당신이 제게 골탕을 먹이려고 한 건 아니겠죠?
단순히 잊어버리신 거라면 무어라 하지 않겠지만 의도적이었다면 설교를 해줄 거에요!
“또 마물이야.”
페이비가 결심을 하건 말건 루시의 발은 쉬지 않았고 던전의 공략은 순조로히 진행됐다.
10층.
20층.
30층.
40층.
50층.
60층.
층계가 위로 올라감에 따라 던전의 크기가 넓어져서 조금씩 시간이 지체되기는 했으나 그 뿐이었다.
파티의 속도는 조금도 느려지지 않았다.
어지간한 군마와 비슷한 속도로 내달리고 있는 지금조차도 이들은 체력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루시의 어깨에 업힌 페이비는 흔들림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지쳐가고 있는데 말이다.
현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무재를 지닌 두 분이 극한까지 단련을 하면 이런 수준이 되는 거군요.
대체 조이는 평소에 이 사람들을 어떻게 따라다닌 걸까요.
던전에 들어오기 전에 켄트 영애께서 제게 힘내라는 말을 한 이유를 알겠어요.
이건 평범한 사람들이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에요.
그렇게 70층의 보스룸으로 향하기 직전 루시가 페이비를 바닥에 내려 준 후 주변을 둘러봤다.
“허접 검사. 괜찮아?”
드디어!
드디어 조금 쉴 생각이신가보네요?
짐덩이처럼 매달려 다니는 상황에서 민폐가 될까봐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페이비는 지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 선 그 누구보다도 휴식을 갈망하고 있었다.
페이비는 침을 꿀꺽 삼키며 프레이의 표정을 살폈다.
이상하게도 프레이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무얼 고민 하시는 건가요?
그냥 쉬다 가자고 하면 되잖아요.
아무리 알른 영애나 켄트 영애께서 경이로운 체력을 지니고 있다 해도 아카데미의 1학년 생인 걸요.
던전에 대해 모든 걸 파악하고 있더라도 휴식 없이 내달리다가는 사고가 날 거에요.
그러니까 쉬어야 해요.
반드시!
“괜찮아. 멀쩡해.”
허나 프레이의 입에서 나온 것은 그녀의 기대와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괜찮다뇨?
70층을 올라오는 동안 전력질주를 하셨으면서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나요!
지금 숨이 벅차오르고 계시잖아요.
그러다 70층의 보스를 상대할 때 실수를 하시면 어떡하나요.
물론 여태까지의 보스는 알른 영애께서 철저히 준비를 해왔기에 변변찮은 전투 없이도 상대를 박살낼 수 있었지만 이번엔 다를지도 모릅니다.
알른 영애께서 쉬자고 하는데는 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요!
눈으로 프레이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던 페이비는 이내 루시와 눈을 마주치고는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내렸다.
“그럼 계속 가자.”
루시의 입에서 새 나온 말에 페이비는 체념하고서 다시 한 번 회복마법을 사용했다.
임시방편에 불과한 수준이었지만 이거라도 없으면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차라리 70층의 보스가 무척이나 까다롭고 어려운 상대였으면 좋겠네요.
그렇다면 반 강제적으로 쉬게 될 테니까.
허나 페이비의 기대는 이번에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침입자는 처분한다.”
보스룸에 진입하자마자 보스가 거대한 마법이 쏘았지만 그는 루시가 사용한 스크롤에 의해 가로 막혔고,
그 후에 루시가 또 다른 스크롤을 사용하자 보스가 사용했던 그 거대한 마법이 발동되어 보스의 머리를 날려버렸던 것이다.
그 모든 과정이 이루어지는 데 걸린 시간은 겨우 1분 남짓.
페이비의 지친 몸이 회복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바닥에 널부러지는 보스의 몸을 뒤로 한 채 루시가 페이비의 앞에 섰다.
이제는 모든 걸 내려 놓아버린 페이비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루시의 어깨에 업혔다.
*
던전에 진입하고 나서 반나절 가량이 지났을 무렵에 우리는 아카데미 던전 100층의 문을 앞두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공략을 하러 들어가고 싶었지만 페이비의 상태가 좋지 못해서 그럴 수 없었다.
100층을 편하게 공략하려면 그녀의 신성마법이 필수적이니까.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해서 시체마냥 매달려다니는 상태로 들어갔다간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른다.
아직 아카데미 던전이 닫힐 때까지는 여유가 있으니까 조금 쉬도록 할까.
발을 멈추고 페이비를 내려주었더니 그녀는 발을 딛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서 바닥에 쓰러졌다.
이게 게임일 적에는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성녀님의 흐트러진 모습이 신기했다.
소울 아카데미에서는 언제나 성녀다운 품위를 뽐내고 다니던 캐릭터였는데 말야.
하긴 성녀님도 사람인데 힘들고 지치면 어쩔 수 없는 거겠지.
페이비에게서 시선을 떼어 프레이 쪽을 살피면 그녀는 많이 지친 상태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힘들어서 못 움직일 상태는 아니었다.
나랑 같이 훈련을 하면서 프레이의 체력이 많이 붙기는 했네.
처음에는 체력이 부족해서 몇 번 씩 쉬면서 진행을 했어야 했는데 지금은 끝까지 이를 악물고서 따라붙었으니까.
덕분에 페이비가 파티에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던전을 공략하는 속도는 무척이나 빨랐다.
덕분에 한 번의 휴식도 취하지 못한 페이비는 죽어나가게 되었지만 어떡하겠는가.
이건 그녀가 던전 공략에 참여하겠다 고개를 끄덕인 순간부터 확정된 일인데.
극한의 체험을 하기 싫었으면 처음부터 거절을 했어야지.
사전에 고지를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러라고 법으로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난 잘못 없어.
꼬우면 자기가 알아보고 왔어야지.
그리고 말야. 난 고생을 시킨 만큼 제대로 된 대가를 선물해 준다고.
아카데미 던전의 최초 공략자라는 호칭을 떠먹여주는 거잖아.
이거 은근히 큰 명예라고.
게임에서도 명성이나 평판이 꽤 많이 올라갔으니까.
거기에 더해서 최초 공략자에게 주어지는 보상까지 있으니 하루 녹초가 된 것에 대한 보수로는 충분하고도 남지.
지금은 힘들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돌이켜 보면 아. 알른 영애께서 다 생각이 있으셨구나. 라면서 고마워 할 걸?
침묵 속에서 휴식이 이어지던 중 페이비가 널부러져 있다 얼굴을 붉힌 채 자세를 고쳐 잡았다.
이제야 정신을 차렸다 보네.
아직까지 체력이 회복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 그래도 대화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페이비.’
“허접 성녀님.”
“…네헷?!”
깜짝 놀라 답변을 하려다 혀를 씹은 페이비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실소가 새 나왔다.
점점 더 메스가키 스킬이 페이비를 왜 허접 성녀라고 부르는 지 알 것 같아.
가끔씩 진짜 허접한 모습이 튀어 나오네.
‘걱정마세요. 움직이자는 거 아니니까. 그냥 듣기만 하세요.’
“움직이라고 할까봐 놀랐어요? 푸훗. 진짜 허접하네요. 걱정마요. 그런 거 아니니까. 그냥 가만히 앉아서 듣기만 하세요.”
이번에는 페이비의 역할이 중요하니까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