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1
“문 너머에 기다리고 있는 건 허접한 용이에요.”
용.
그것은 하나의 생명체라 부르기보다는 일종의 현상이라 부름이 옳은 존재다.
개체에 따라 단신으로 일국을 멸할 수 있는 존재를 어찌 생물이라 여기겠는가.
그는 폭풍이나 지진, 해일과 같은 선상에 있는 현상이자 재앙이었다.
괜히 여러 나라들이 주신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반용협약을 맺은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 존재가 이 문 너머에 기다리고 있다고요?
페이비의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거짓이라는 단어가 스쳐지나갔지만 그는 이내 사라져버렸다.
지금까지 루시가 했던 말 중에서 거짓처럼 여겨졌던 것은 무수히 많았지만 그 중에 거짓된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이번에도 그렇겠지.
“정확히는 용의 영혼을 골렘의 육신에 담아 만들어낸 좆밥 누더기용이죠. 진짜 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허접 쓰레기지만 그래도 꼴에 용이라 강하긴 해요.”
원본이 되는 용이 하나의 재앙이라 여겨지는 만큼 아무리 열화된 존재라 할지라도 당연히 강할 수밖에 없다.
루시가 좆밥이니 허접이니 하는 비속어를 섞어가면서도 강하다는 걸 인정할 걸 보라.
아카데미 1학년 생에 불과한 그들로써는 상대하기 과히 어려운 상대일 터.
페이비는 문 너머에 있는 용의 모습을 상상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공략하기 힘들죠. 전 괜찮지만 약해빠진 허접검사에 친구처럼 얼빵한 허접성녀님이 함께니까요.”
“요점만 말해.”
약해빠졌다는 소리에 성이 난 걸까.
뒤에서 가만 이야기를 듣고 있던 프레이가 날선 목소리를 냈다.
살벌하다는 이야기가 절로 나올 듯한 음성이었지만 루시는 그를 듣고서도 익숙한 듯 실소를 흘릴 따름이었다.
“이게 따지고 보면 존나 음침한 사령술 비슷한 거거든요? 이쯤 되면 바보 같은 허접 성녀님도 아시겠죠?”
“정화.”
페이비는 사령술이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루시의 의도를 이해했다.
골렘의 육신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용은 용이니 만큼 상대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그냥 골렘을 상대해주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
골렘을 쓰러트리지 않아도 된다. 그 몸에 깃들어 있는 용의 영혼을 날려버리면 중심을 잃어버린 골렘은 저 알아서 무너져 내리게 될 테니까.
“물론 인간한테 도축당한 좆밥 용이라고 해도 용이라서 영혼을 정화하는 건 쉽지 않아요. 어지간한 자칭 사제들은 엄두도 못 낼 걸요? 그렇지만 여기에는 허접하긴 해도 타칭 성녀님이 계시잖아요?”
용의 원혼을 정화하는 것.
그는 보통의 사제들 수십 수백을 모은다 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용이라는 것은 아무리 짧아도 수백년의 세월을 산다.
그러면서 세상에 수많은 재앙을 떨치고 다니지.
그런 생명체가 지닌 원혼이 어디 가벼울 수 있을까.
과거 죽음에서 되살아나 사령이 된 용을 정화하기 위해 세 명의 주교가 뭉쳐야 했다 했으니 이 문 너머의 용이 아무리 약하다 한들 최소한 주교급의 사제가 이 자리에 서야 하리라.
원래라면 아카데미의 1학년이 그만한 신성을 지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그 자가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더라도 쌓은 세월이 부족하다면 어쩔 수가 없으니까.
허나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건 성녀였다.
현 주신 교회의 상징이라 여겨지며 수많은 곳에서 기적을 일으켰던 성녀말이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고 능력을 완벽히 사용할 수 없다 한들 그 몸에 깃든 신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니.
그녀가 지닌 신성은 충분히 용의 원혼을 정화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
“날로 먹자고요. 아카데미의 허접 교수님들이 얼마나 고생했든가 알바에요?”
키득거리며 웃는 루시의 계획은 실로 완벽해 보였다.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던전의 안에서 루시는 언제나 계획을 지니고 있었다.
던전의 층계를 통과할 때도.
10층마다 문을 지키는 보스를 상대할 때도.
꼭 신께서 이 던전을 공략하는 방법을 알려주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만약에.
악신의 사도가 알려주었던 것처럼 루시가 정말 아르마디의 사도라면.
그녀의 입에서 새 나오는 모든 계획들이 아르마디께서 내려준 것이라면.
그 안에 나의 이름도 담겨있는 걸까요?
아르마디께서는 제가 악신의 사도와 거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저를 믿고 계신 걸까요?
당신의 어린양이 헤매고 있음에도 올바른 길로 돌아올 것이라 여기시는 걸까요?
죄송합니다. 아르마디시여.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이겨내지 못하여 악신의 유혹에 넘어가버린 이 멍청한 어린양은 당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허접 성녀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든 페이비는 루시 알른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확신으로 가득 찬 채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을 말이다.
“할 수 있죠?”
설마 이것도 못하겠느냐는 듯한 루시의 눈길을 페이비는 멍하니 바라봤다.
가능할까?
물론 페이비는 정화의 기도를 수도 없이 해보았다.
그녀는 성녀로 활동을 하며 수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그 장소는 행복한 곳보다는 불행한 곳이 더 많았고.
웃음소리보다는 울음소리가 더 다양한 곳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진혼이라는 것은 새로운 장소에 향할 때마다 해야 하는 것이었다.
허나 페이비는 이번처럼 격이 높은 영혼을 정화해 본 적이 없었다.
이러한 업무는 대개 주교나 추기경들이 달라붙어서 해결했고 페이비는 그를 뒤에서 구경하기만 했으니까.
아마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의 페이비였다면 당연하다는 듯이 해보겠다고 했을 것이다.
아르마디께서 이 곳에 저를 보냈다는 건 자신에게 이 일을 맡겼다는 소리이니.
페이비는 자신이 아니라 아르마디를 믿으며 두 손을 모았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자신이 아르마디의 사랑을 받는 것인지 의심하게 된 지금.
악신의 사도와 거래를 하여 마음 속에 어둠을 품은 지금.
페이비는 도저히 할 수 있단 말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못하겠어요?”
하지만 그 다음에 내뱉어진 루시의 말에 페이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갤 저어 버렸다.
“아뇨. 괜찮아요.”
루시의 도발에 붉은 것이 스며들어 감정적으로 행동해버린 것이다.
자신이 실수 했음을 깨달은 페이비가 뒤늦게나마 정정을 하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그럼 가죠. 허접 검사 넌 뒤에서 허접 성녀님이나 지키고 있어. 괜히 움직이면 방해니까. 허접 성녀님은 들어가자마자 정화의 기도를 준비해요. 준비 끝나면 바로 쓰고.”
모두를 한 번 둘러본 루시는 아무 망설임 없이 보스룸으로 들어가는 거대한 문을 밀어서 열었다.
– 쿠오오오오!
그러자마자 문의 틈새 사이로 바람과 함께 고막을 진동시키는 거대한 울림이 들려왔다.
소리에 담긴 것은 원한이며 울분이고 증오였으니.
제가 과연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저 목소리에 담긴 것들을 끌어 안을 수 있을까요?
아르마디시여.
제발 대답을 해주세요.
이 부족한 어린 양에게 답을 주세요.
*
진짜 더럽게 시끄럽네.
귀청이 터질 것 같아.
영화관에서 빵빵한 스피커로 소리를 들었을 때도 이것보다는 조용했던 것 같은데.
용은 용이라 이건가.
문을 지나쳐 발을 디디기 무섭게 뒤편의 문이 닫히며 보스룸이 어둠에 물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 위에서 바람소리가 들려 왔고 무언가가 땅에 발을 디딤에 따라 지진같은 진동과 함께 보스룸에 새벽과도 같은 은근한 빛이 스며들었다.
– 쿠오오오오오!
그제서야 난 적의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보스룸 한 가운데에 존재하는 바위의 위에 서 있는 것은 용이었다.
바위로 만들어진 육신에 담긴,
과거 인간에게 사냥당하여서 여태까지 인간의 손에 놀아나고 있는 용.
이야. 오랜만이네.
1학기에 아카데미 던전 보스를 공략하는 건 들이는 수고에 비해 보상이 터무니없이 적어서 거의 하질 않았거든.
예전에 챌린지 형식으로 모든 보스 맨몸 클리어를 할 때 만나고서 거의 처음인 것 같은데?
그래도 문제는 없다.
이 녀석을 어떻게 사냥하면 되는지는 완벽하게 외우고 있으니까.
더욱이 우리한테는 성녀님이라는 치트키가 있거든.
진짜 운이 극한까지 따라 붙은 게 아니라면 이 시점에서 파티원으로 끌어들일 수 없는 성녀님이 말이야.
네가 지닌 원한이 깊으면 어쩔 건데.
그래봐야 정화되는 거 말고 아무것도 못하잖아.
응? 좆밥새끼야.
얌전히 뒈지고 우리한테 보상이나 바치도록 해.
페이비가 두 손을 끌어 모은 채 정화의 기도를 시작한 것을 확인한 나는 용을 향해서 입을 열었다.
“거기 누더기 좆밥 도마뱀♡ 인간한테 도축당해놓고 인간의 장난감 취급 당하는 기분은 어때?♡ 응?♡ 이런 여자애한테 욕이나 먹는 심정이 어떠냐고♡”
용의 붉은 색 눈동자가 나를 담음과 동시에 내 몸에 고양감이 차올랐다.
도발이 제대로 걸렸으니 이제 페이비에게 위협이 갈 일은 없어.
그럼 페이비가 정화를 시작할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되나.
그거야 쉽지.
게임 초반부에 저 용이 까다로운 이유는 하늘을 날아다니기 때문이다.
저 새끼 치사하고 치졸하게 하늘에서 거의 내려오질 않는다고.
저걸 떨어트리려면 원거리 공격을 퍼부어야 하는데 초반에는 원거리 공격 수단이 그리 많지가 못하단 말이지?
덕분에 저 놈을 사냥하는 건 더럽게 귀찮은 노가다가 되기 마련이다.
허나 지금은 다르다.
페이비가 용의 영혼을 정화하기만 하면 만사해결이니까.
그 때까지 버티는 거?
가뿐하지.
“아 맞다♡ 뇌가 없어서 말도 못하지?♡ 미안♡ 네가 허접♡ 좆밥♡ 병신♡ 도마뱀이라는 걸 잊어버렸네♡”
내 도발이 끝나기 무섭게 표효를 내뱉은 용은 날개를 펼치더니 드높은 공동의 위로 향했다.
생각해보면 여기를 만든 아카데미 교수들도 악질이야.
학생들한테 드래곤을 상대시키면서 드래곤의 최대 이점인 하늘은 그대로 놔두다니.
그래봐야 고인물한테 걸리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저 용의 패턴은 크게 두 개로 나뉜다.
날아다니면서 내뿜는 브레스.
용언을 이용한 마법의 난사.
일정 이상의 데미지를 먹어서 땅에 떨어졌을 때의 패턴도 있긴 하지만 그건 우리 알 바 아니다.
저 놈은 하늘 위에 떠 있다가 그대로 추락할 테니까.
자. 처음은 뭐냐.
방패를 치켜 든 채 가만 용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그 아가리가 벌려지는 것과 동시에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방금 전까지 내가 서있던 자리를 용의 브레스가 불태웠고 대지의 모든 것을 재로 만드는 불길이 내가 달리는 길을 따라 붙었다.
이 패턴은 쉽다.
그냥 무작정 달리기만 하면 되거든.
땅에 불꽃이 지속되는 시간이 있어서 달리는 루트를 잘못 잡으면 비명횡사하게 되지만 그건 나에게는 해당사안이 없다.
그야 난 고인물이니까.
도주 루트는 눈을 감고서 달릴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하지.
예전에 1레벨짜리 대머리 캐릭터로도 이 패턴을 가뿐히 피했었는데 스테미너 개쩔고 속도도 빠른 이 몸으로 못할 리가 없잖아.
그렇게 한참을 내달려 공동이 불바다가 되었을 무렵 용이 불을 뿜는 것을 멈추고 공동의 한 가운데로 향했다.
그리고는 두 날개를 펼치더니 재차 아가리를 펼쳤다.
두 번째 패턴.
마법의 난사.
저 패턴은 체력에 따라서 난사하는 마법의 종류가 달라지는데 지금은 풀피니까 사용되는 마법은 세 가지 정도다.
벼락.
대지의 창.
원혼 소환.
어느 쪽이라도 대응하는 건.
<정화의 기도가 시작되려 하는 구나.>
마법에 어떻게 대처할지 생각하던 때에 할배가 목소리를 냈다.
그새 준비를 마친 거야?
이야. 역시 성녀님이라니까.
100층까지 업고서 데려온 보람이 있네.
하늘에 떠오른 용이 단순한 조각상이 되어 떨어지기를 기다리던 나였지만 안타깝게도 내 기다림은 보답 받지 못했다.
용이 마법을 쏘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땅에서 피어난 창을 옆으로 구르는 것으로 피한 나는 페이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닥을 바라보는 페이비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어 있었다.
…설마 기도에 실패한 건가?
페이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