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4
<가위바위보라. 무인다운 선택이구나.>
승리를 확신한 채 프레이를 노려보던 그 순간 할배가 갑자기 목소리를 냈다.
무인다운 선택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에요?
가위바위보와 무인이라는 단어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거죠?
<모르고 한 게냐?>
‘가위바위보는 운게임이잖아요.’
굳이 실력적인 요소를 따지자면 심리전으로 들어가야겠지만 단판전에선 운의 영향이 가장 크지 않나?
그래서 프레이한테 단판으로 하자고 요구한 건데.
<무슨 소리를. 가위바위보는 동체시력과 반응속도를 겨루는 놀이다. 상대가 무엇을 낼지 보고 판단을 내려 승리를 거두는 것이지.>
‘…네? 무슨 말도 안 되는.’
할배가 나를 놀리는 게 아닐까 생각을 하던 나는 문득 이 세상이 판타지의 세상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실력 있는 무인이라면 날아오는 화살을 보고 반응하는 게 당연시 여겨지는 이 세상에서 가위바위보를 보고 반응하는 것 정도는 당연한 일인 건가?
<물론 심리전의 영역도 들어가지. 무엇을 내기 전에 계속해서 손가락을 움직여 내가 무엇을 내는 질 알아차리지 못하게 만들어야 하니까.>
잘 생각해보면 지금 나도 어지간한 사람의 움직임은 보고서 대응할 수 있는 수준이잖아.
가위바위보라고 못할 건… 없겠지?
어?
잠깐만.
이런 식이면.
<내 부하 중에서는 하루 종일 가위바위보만 연습하던 미친놈도 있었다. 기사단끼리 무언가를 협의해야 할 때면 그 놈을 보내 승리를 거두어왔지.>
가위바위보가 실력겜이 되잖아?!
미친.
큰일 났다.
나 가위바위보를 실력으로 이겨보려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어.
간단하게 말해서 이 쪽 업계에서 뉴비라는 이야기다.
당연히 가위바위보에 존재하는 여러 기술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다.
운빨겜이면 모를까 실력겜에서 이러한 기술을 알고 모르고의 차이는 엄청나게 크다.
이 세상에서 괜히 인간이 마물에게 대응할 수 있겠는가.
저들이 무를 모르고 우리는 무를 알기에 가능한 이야기인 것이다.
지금도 똑같아.
난 가위바위보를 모르고 프레이는 가위바위보를 알지.
저 녀석이 아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인 걸 보면 분명 가위바위보에 익숙한 걸 거야.
왜 하필이면 상대가 프레이인 거야!
조이나 페이비 같은 후위직이었으면 체급 차로 찍어 눌러봤을 텐데 프레이를 상대로는 그게 안 된다고!
반사신경 하나에 있어서는 지금도 나보다 뛰어난 게 이 놈인데!
빌어먹을!
당했다!
낚인 쪽은 오히려 나였어!
어떡하지?!
이제 와서 돌이킬 순 없다.
내가 먼저 제안했는데 하기 싫다고 억지를 부리는 건 너무 추하잖아!
“할까?”
나보다 약간 위에서 내려다보는 프레이의 눈동자에 입술을 곱씹었다.
아냐.
아직 졌다고 확정된 건 아니잖아.
프레이의 반사신경이 근소우위이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비슷해.
체급은 대등하단 거야.
기술도 그래.
검에 미친 이 녀석이 가위바위보 기술 같은 걸 알겠어?
결국 모든 조건이 대등하다면 결과적으로 필요한 건 운!
운뿐이야!
‘좋아요!’
“좋아. 허접 검사. 질 준비나 해.”
“그래.”
“그럼 제가 신호를 드리겠습니다.”
우리 둘이 승부를 겨루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걸까.
칼이 자연스럽게 중앙에 끼어들었다.
“시작하죠. 가위.”
자. 프레이.
넌 뭘 낼 거지?
주먹이 쥐어져 있어서 아직 판별하기 어렵네.
“바위.”
손이 아래로 내려오는 게 보인다.
펼쳐지고 있어.
보나 가위인가.
좋아. 그렇담 일단 가위를 내자.
최소한 무승부.
운이 좋으면 이길 수도 있어.
“보.”
그리 결정을 내리고 손을 뻗은 순간 프레이의 손이 다시 뭉쳐졌다.
뭐야?!
심리전 건 거야?!
내가 보고 반응할 거라 생각해서 펼치는 척 다시 쥐었다고?
프레이. 검에 미친 광인인 네가 그런 잡기술을 쓸 줄 안단 말야?!
뒤늦게 당했음을 깨달은 나지만 이미 손을 거두기에는 늦은 상태였다.
검지와 중지가 펼쳐진 두 손가락 앞에 주먹이 놓여진다.
“이겼다.”
내가 지다니.
저 구슬 하나로 올릴 수 있는 숙련도가 얼마인데!
저거 하나면 앞으로 한 달 동안 해야 하는 고생을 줄일 수 있는데 패배하고 말다니!
심지어 이 패배의 지분이 100% 나 때문이어서 더 화가 나.
남 탓을 못하잖아!
이 분노를 다른 어딘가로 돌리고 싶은 데 탓 할 곳이 나 밖에 없다고!
흐으.
흐으으으으.
진정하자.
괜찮아.
저거 없어도 강해지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숙련도에서 조금. 아니 조금 많이 손해를 보게 되겠지만 그건 내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야.
그래. 프레이에게 선물 하나 해 준 셈 치자고.
앞으로도 계속 파티원으로 쓸 사람이잖아?
프레이가 강해지는 건 나한테도 이득이 되는 거라고.
응. 그래.
그런 걸로 하자.
“루시. 이거 가지고 싶어?”
뭐야. 지금 티배깅하는 거야 프레이?
만약 그럴 생각이라면 상대를 잘못 골랐다고 말해줄게.
나는 무척 치졸한 인간이거든.
이런 거 다 원한의 서에 적어두고서 나중에 보복한다고.
“줄 수도 있는데.”
진짜?
…아냐.
진정하자.
저걸 받아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분명 날 놀리려고 그러는 걸 거야.
얘 평소에 허접 검사라고 불리는 게 거슬리는지 기회만 되면 되래 날 도발하려 든다고.
이번에도 비슷한 거겠지.
괜히 기대를 해봐야 배신당할 뿐이야.
그렇지만.
혹시나라는 게 있잖아?
‘뭘 하면 되는 데요?’
“허접 검사. 뭘 원해?”
“두 개. 하나는 네가 직접 고갤 숙이는 거야.”
아하. 그러니까 만날 꼿꼿이 서있는 내 허리를 한 번 숙이게 만들겠다 그거야?
자존심 한 번 버리는 값으로 숙련도 구슬을 먹을 수 있다면 싼 값이지.
애초에 나한테 자존심 같은 게 존재하지 않기도 하고.
숙련도 구슬을 준다면 무릎을 꿇고 신발을 핥을 생각까지 있으니까 말야!
아 그건 좀 너무 갔나.
어쨌든 나는 고개 숙이는 데에 부담감이 없다.
문제는 메스가키 스킬이지.
언제나 완고하게 고개를 빳빳이 드는 이 녀석에게 무언가를 강요할 수 있을까?
일단 시도는 해보자. 최대한 비굴하게 군다면 될 수도 있잖아?
‘훗날 검성의 자리를 차지할 위대하고도 역사적인 검사이신 프레이 켄트시여. 부디 제게 당신이 하사하는 구슬을 얻을 권리를 주시옵소서.’
“허접 검사. 내놔. 너 같은 바보 멍청이보다 훨씬 더 값진 곳에 써 줄 테니까.”
이야. 내가 속으로 그렇게 길게 미사여구를 덧붙였는데 그건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거기에다가 왜 고개를 숙여야 하는 입장인데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는 거야?
니가 갑이야?
갑이냐고 미친년아!
이렇게 될 거란 건 알고 있었지만 현실이 되니까 또 절로 짜증이 나네.
그나마 다행인 건 프레이가 그리 기분 나빠 보이지 않는다는 걸까.
“좋아. 그럼 다음.”
…
이걸로 만족한 거야?!
프레이 너 대체 평소에 날 어떻게 생각하기에 이 정도를 고개 숙였다고 판단하는 거니.
네 속에 있는 루시 알른이라는 인간은 얼마나 인간 이하의 말종인 거냐?!
일단 넘어가 주니까 고맙기는 한데 기분이 미묘해.
“던전 공략이 끝나도 나랑 계속 대련해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요구 조건에 멀뚱히 프레이를 쳐다봤다.
음?
‘당연히 하는 거 아니었어요?’
“허접 검사.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그건 당연히 하는 거잖아. 이 멍청아.”
“그래? 계속 하는 거야?”
‘네.’
“그래. 하. 진짜 허접한 멍청이네.”
“그렇구나.”
프레이는 자기 혼자서 고갤 끄덕이더니 자신의 손에 들린 구슬을 내게 건네줬다.
아니. 진짜로 나한테 그걸 요구할 생각이었던 거야?
구슬을 내민 채 고개를 갸웃거리는 프레이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샜다.
아. 젠장. 살다 살다 검에 미친 이 광인한테 귀엽다는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어.
‘감사히 쓸게요.’
“잘 쓰도록 할게. 허접검사.”
“응. 계속 대련하는 거다?”
그렇게 확인 안 해도 계속 대련해 줄 건데.
이 아카데미에 나랑 근접전으로 붙어서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인재가 어디 흔한 줄 알아?
그러니까 안심해.
네 앞의 허접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는 계속 놀아줄 테니까.
*
던전 공략을 끝마친 후로 며칠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아카데미에서 1학년이 1학기에 던전 최초 공략자의 칭호를 따내는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는지 그 다음 날 최초 공략자 명단이 공개되고 나서 큰 소란이 일었지.
조이가 찾아와선 왜 자길 안 데려갔느냐고 투덜거리고.
아서는 이번엔 네가 이겼지만 다음번엔 자신이 이기겠다 그러고.
비시랑 제이콥이 찾아와서는 정말 대단하다면서 이야기를 해주고 가고.
애버리가 조심스럽게 다가와서는 축하드린다 그러고.
밥 먹고 있는데 루카가 갑자기 찾아와서는 역시 내가 눈 여겨 본 인재라고 해서 내가 밥을 못 먹게 방해하고.
심지어 베네딕한테도 연락이 걸려왔다.
‘이 아버지는 뛰어난 딸을 둬서 너무 행복하구나. 난 우리 딸을 믿고 있었다! 네가 어릴 적에…’
대체 어디서 소식을 들은 건지는 몰라도 침대에 눕기 직전에 수정구로 연락을 걸어서는 거의 한 시간 동안 옛날 이야기를 늘어놨다니까.
중간에 안 끊었으면 밤새도록 주접떠는 걸 듣고 있어야 했을 걸.
이만한 위업을 벌인 덕분에 내 평판도 많이 개선이 됐다.
여러 영애들과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있어서 소문에 훤한 애버리의 말에 따르면 다른 건 몰라도 모두 내 실력에 관해서만큼은 인정하고 있다는 모양.
그러니까 실력도 없고 싸가지도 없는 썅년에서 실력은 있지만 싸가지는 없는 썅년이 되었단 소리지.
둘 다 썅년인 건 똑같이 않냐고?
물론 그렇긴 한데 그래도 후자가 낫잖아.
유능한 썅년이면 지랄을 떨어도 이 악물고 참을 수 있지만 무능한 썅년이 지랄하는 건 견딜 수 없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중에 교실의 문이 열리고 교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단상 앞에 서서 가만 학생들을 둘러보고는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지금부터 일주일 뒤에 현장학습이 시작됩니다.”
드디어 이 순간이 왔구나.
교수의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았다.
현장학습을 위한 준비는 이미 모두 끝나있었으니까.
파티원은 나 프레이 조이 페이비.
현장학습 때 필요한 물건들은 인벤토리 안에 한 가득.
심지어 현장학습 때 만나야 하는 숲의 주인에게 호감을 사기 위한 뇌물도 준비되어 있지.
말 그대로 이제 몸만 가면 되는 것이다.
좋아. 이번 현장학습 기간 동안 페이비의 호감도를 70까지 찍는 거야!
아카데미의 던전을 공략하면서 호감도를 많이 깎아먹긴 했지만 괜찮아.
만회하면 돼.
현장학습 기간 동안 계속 붙어 지내야 할 테니까 그 동안 유능한 모습을 보여주자고.
할 수 있어.
성녀님 공략은 지겹도록 해봤잖아?
“위치는 소울 아카데미 남쪽에 있는 사이틸 숲입니다. 지금 몇몇 교수님들이 먼저 가서…”
…네? 사이틸 숲이요?
그게 무슨 소리신가요 교수님?
1학년 1학기에 가는 숲은 실루프 숲이잖아요.
숲의 주인으로 수백년 산 늑대가 기다리는 곳.
사이틸 숲은 1학년 2학기에 가는 곳이거든요?
무언가 착각을 하신 게 아닐까요?
게임과는 달라진 내용에 당황한 내가 질문을 던졌지만 교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알른 영애. 사이틸 숲이 맞습니다.”
허?
아니.
잠깐만.
좆됐다.
진짜로 좆됐다.
현장학습의 난이도 자체는 상관없다.
그건 교수들이 알아서 조절할 테니까.
필요한 물건들이 다른 거?
그것도 문제없다.
알새틴을 굴리면 그만이니까.
문제는 하나다.
지금 내가 빌어먹을 허접 주신의 퀘스트 때문에 숲의 주인을 만나야 하는데 현장학습 장소가 사이틸 숲이 되면 숲의 주인을 만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것.
씨발.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난 패널티를 받고 싶지 않아!
굴욕적인 무언가가 뭔지 알고 싶지 않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