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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26

에릭은 에델 교의 독실한 신자는 아니다.

신 에델이 존재하며 실리아 세계를 굽어살피고 있다는 건 믿지만, 다른 것보다 종교를 우선시할 정도로 독실하진 않다.

에릭의 그런 생각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으나-

에릭이 한때, 신에게 간절히 기도하던 때가 있었다.

입에서 신물이 나올 정도로…

아니, 신물을 뱉어도 멈추지 않고 구르던 나날.

‘에델이시여, 저를 가여이 여기신다면 부디 한 대만… 딱 한 대만 때릴 수 있게 해주소서.’

당시 부단장이었던 카나의 손에 정신없이 굴려지던 에릭은 악마에게 닿을 힘을 달라고 기도했지만.

당연히 그 기도가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고, 따라서 에릭이 하극상에 성공하는 일도 없었다.

한 번이라도 때려보겠다고 아득바득 이를 악물고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지, 뼈를 깎는 수련을 해도 도저히 가망이 보이지 않는 탓에 반항심 넘치던 에릭은 점점 순한 양처럼 변해갔다.

결국, 그라시스가 멸망해 홍염 기사단이 뿔뿔이 흩어지는 순간까지 에릭은 단 한 번도 카나에게 닿지 못했다.

‘사람이 자연재해를 이길 순 없지.’

거대하고 견고한 성벽.

그것이 에릭이 생각하는 카나였다.

그 누가 오더라도 감히 무너뜨릴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건만-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고 하던데. 볼 때마다 이미지가 바뀌는 걸 보면 순 머슴애 같던 단장도 여자긴 했나 봅니다.”

‘농담하는 걸 보면 힘이 남아도나 보네.’

혹시 싸늘한 말이 날아오지 않을까.

“….”

“….”

“…그렇습니까.”

카나의 반응을 기대하던 에릭은 자신을 바라보는 무구한 눈을 마주하자 기대를 접었다.

표정을 숨길 순 있어도 눈에 담긴 감정까지 조절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저런 눈을 한다는 것은 에릭이 한 말은 물론이고, 에릭을 알아보지도 못한 게 틀림없었다.

“애초에 단장님은 감정을 숨길 분도 아니지만요.”

스릉.

에릭은 검집에서 잠들어 있던 검을 뽑았다.

‘그러고 보면 이 검도 정말 오래 썼구나.’

이 검도 단장님이 골라준 건데.

그런 검으로 단장에게 맞선다고 생각하니 죄책감이….

“들기는 무슨.”

에릭은 하하, 메마른 웃음소리를 흘렸다.

“갑자기 마족이 나타났다는 말을 들었을 땐 또다시 전쟁이 일어나는 게 아닌지 걱정했습니다. 마족의 생김새를 들었을 땐 설마설마했고요. 단장님도 아시다시피 분홍색 머리에 분홍색 눈이 흔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성국으로 간다던 단장님이 마족이 돼서 나타났다니.

술 한 잔에 털어 넘길 웃음거리조차 되지 않는 말 아닌가.

그래서 카나의 모습을 처음 봤을 때 에릭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던 시절, 단장님이 하늘이 높다는 걸 제게 알려주셨죠. 그때는 단장님을 원망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지금까지 살 수 있었던 건 단장님 덕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 은혜.

제가 돌려드리겠습니다.

“너희는 최대한 접근하지 말고 원거리에서 공격해라.”

“넵!”

카나의 주변에 일렁이는 마기는 척 보기에도 심상치 않아 보인다.

닿기만 해도 순식간에 생명력을 앗아가는 마기라니.

여러 마물과 맞서 싸운 에릭도 저 정도로 강한 마기는 보지 못했다.

오르도에서 데려온 부하들을 뒤로 물린 에릭이 푸른색 마나를 끌어올리며 임전 태세를 갖췄다.

“조금 따끔할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에릭이 달려들었다.

경외하는 단장을 향해.

* * *

“…크, 커흡!”

검게 죽은 피가 바닥에 떨어지며 불쾌한 소리를 냈다.

“대장님!”

“…호들갑 떨지 마라.”

입에서 피를 토하는 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에릭은 그의 상태를 알아차린 부하들이 달려오는 것을 멈춰 세웠다.

“정말… 더럽게 강하십니다, 그려.”

에릭이 입가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닦아내며 고개를 들었다.

이리저리 굴러 먼지투성이에 만신창이가 된 에릭과 달리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깨끗한 소녀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후우.”

꼴을 보면 치열한 사투를 벌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에릭이 겪은 것은 싸움이 아니라 일방적인 유린이었다.

처음에는 최대한 상처 입히지 않고 제압하려던 에릭은 처음 검을 휘두른 순간 자신이 오만했음을 깨달았다.

근처에 접근만 해도 짙은 마기에 갉아먹힌다.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휘두른 검은 마기에 막혀 카나의 피부 근처에도 닿지 못했다.

카나는 가만히 서서 에릭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기만 할 뿐, 한 번도 그의 공격을 피하거나 막으려는 시늉을 하지 않았다.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아무 일도 없다는 양 지켜보는 무구한 눈동자가 에릭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긁어내렸다.

“아니, 이건 솔직히 반칙 아닙니까? 안 그래도 강한 양반이 이상한 기술까지 배워오면 저 같은 소시민은 어떡하라는 겁니까.”

하지만, 공격이 먹히지 않는다고 해서 물러날 수도 없었다.

이대로 에릭이 물러나면 카나를 막아설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렇게 되면 카나는 아무 방해 없이 도시에 발을 디디게 된다.

바로 에릭의 고향이자,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오르도에.

지금 당장 퇴각해서 피난을 시작한다면 늦지 않게 피난할 수는 있겠지만….

‘과연 모든 사람이 통제에 따를까.’

기사 생활을 하며 여러 인간 군상을 겪은 에릭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기적적으로 모든 사람이 피난했다고 해도 얼마 동안 도시를 비워야 할까.

하루? 이틀?

…어쩌면 일주일이 넘도록 도시에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도시의 모든 인구가 며칠 동안 지낼 수 있는 물자와 장소 같은 게 있을 리 없으니 다른 도시에 몸을 의탁해야 할 텐데, 다른 도시라 해도 그 많은 인구를 쉬이 감당할 순 없을 것이다.

도시가 마비된 며칠 동안 생기는 경제적 손실은 어떻고, 재가동하는데 돌리는 행정력은 또 어떤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져서 에릭은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사실, 그런 걸 생각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했다.

어차피 마기 때문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곳이 될 텐데.

“그러니 대장님. 지금이라도 발길을 돌리시면 안 됩니까?”

“?”

“귀여운 척해도 안 되는 건 안 됩니다. 제가 단장님의 애교에 넘어갈 사람도 아닌 걸 알면서 왜 그러심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이 귀엽긴 하다.

그러나 귀여운 것 이상으로 에릭에게 새겨진 공포심이 컸다.

인간을 잡아먹는 몬스터가 애교를 부린다고 해서 넘어가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에릭도 카나의 행동에 현혹되지 않았다.

스윽.

거칠었던 숨이 안정된 걸 느낀 에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릭의 푸른 눈 안에 검은 마기가 담겼다.

마기.

카나가 두르고 있는 저 마기가 문제다.

저 마기 때문에 검이 닿지도 않고, 걷기만 해도 다른 생명에게 위협이 된다.

풍문으로 떠도는 마족들의 왕이 나타난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피식.

“마왕이라니.”

제국과 싸우는 건 심심해져서 마족을 정벌하고 왔다면 모를까,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다.

하지만 에릭은 몰랐다.

카나가 정벌을 한 건 아니지만, 비슷한 일을 하고 왔다는 것을.

자신의 생각을 시답잖은 생각이라고 치부한 에릭이 머리를 굴렸다.

‘마기를 뚫을 방법….’

아이러니하게도 그 순간 에릭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소녀였다.

에릭이 아는 검사 중 가장 강한 검사는 카나였고, 그러니 에릭이 해결책을 찾아 헤맬 때 카나를 떠올리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마스터에 오른 검사는 검사의 바이블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마물을 사냥할 때 카나가 펼친 검술을 떠올린 에릭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정답을 안다고 해서 따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련에 수련을 거듭해서 더 높은 경지에 오른다면 모를까, 지금 에릭의 수준으로는 그런 검술을 펼칠 수 없었다.

“하지만…. 조금, 아주 조금이라면….”

흉내조차 되지 못한 어설픈 시늉이라면 어찌 따라 할 순 있지 않을까.

어차피 퇴각할 수 없다면 뭐라도 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언제까지고 화살이나 쏴대며 다가오지 못하게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푸른 눈이 결연한 빛을 머금었다.

“스으-”

숨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에릭의 입에서 안개처럼 얕은 숨이 뻗어 나왔다.

눈높이까지 들어 올린 검 끝에 분홍색 소녀의 모습이 비쳤다.

과연 닿을 수 있을까?

-아니.

생각부터 잘못됐다.

“반드시 닿는다.”

꽈악-

에릭이 가장 많이 갈고 닦은 일격.

그것과 그의 기억 속에 남은 일격을 엮어, 그를 가로막은 벽을 넘어선다.

화아아아악-!

에릭의 몸에 푸른 기류가 솟구쳤다.

그 순간, 그는 지금까지 수도 없이 연습했던 검술을 모두 잊었다.

부하들, 나무, 길, 바위.

에릭의 눈에 들어온 모든 것이 푸르게 물들었다.

자신마저 파랗게 물든 세상 속, 유일하게 색을 가진 인물.

에릭이 그것을 인지한 순간, 세상이 자그마한 일점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던 그것은 마침내 에릭의 정신마저 집어삼켰고-

“…하.”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 지난 후.

에릭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파랗게 물들었던 세상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나뭇잎은 초록색이고, 바위는 거무튀튀한 색을 하고 있었으며, 길 위엔 떨어진 나뭇잎 따위가 너저분하게 흐트러져 있다.

모든 것이 에릭이 알던 그대로의 모습이었지만.

에릭은 알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자신의 일격이, 카나에게 닿았다는 것을.

사악-

카나의 볼에 붉은 실선이 그어졌다.

더듬더듬 올라간 작은 손이 상처를 훔치자, 붉은 핏방울이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

흘러내리는 핏방울을 보던 분홍색 눈동자가 느릿하게 에릭을 향해 돌아갔다.

반짝이던 눈동자에 빛이 꺼지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제가, 닿는다고 하지 않았슴까.”

에릭이 씨익 웃었다.


           


I Became a Raid Boss

I Became a Raid Boss

레이드 보스가 되었다
Score 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One day, when I came to my senses, I found myself reincarnated in another world. After enduring a rough life post-reincarnation, I thought I could finally settle down, quietly tending to a flower garden in the mountains… …But something feels 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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