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7
나는 페이비에게 현장학습에서 어째서 약탈이 나쁜 게 아닌지를 시간을 들여 설득해야 했다.
같은 파티원으로써 함께 행동을 해야 하는데 납득하지 않은 것을 억지로 시킬 수는 없잖아?
비시나 애버리였다면 너희들의 의사 따위 알바냐! 하고 외쳤겠지만 페이비는 아니니까.
난 괜한 짓을 했다가 페이비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을 걸.
“학생들의 실전 능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필요악이라는 건가요.”
‘네. 정확해요!’
“얼빵한 허접 성녀님은 이해하는 것도 늦네요. 계속 그렇게 이야기 했잖아요?”
숲의 마물의 수와 강함에 한계가 있는 만큼 자연 상태에선 아카데미가 바라는 만큼의 실전 경험을 쌓기가 어렵다.
그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 분란을 일으켜서 좀 더 실전적인 경험을 쌓아주려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은 악당처럼 보이겠지만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다른 학생들에게 폐를 끼치게 된다.
이러한 사안을 나 뿐만이 아니라 조이까지 합세해서 이야기해주니 페이비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알른 영애님. 제 생각이 짧아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허접 성녀님께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으니까요.”
뒤에 쓸데없이 들어간 사족 때문에 페이비의 눈썹이 부들거렸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근데 루시. 그럼 지금은 아무것도 안 해? 쉴 거야?”
‘아뇨…’
“아니.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어.”
고인물은 결코 비어있는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내지 않는다.
이 순간에 무얼 해야 할 지는 진즉에 계획을 하고 있었지.
‘저희는…’
“우리는 이 곳의 주인을 만나러 갈 거야.”
허접 주신이 내어준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해서라도 한 번은 그 녀석의 얼굴을 봐야 하니까.
“숲의 주인? 왜?”
‘그 분이 주시는 축복이 무척 유용하거든요.’
“그 얼빠 여우가 주는 축복이 무척 유용하거든.”
*
루시 알른은 던전 공략을 할 때 그랬던 것처럼 이 숲에서도 파티를 이끌었다.
그녀의 지휘는 이 숲에서 수십 년을 살아왔던 사냥꾼처럼 능숙했으니 파티원 중 그 누구도 루시를 의심하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수월하게 점차 숲의 깊은 곳으로 향하던 도중 루시가 발을 멈추고는 나뭇잎 사이로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팔을 늘어뜨렸다.
“잠시 쉬고 갈까.”
그 말을 들은 루시의 파티원들은 하나 같이 눈을 끔뻑거렸다.
이 곳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그녀와 함께 던전 공략을 해보았던 인원들이다.
그러니 루시가 얼마나 강행군을 사랑하는 지도 알고 있었다.
누가 지쳐서 쓰러진 것도 아닌데 그녀의 입에서 쉬자는 이야기가 나오다니!
“너 루시 아니지.”
쉬자는 이야기에도 기뻐하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을 보고 있을 때에 프레이가 목소리를 냈다.
“하? 허접 검사. 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루시는 절대 쉬잔 이야기 안 해. 하더라도 누가 쓰러질 때가 되어서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해. 지금처럼 여유 있을 때 안 한다고.”
루시에 의해 탈진했던 경험이 있는 조이와 페이비는 프레이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고갤 끄덕였다.
누가 쓰러진다면 그를 업고서 강행군을 펼칠 사람에게 휴식이라니. 이상하지 않은가.
그 모습을 보고 길게 한숨을 내쉰 루시는 누가 듣더라도 짜증이 묻어나있음을 알 수 있는 어투로 대답했다.
“알겠어. 그걸 바란다면 바닥을 기어 다니게 해줄…”
“와아! 휴식! 저 휴식이 너무 좋아요! 빨리 쉬죠!”
“사실 나도 휴식이 좋아.”
“저. 저도요.”
괜히 부스럼을 만들게 된 위기가 닥친 순간 조이가 다급히 소리를 쳤고 프레이와 페이비도 눈치를 보고 그 뒤를 따랐다.
루시는 어딘가 불만스러운 듯이 세 사람을 번갈아 봤지만 그 이상 무어라고 하진 않았다.
“비켜봐. 허접들.”
그 대신 그녀는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에서 이런저런 물건을 꺼내기 시작했다.
알른 가문의 기사단에서 야영을 하는 방법을 배우기라도 한 걸까.
그녀가 휴식을 준비하는 과정은 너무도 능숙했다.
아공간 주머니에서 이런저런 물건을 꺼내며 휴식 공간을 만들어 내는 루시를 보며 페이비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했다.
지난번에 함께 던전을 공략 할때도 느꼈던 거지만 알른 영애께선 정말 준비성이 철저하시네요.
나이에 걸맞기 않게 엄청나게 유능해요.
이게 아르마디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는 걸까요.
페이비는 지난 번 함께 던전을 공략했던 이후로 항시 루시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 때 당시에는 처음으로 겪어보는 격한 감정에 휘둘려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 분노가 식고 나니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보통 신을 모욕하는 자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거나 다른 신을 믿는 자다.
아르마디는 악신을 제외한 모든 신들의 주가 되시는 분이니만큼 악신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아르마디를 모욕하지 못한다.
그러니 누군가 아르마디를 모욕한다면 보통 전자다.
아르마디라는 신이 존재함을 믿지 않고서야 어찌 모든 신들의 주가 되는 분을 욕할 수 있겠는가.
신을 모욕한 대상이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페이비는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을 하고서 넘겼을 것이다.
분명 존재하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며 자신이 옳다 믿고 바락대는 사람을 어찌 불쌍히 여기지 않을까.
허나 루시의 경우에는 달랐다.
그녀가 신이 존재함을 모를 리가 없었다.
이전에 수도 없이 신의 목소리를 들었던 그녀다.
루엘의 메이스를 찾아낸 것도.
두 번이나 아그라의 저주를 해주한 것도.
모두 다 신의 계시가 있었기 때문이지 않나.
그런 루시가 아르마디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을 리가.
모든 것이 아니라면 반대로 생각을 해봐야 했다.
하늘 위에 위대한 존재가 있음을 아는 이의 입에서 어찌 그 존재를 모욕하는 단어가 튀어나올 수 있는가.
전지하고도 전능한 존재의 분노가 두려울 터인데 어찌 그 입술을 제멋대로 움직이는 걸까.
그 까닭은 페이비가 생각하기엔 이러했다.
이 정도로는 신이 분노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페이비는 때때로 조이에게 설교라는 미명하에 짓궂은 장난을 친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을 싫어하는 그녀가 마음 편히 조이에게 장난을 칠 수 있는 이유는 이 정도로 그녀가 화를 내지 않을 거란 걸 알기 때문이다.
루시도 그럴 거라고 페이비는 생각했다.
자신이 한 것 정도로는 아르마디의 관대함이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너무도 당당히 모욕을 꺼낼 수 있는 것이다.
한낱 인간이 어찌 아르마디의 관대함을 측정할 수 있는가.
세상에 쉬이 손길을 내밀지 않는 신의 인내를 가늠할 수 있는가.
그 대답을 페이비는 알고 있었다.
루시가 아르마디의 사도이기 때문에.
페이비는 악신의 사도에게 루시의 정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많은 고민을 거듭했다.
그 고민의 결론은 언제나 똑같았다.
아무리 그녀가 부정을 하려고 해도,
아니기를 바라며 여러 요소를 뒤지려 노력해도,
루시가 아르마디의 사랑을 받으며 그와 가까운 사이임은 너무도 분명했으니까.
지금에 와서는 반쯤 인정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페이비는 기회가 될 때면 항상 루시의 행동을 관찰했다.
그녀의 어떤 모습이 아르마디의 관심을 이끌어 냈는지가 궁금했으니까.
그 때마다 페이비가 본 것은 달랐지만 그 행동들은 한 마디로 요약하는 게 가능했다.
루시는 유능했다.
공부면 공부.
전투면 전투.
던전 공략에 있어서도 압도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다른 이들을 지휘하는 능력은 무척이나 유능한 지휘관을 연상케 할 지경이었다.
그랬다.
루시 알른에게서는 거센 언행을 제외하고는 어느 하나 부족한 부분이 없었다.
어떤 부분 때문에 아르마디께서 관심을 가졌는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모든 부분이 아르마디의 관심을 끌 수 있을 정도로 경이로웠다.
도저히 저 사람이 한 때 망나니라고 불렸던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상적인 사람이 1년 만에 그만큼 바뀔 리가 없어요.
아무리 알른 영애께서 드높은 재능을 지녔더라도 15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 1년만에 대륙 최고의 신성이 될 수 있을리가요.
분명 저 분의 변화에는 아르마디의 축복이 영향을 끼쳤을 거에요.
그리 판단을 내린 페이비는 루시의 현재가 아닌 과거에 집중하기로 했다.
지금 그녀의 변화가 아르마디의 사도로 간택되며 시작된 것이라면 그 이전에 아르마디의 눈에 든 이유가 분명 존재할 테니까.
‘예전에 알른 영애께선 이렇지 않았어요.’
여러 사교계에 참여하며 과거의 루시를 자주 마주했던 조이는 옛날의 루시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고 이야기했다.
언행이 거친 부분은 예전과 똑같지만 그 이외의 부분은 닮은 구석이 없다면서.
‘사교계에 있을 적의 알른 영애는 정말 두려운 분이었죠.’
돌아다니면서 가시를 쏘아대는 고슴도치 마물이었을 적 루시의 이야기를 듣던 페이비는 조이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경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조이가 해 준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목이 붙어 있는 게 신기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베네딕 알른 백의 명성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큰 일이 났을걸요.’
그리 이야기를 하며 웃는 조이를 보며 페이비는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과거의 루시에게서는 아르마디의 관심을 끌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심성이 곱지도 않고,
선행을 펼치는 것도 아니고,
뛰어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신앙심이 깊은 것도 아니니.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아르마디의 관심을 얻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과거의 루시와 현재의 루시의 공통점은 단 하나 뿐이었다.
‘허접 늑대♡ 그렇게 쉽게 배를 까뒤집는 거야?♡ 푸후후♡ 허접♡ 약골♡ 좆밥♡ 수컷 탈락♡’
어투.
상대가 그 누구라 할지라도 노골적으로 무시하며 살살 약을 올려서 화를 부추기는.
귀족 영애가 내뱉는 단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천박한 그 어투 말이다.
혹시.
너무도 불경한 생각이지만 혹시 만약에.
아르마디께서는 저런 어투를 좋아하시는 걸까?
다른 사람들을 허접이라 비웃으며 깔보는 저런 모습을?
성경에서 배운 바에 따르면 결코 그럴 리가 없었지만 페이비는 최근 들어 점점 성경에 적힌 단어들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성경에 따르면 존재한 적 없고 존재할 수도 없는 아르마디의 사도가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마당에 또 다시 성경에 적힌 여러 글귀들이 틀릴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럼 제가 아르마디의 관심을 얻기 위해서는 허… 허접. 이라거나 ㅈ…조…
아니에요.
이건 아니에요.
이런 말을 입에 담는 걸 아르마디께서 좋아할 리가 없어요.
그래요.
분명 제가 모르는 다른 부분이 있는 걸 거에요.
간신히 정신을 차린 페이비는 자신의 두 뺨을 강하게 두드리고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이제 하다하다 불경한 생각까지 하다니.
전 진짜 멍청한 사람이네요.
알른 영애의 말대로.
그 때 옆의 수풀을 해치는 소리가 페이비의 귓가에 닿았다.
뭐죠? 다른 분들이 움직인 건 아닌 것 같은데.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린 페이비는 수풀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고 있는 하얀 색의 여우를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