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8
수풀을 뚫고 튀어 나온 여우의 얼굴을 본 나는 고갤 갸웃거렸다.
쟤가 왜 여기서 튀어 나와?
저 얼빠 여우가 자신이 보기에 매력적인 사람을 찾아 돌아다닌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 숲에서 아카데미가 현장학습을 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거니까.
얼빠 여우는 아카데미의 학생 중 아름다운 사람들을 눈에 담으며 심적인 만족을 얻고 그 대신에 현장학습의 장소를 내어주는 식의 거래거든.
자신의 거처에 머무르면서 숲이 어지러워지는 걸 구경하기만 할 거면 현장학습 같은 걸 허락했겠어?
그렇지만 구경을 다닐 때 저 녀석이 사용하는 건 보통 자신의 분체다.
꼴에 숲의 주인이라고 해야 할 일과 해선 안 될 일을 구분할 줄은 아니까.
그런데 있잖아. 지금 저거 내가 보기에는 아무리 봐도 얼빠 여우의 본체인 것 같은데?
내 눈이 잘못된 걸까?
환술에라도 걸렸나?
<왜 숲의 주인이 저리 허술하게 등장한 것이냐?>
아무래도 이상한 것은 내가 아니라 저 얼빠 여우 쪽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할배가 착각을 할 리가 없으니까.
얼굴만을 빼꼼 내밀고 우리를 구경하던 새하얀 털의 여우는 이내 수풀에서 빠져 나와 우리가 쉬는 장소의 한 가운데에 섰다.
“귀여운 여우네요.”
“무언가 신성한 기운이 느껴져요.”
게임 속에서 얼빠 여우가 본체를 드러내는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조건은 단순하다.
파티원이 지닌 매력의 총합이 얼빠 여우가 자신의 눈으로 꼭 담고 싶을 정도가 되면 된다.
매력 수치가 일정 이상이 되면 숲의 권위고 나발이고 자신의 욕망에 못 이겨서 이 자리에 출현하거든.
근데 신기하네.
지금 이 파티 매력 수치가 그 정도로 높나?
물론 어느 정도 되긴 하겠지.
조이나 페이비의 매력 수치가 무척 높은 편이니까.
프레이도 저 둘에게 밀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매력이 낮은 수치는 아니다.
나?
지난 번 아서의 반응으로 판단을 내려 봤을 때 아무리 높아도 조이와 비슷한 수준이 아닐까 싶은데.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서 평균보다 높긴 하지만 그렇다 해서 저 얼빠 여우의 이성을 날려버릴 수준은 아니란 이야기다.
그런데 왜 저 녀석이 모습을 드러낸 거지?
또 내가 모르는 변수가 있나?
내가 머릿속으로 고민을 하는 동안에 여우는 네 발로 척척 움직여서는 내 앞에 멈춰 섰다.
먀먀먀먀.
그리곤 울음소리를 내어서 내 시선을 끌고는 내 발치에 얼굴을 비비며 호감을 드러냈다.
“여우가 알른 영애를 좋아하나보네요.”
다른 파티원들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지만 나만큼은 도저히 기뻐할 수 없었다.
이게 단순히 귀여운 여우가 아니라 사심이 잔뜩 들어간 징그러운 노친네라는 걸 나만은 알았으니까.
이 노친네가 나한테 왜 이래?!
나말고 예쁜 사람이 넘쳐나는데 왜 내 옆에 와서는 사심을 표출하는 거냐 이 미친 여우야!
설마 너도 허접 주신처럼 페도 취향인 거냐?!
게임 속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뒷설정이 있었던 거야?!
하아. 잘 된 일이라면 잘 된 일이기는 한데.
여우의 목덜미를 집어 들어서 시선을 맞추었더니 여우가 웃음을 지었다.
분명 종이 달라서 표정을 알아차리기가 어려울 터인데 이 얼빠 여우가 지금 기뻐하고 있단 사실만큼은 너무도 잘 알 수 있었다.
내가 그렇게 마음에 드는 거냐 이 얼빠 여우야.
‘안녕하세요. 숲의 주인님.’
“얼빠 여우. 자기보다 수백살은 어린 여자애한테 애완동물 취급당하니까 좋아? 진짜 주책 맞네.”
내가 노골적으로 정체를 알고 있다는 티를 내자 여우의 웃음이 굳었다.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냥 꼬리를 흔들며 울음소리를 내는 게 진짜 여우같긴 했지만 그렇다 한들 날 속일 순 없었다.
<이 숲의 주인이 맞다. 저만한 기운을 몸에 품고 있는 데 저래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할배를 속일 수 없다고 해야겠지만.
‘이미 다 들키셨는데요.’
“설마 안 들킨 줄 아는 거야? 늙어서 판단 능력도 흐려졌구나? 허접~ 치매~”
“…어떻게 안 게냐.”
내가 한 마디를 더하자 그제서야 여우의 입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에?”
“여우가 말을 했다?!”
“신기하네.”
이런 상황을 예상치 못한 세 사람의 경악 속에서 여우가 내 손아귀를 빠져 나오더니 공중에서 한 바퀴를 굴렀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것이 걷히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 자리에 없었던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과연 신성한 기운을 몸에 두른 자로다. 본녀의 정체를 가뿐히 파악하다니.”
여성은 게임 속 NPC답게 서양 판타지에는 결코 등장할 일이 없는 비단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 있었다.
얇은 눈동자와 여유로운 미소.
머리 위 쪽에 있는 하얀 여우의 귀와 몸 뒤편에 넘실거리는 아홉 개의 꼬리.
거기에 더해 눈을 사로잡는 몸매.
고혹적이면서도 위험한 매력을 풍기는 여성은 턱을 두드리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통찰력만큼이나 목소리도 좋은 것이 점점 더 호감이 가는 구나. 좀 더 본녀에게 무어라고 해주겠느냐?”
‘죄송한데 시선이 좀 징그러워요.’
“얼빠 여우. 눈이 징그럽고 역겨우니까 시선 좀 치워주지 않을래?”
“하악. 이것도 좋구나. 반항적인 것이 매력적이야.”
앞서 했던 모든 설명은 이 여우가 입을 열지 않을 때의 이야기다.
외모 하나만큼은 소울 아카데미의 전 캐릭터를 포함해서 최상위권에 속하는 녀석이지만 안타깝게도 이 녀석은 유감스러운 성격을 지니고 있다.
앞서 말했듯 이 녀석은 얼빠다.
저 외모에도 불구하고 다른 외견적 특징이 아니라 얼빠라는 게 별명으로 달리는 지독한 얼빠.
매력이 높으면 그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좋게 봐주지.
내가 괜히 아무 걱정 없이 말을 꺼낸 게 아니다.
이 녀석이 호감을 드러낸 순간부터 내가 뭘 하든 간에 웃어넘길 걸 알았기에 마구잡이로 단어를 내뱉은 것이다.
게임 속에서 봤을 때도 진짜 질리는 스타일이었는데 현실이 되니까 더하네.
그 당사자가 나여서 더 그래.
내 눈이 내리깔리고 그에 따라 얼빠 여우의 입꼬리가 점점 올라가던 도중.
충격에서 간신히 정신을 차린 조이가 말을 꺼냈다.
“죄송합니다만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 겁니까?”
아. 맞다.
이 얼빠 여우의 변태력에 홀려서 설명을 해준단 걸 잊어버렸어.
요즘에 칼 덕분에 변태 짓거리에 면역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네.
남을 배려하지 않는 진짜는 다르구나.
“미안하구나. 잠시 본녀가 이성을 잃었어.”
조이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얼빠 여우는 부드러운 어투로 고개를 숙였다.
조이나 페이비도 매력이 높은 편이니까 친절한 것 좀 봐.
이름 모를 엑스트라 하나 데려왔으면 짜게 내려다보면서 닥치라고 했을 거면서.
“본녀는 이 숲의 주인인 리나라고 한다. 신성한 기운이 느껴져 그를 구경하러 왔지. 그대들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
신성한 기운이라면 아르마디의 기운을 말하는 거려나.
저번에 나크라드도 그랬고 이번에 얼빠 여우도 그렇고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은 나한테서 이상한 무언가를 느끼나 보네.
얼빠 여우가 이렇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걸 보면 그 기운에 매력도 보정이라도 들어있는 걸까?
확실히 허접 주신이 변태적인 성벽을 제외하고는 도움이 된다니까.
그 빌어먹을 성벽 때문에 내가 고생을 해서 문제지.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이야기하기에 좋은 장소로 가지 않겠느냐? 그대들과 함께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말이다.”
처음에는 신기한 듯 얼빠 여우를 바라보던 세 사람이었지만 그녀의 입에서 한 마디가 흘러나올 때마다 얼굴 표정이 굳어가는 게 보였다.
기분 나쁜 웃음과 함께 침을 흘리는 걸 보면 누구라도 질릴 거야.
당장 나만 해도 그런 걸.
“본녀가 결코 그대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임을 약속하마. 정확히는 해를 끼칠 수가 없다고 해야겠지. 이 숲에 도사린 이들이 한 둘이 아니라서 말이다. 헛짓거리를 했다가는 그 녀석들에게 목이 날아갈 터.”
얼빠 여우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파티원들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저들을 여기까지 이끌고 온 사람이 나이니만큼 내게 판단을 바라는 거겠지.
얼빠 여우가 갑작스럽게 출현함에 따라서 계획이 비틀리기는 했지만 이건 나쁜 쪽의 변수는 아니었다.
우리의 목적은 처음부터 얼빠 여우를 만나러 가는 거였으니까.
자기가 알아서 자기 거처로 초대를 해주겠다는 데 거절할 이유는 없지.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얼빠 여우는 아르마디의 기운 때문에 몰라도 나를 엄청 좋게 평가하고 있잖아.
자기 거처로 초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할 정도로.
이 상황에서 갑은 나고 을은 이 얼빠 여우인게 아닐까?
왜 그런 말도 있잖아. 먼저 반한 사람이 지는 거라고.
지금 패자는 아무리 봐도 얼빠 여우 쪽인 것 같은데.
‘좋아요. 그 대신에…’
“좋아. 얼빠 여우. 대신 조건이 있어.”
“무어냐. 말만 하거라. 내 그대의 의향은 어지간하면 따라 줄 생각이니.”
‘저희를…’
“우리를 인정하고 그에 따른 보상을 줘. 그러면 얼빠 여우 네가 징그럽고 역겨운 변태라는 걸 참고 기꺼이 따라가 줄게.”
내가 뻔뻔하게 고개를 치켜들면서 그리 이야기를 하자 얼빠 여우가 눈을 좁게 떴다.
무언가를 가늠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미안하지만 그는 어려울 것 같구나. 내 그대와 동료들을 무척이나 좋게 생각하고 있지만 주인의 인정은 그리 쉽게 내어줄 수 있는 게 아니지.”
역시 너무 뻔뻔했나?
아무리 저 녀석이 얼빠라고는 해도 숲의 주인인데 홀라당 넘어가서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줄 거라는 판단은 안이했던 것 같네.
그래도 이미 내 매력을 높게 평가한 이상 나쁘게 보진 않을 거야.
당당한 태도도 마음에 드는 구나. 정도로 생각할 걸.
이 미친 얼빠는 그런 녀석이니까.
“대신 바로 시험을 볼 수 있도록 배려해주마. 본래라면 고난 끝에 숲의 숨겨진 곳에 도착해서야 치를 수 있는 시험을 바로 겪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본다만?”
역시나.
이 정도면 충분한 호의다.
보통 주인의 인정을 받기 위한 시험을 치르려면 여러 고난을 넘어서 숲의 주인을 마주해야 하거든.
그러지 않고서 바로 시험을 치를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은 숲의 주인된 자로써 내밀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다.
다른 숲의 주인이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기겁을 할 걸.
‘좋아요.’
“좋아. 얼빠 여우. 노친네치고는 부드러운 판단이네.”
“다른 아이들은 어떠하더냐. 그대들도 본녀의 시험을 받기를 동의하는 것이야?”
얼빠 여우의 물음에 다른 세 사람도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이 얼빠 여우를 만나러 오는 길에 이 녀석이 주는 축복이 어떤 것이고 왜 얻어두는 편이 좋은 지에 대해서 미리 다 설명을 해놨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다 각오를 다진 상황에서 다른 반응이 나올 리가 없지.
“아. 참. 검을 들고 있는 아이야. 넌 예외다. 그대는 아직 내 시험을 치를 자격이 없거든.”
“…왜?”
“너는 매력이 부족해.”
매력이 부족하다는 소리에 프레이가 눈을 끔뻑였다.
하하. 그치. 저래야 얼빠여우지.
자기 마음에 든 사람한테는 한없이 호의적이지만 자기 기준에 부족하다 싶으면 한없이 차가운 짐승.
‘저기…’
“얼빠 여우. 저 허접 검사도 내 동료거든? 나이를 먹을 대로 먹었으면서 왜 그렇게 치졸한 거야?”
이미 내 파티에 반 고정이 된 프레이다.
그녀가 강해지는 것은 곧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니만큼 이로운 보상은 최대한 많이 얻는 편이 좋지.
되면 좋고 안되면 인벤토리 속 여러 매력과 관련된 아이템을 써서 설득할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얼빠 여우가 순순히 고갤 끄덕였다.
“…흐음. 알겠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좋다. 저 아해도 과하게 매력이 부족한 건 아니니 인정해 주도록 하겠다.”
와. 아르마디의 신성이 주는 매력도 보너스가 어느 정도로 크길래 얼빠 여우가 이렇게 순순히 물러나는 거야?
“자아. 그럼 바로 시작을 하자꾸나. 이 여우에게 인정 받기 위한 시련을 말이다.”
얼빠 여우가 웃으며 손가락을 튕기자 우리의 주변을 안개가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