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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29

실리아 온라인은 전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게임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리아 온라인을 주력 콘텐츠로 삼은 스트리머는 수도 없이 많았고, ‘피자는역시하와이안’ 공대의 공대장 ‘파인애플피자’….

약칭 ‘파인’도 그런 스트리머 중 하나였다.

종합 게임 스트리머였던 파인은 실리아 온라인에 처음 접속한 순간 새로운 세계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실제 세계와 다름없는 현실감. 강제하지 않는 시스템. 세계의 일원이 된 듯한 몰입감.

수많은 게임을 했던 그였지만, 지금까지 이렇게 강렬한 느낌을 주는 게임은 없었다.

흔히 말하는 인생 게임.

파인은 실리아라는 게임이 자신의 인생 게임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고, 종합 게임 스트리머였던 그가 실리아 전문 스트리머가 되는 건 자연한 수순이었다.

실리아를 시작한 플레이어에겐 수많은 선택의 기로가 펼쳐져 있다.

망치를 들고 대장장이가 될 수도 있고, 무기를 들고 적과 용감하게 맞서 싸우는 모험가가 될 수도 있으며, 한적한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가 될 수도 있다.

파인이 선택한 것은 용병의 길이었다.

대장장이, 농부, 식당 주인… 그런 것들도 나름의 매력이 있었지만, 그가 생각하는 RPG의 꽃은 동료들과 힘을 합쳐 강한 적을 물리치는 것이었기에.

그래서 파인은 동료들을 모아 공대를 만들어 보스에게 도전하는, 이른바 ‘레이드’를 주력 콘텐츠로 삼았다.

구역질이 절로 나올 정도로 강한 적을 거듭된 도전 끝에 쓰러뜨릴 때의 성취감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

그 성취감은 어려운 보스를 쓰러뜨릴수록 더욱 밝게 빛났으니, 파인은 클리어가 불가능해 보이는 레이드라 해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전 정신이 충만한 파인조차 클리어를 포기한 보스가 있었으니.

묘지기, ‘카나리아 그라시스’라는 보스였다.

패턴이 복잡한 건 괜찮다.

뇌가 꼬일 듯한 복잡한 패턴도 반복해서 트라이하면 숙달되어 파훼할 수 있게 되니까.

하지만 카나리아는 그런 것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은 먼 보스였다.

‘뭣 같이 만들었네.’

정형화된 패턴? 그런 건 있지도 않다.

굳이 꼽자면 후열을 먼저 노린다는 점이겠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공략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맛있게 매운 게 아니라 그저 자극적이기만 한 매운맛.

혀를 절단시키는 듯한 매운맛에 서서히 의욕을 잃어가던 파인은 카나리아가 제국 기사들을 말 그대로 반으로 갈라버리는 것을 보고 공략을 완전히 포기했다.

‘저건 잡으라고 만든 게 아니다.’

트라이도 어느 정도 각이 보여야 하는 거지, 일격으로 땅을 두 쪽 내는 괴물을 어떻게 잡으란 말인가.

실패에 대한 아쉬움?

가능성이 자체가 없는데 아쉬움이 있을 리가.

그렇게 레이드를 포기한 파인은 이따금씩 들려오는 소식만 접할 뿐, 카나리아라는 NPC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분명 그랬었는데-

“…뭐야 이거.”

파인은 제 앞에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를 멍하니 바라봤다.

“토벌령? 이게 뭐야? 님들 이런 거 본 적 있어요?”

-????

-??

-모임? 진짜 모임?

-무서워요;

-나도 몰루;

-ㄴㄴㄴㄴ

-퀘스트도 아날로그로 받는 마당에 저런 걸 봤을 리가

시청자들의 반응도 파인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실리아 온라인의 시스템은 좋게 말하면 자유도가 높고, 나쁘게 말하면 플레이어를 방치한다.

기본적인 인터페이스는 있지만 무언가를 강제하거나 권장하지 않는 게 기본 스탠스였다.

그러나, 지금 파인의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는 명백히 ‘권유’의 뜻을 담고 있었다.

[토벌 이벤트 발생!]

그런 이름으로 시작된 메시지의 밑에는 아르디나 대륙에 위기가 닥쳤다는 말과 함께 이 위기를 해결하지 못하면 큰 재앙이 일어날 것이라는 경고가 적혀 있었다.

“누가 봐도 하라는 말이잖아.”

-그냥 그렇다는 거 아님?

-ㅄ아 그냥 그렇다고 알려주려고 메시지까지 띄웠겠냐? 진짜 문해력 ㅈㄴ 낮네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왤케 화났음?

-집에 안 좋은 일이 있다고 하네요~

평소 같았으면 ‘와! 빅 이벤트!’라고 하며 좋아했을 파인이었지만.

-근데 이분 표정이 왜 이런가요?

-ㄹㅇ 누가 보면 똥이라도 씹은 줄

-아; 똥 먹는데 누가 카레 얘기하냐;

-?

시청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파인의 낯빛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시스템 메시지와 벽보에 적혀 있는 이름을 본 순간, 마냥 반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카나리아라니.’

그 이름이 왜 여기서 나온단 말인가.

파인은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누구 설명해 줄 사람?”

채팅이 우수수 쏟아졌다.

파인은 시청자들의 도움 덕분에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이해했다.

“그러니까… 그 승천 의식인지 뭔지가 끝나자마자 갑자기 사라졌고, 아르디나에서 발견했을 땐 정신이 나가 있었다 이 말이지?”

-ㅇㅇㅇㅇㅇ

-ㅔ

-정확함 ㅇㅇ

-맞워용

“허어…. 저니 님이 마음고생이 심하겠네.”

-카나 찾으러 간다고 바로 리스폰 컨 하더라

-그거 보고 저니 아닌 줄 알았음..

-그래서 어떡할 거임? 트라이 ㄱ?

-리벤지 드가자~

“…아니. 안 할 건데.”

하지만 상황을 이해했다고 해서 없던 용기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평타에 땅이 갈라지고, 집채만 한 차원수를 아무렇지 않게 베어 넘기는 보스를 토벌하라고?

안 맞아봤다면 모를까, 이미 흠씬 두들겨 맞은 그로서는 그다지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

-????????

-에반데;

-이걸 쫄아? 이걸 쫄아? 이걸 쫄아? 이걸 쫄아?

-넌 남자 ‘실격’이다…

-그럼 여자 되는 거 아님? 오히려 좋아

-이건 또 뭐 하는 새끼냐;

-우욱;

그러나 그건 파인의 사정이지, 시청자들이 알 바는 아니었다.

눈을 감고 귀를 막아도 파인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좀처럼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파인은 백기를 들었다.

“아오, 알았어! 공대원들한테 물어볼게! 대신 한 명이라도 싫다고 하면 쫑이야. 알겠어?”

-ㅇㅋㅇㅋ

-굿 ㅋㅋ

-공대장이면 그냥 밀어붙이면 되는 거 아닌가요? 흠…

-운영 방식은 공대마다 다르니까

채팅을 살피던 파인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면피를 위한 말이 제대로 먹혀들었다.

그와 함께 고통을 받은 공대원들이 이 제안에 찬성할 리 없으니 사실상 공수표와 다름없는 말이었다.

‘계획대로.’

그러나 파인은 몰랐다.

그의 예상과는 달리 공대원들이 만장일치로 찬성하리란 것을.

그걸 알았더라면 이런 제안을 하지도 않았을 테지만, 미래를 알 수 없었던 파인은 속내를 숨긴 채 웃을 뿐이었다.

파인은 웃고 있다….

* * *

거대한 은색 결계.

그 앞에 선 파인이 회한에 젖은 목소리를 냈다.

“…내가 왜 여기에 있지.”

-그것이 ‘약속’이니까

-끄덕

-어떤 분들과 다르게 약속을 지키는 모습이 보기 좋네요 ㅎㅎ

-어어 안 된다;

스트리머에게 시청자란 없으면 안 되는 고마운 존재지만, 때로는 말리는 시누이보다 얄미울 때가 있는데, 지금이 딱 그런 때였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자신이었던 탓에 차마 시청자들에게 뭐라 하진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던 파인은 괜히 공대원에게 틱틱댔다.

“참 속도 좋다. 그렇게 죽고도 또 하고 싶어요?”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잖아요.”

“추억도 되새길 겸 그냥 놀러 가는 거죠 뭐.”

“흑화 카나라니. 이걸 어떻게 참음~”

저마다의 특색이 묻어 나오는 대답들에 파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놈들만 쏙쏙 골라서 모은 건지.

‘아, 나구나.’

좀 정상적인 놈들로 모을걸.

파인이 후회하는 사이.

피자는역시하와이안 공대의 힐러, 레모니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결계를 살폈다.

보는 것도 모자라 손으로 툭툭 두드리기까지.

“뭐가 그렇게 궁금해요?”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던 파인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네? 아… 그, 그냥 이렇게 있으니까 진짜 레이드 하는 느낌이 들어서요. 전에는 뭔가 필드 보스 같은 느낌이었거든요….”

“흠.”

레모니의 말을 들은 파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긴 하다.

단순히 무대가 개방되어 있고 폐쇄되어 있고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이전에는 카나리아를 마주한 곳이 곧 보스룸이 되어서, 솔직히 전장에 입장한다는 비장한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지만.

이렇게 안과 밖이 명확히 갈리는 곳에 있으니 더 긴장감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근데 고쳐줄 거면 이런 것도 고쳐줘야 하지 않나? 한 번에 한 파티만 입장하는 제한은 왜 그대로 둔 거지.”

데모닌스 일 안 하나?

최대한 빨리 온다고 왔는데도 이미 입장한 파티가 있었던 탓에 파인의 공대는 죽치고 기다려야 했다.

“레모니 님은 안 지겨워요?”

“어, 저는 오픈런을 많이 해봐서….”

“아하.”

“이제 입장 돼요!”

잡담을 나누고 있는 사이 먼저 입장한 파티가 전멸했는지 보스룸이 열렸다.

“다들 맞을 준비는 됐어요?”

“우우! 깰 생각이 아니라 맞을 생각부터 한다니! 공대장이 패기가 없다!”

“리얼리얼. 이래서야 믿고 따를 수 있겠어?”

“준비됐으면 빨리 들어가기나 해요. 새치기당할라.”

파인은 ‘공대장이 공대원을 사지로 몰아넣는다!’라는 외침을 무시하며 그들의 등을 떠밀었다.

결계의 입구를 지나 보스룸에 입장하자마자 마치 다른 세계에 온 것처럼 공기가 급변했다.

하늘은 어둡고, 땅은 더 어둡다.

방송으로 봤던 락시아의 환경이 그대로 옮겨진 듯한 광경에 파인이 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을 끌어올린 채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공대원 중 하나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와왁?! 미친, 도트뎀 들어온다!”

“뭐?”

파인은 화들짝 놀라 HP를 살폈다.

과연 그 말대로 HP가 조금씩 감소하는 게 보였다.

또한 그 위에 떠 있는 ‘마기 중독’이라는 디버프도.

“힐 뿌릴까요?”

“아뇨. 죽을 정도는 아니니까 일단 내버려두고, 반 정도 까이면 그때 전체 힐 한 번 뿌려주세요.”

“네.”

“전이랑 확실히 다르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따로 있었으니.

“공격이… 안 와?”

보스룸에 입장했는데도 공격이 날아오질 않았다.

물론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때와 지금은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그때는 그들을 확실히 인지하고 ‘그래, 어디 한번 재롱부려 봐.’ 같은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그들이 들어온 것을 모르는 듯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검은 마기에 둘러싸여 주저앉아 있는 분홍색 소녀.

그 모습을 본 공대원 중 하나가 감탄사를 흘렸다.

“캬, 분위기 봐.”

“저걸 보고 그런 말이 나와요?”

“엥. 멋지지 않음?”

“에휴….”

한마디 하려던 파인은 그가 들어오기 전 ‘흑화 카나’니 뭐니 떠든 사람이란 걸 상기하고는 말을 멈췄다.

사실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기도 했고.

“‘선역이었던 인물이 흑화해서 적이 되어 나타나는 클리셰라니. 이거 미식이네요.’”

“…귀에 대고 이상한 소리하지 마세요. 그리고 카나는 선역도 아니잖아요.”

“진리를 받아들여라….”

파인이 귀를 툭툭 털어내며 검을 뽑았다.

“기본 택틱은 기억하죠? 각자도생. 힐러들은 최대 거리에서 쉴드 위주로.”

토벌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애초에, 같은 편이 돼서 제국과 맞서 싸운 적이 있다 보니 토벌할 마음도 별로 들지 않고.

처음부터 구경이나 할 생각으로 왔던 터라 파인의 의욕은 바닥을 찍고 있었다.

“풀링 해주세요.”

패기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파인의 지시에 방패를 든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흐읍! 비산!”

짧고 강렬한 기합과 함께 검기가 소녀에게 날아갔다.

공격력은 미약하나, 사거리가 길고 적개심 상승 수치가 높아 전투 진입 시에 주로 쓰는 스킬이었다.

‘당연히 피하겠지.’

파인은 검기가 날아가는 걸 큰 기대 없이 지켜봤다.

저런 거에 맞을 거였으면 진작 성공했겠….

퍽!

…지?

“…?”

…잘못 봤나?

뭔가, 검기가 닿은 것 같은데?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보인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파인이 눈을 비비고 있을 때.

스윽-

미동도 없던 소녀가 천천히 일어나고.

그림자를 드리운 분홍색 눈이 그들에게 향했다.


           


I Became a Raid Boss

I Became a Raid Boss

레이드 보스가 되었다
Score 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One day, when I came to my senses, I found myself reincarnated in another world. After enduring a rough life post-reincarnation, I thought I could finally settle down, quietly tending to a flower garden in the mountains… …But something feels 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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