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9
주변을 가리는 안개가 사라진 후에 다시금 눈을 뜬 나를 맞이해 준 것은 알른 가문의 저택이었다.
왜 여기가 나타난 건지 모르겠네.
여기에는 내가 원하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데 말이야.
사이틸 숲 시련의 내용은 그 얼빠 여우의 홀림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시련이 시작되면 얼빠 여우가 자신의 힘을 이용해 참가자들에게 그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 환각에서 탈출하면 시련을 극복하는 거고 환각에 매몰되면 시련에 실패하는 식이지.
이런 걸 게임으로 묘사하기는 어렵다 보니 정작 플레이를 할 땐 캐릭터의 정신력보다는 미로 탈출이라는 느낌이 더 강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이 세상은 모니터 너머의 현실이니만큼 미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이 등장해야 하는데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이 환상은 루시가 원하는 내용이라는 거겠네.
지난 번 할배의 시련을 겪을 때에 루시의 악몽이 내 앞에 펼쳐졌던 것처럼.
팍 식는구만.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들이 튀어나왔다면 즐기다가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이래서야 즐기고 뭐고 할 것도 없잖아.
방패를 등에 걸치려던 나는 내 양 손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아. 이건 루시의 환상이니까 무기나 갑옷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지.
그렇다면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옷도 프릴이 과하게 나풀거리는데다가 오만 데에 보석이 박혀 있는 그 빌어먹을 옷이려나.
미간을 찌푸리며 시선을 아래로 내린 나는 생각보다 정상적인 옷을 보고서 놀랐다.
뭐야. 루시가 입은 옷치고는 멀쩡하네.
드레스라는 건 똑같지만 화려하지는 않고 침착해.
이 정도면 입어줄 만하지.
요즘에 만날 교복을 입고 다니느라고 치마에서 익숙해 졌거든.
한결 기분이 나아진 나는 빠르게 시련을 끝낼 생각으로 문을 열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루시가 간절히 바라는 건 뭐려나. 예전에 할배의 시련에서 봤던 걸 생각해보면 예상이 가는 건 있는데.
“어머. 루시. 바깥에 나가서 놀다 오는 거니?”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나를 환영해 준 것은 하얀 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는 여성이었다.
난 그녀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게임 속에 나온 사람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단지 저번에 할배의 시련을 극복할 때 본 사람이기에 기억했다.
루시의 어머니. 할배의 시련 속에서 침대 위에 누워 루시에게 모진 말을 내뱉던 사람. 그녀는 이전에 나타났을 때와는 달리 활기찬 얼굴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네. 어머님… 어?!”
뭐야. 왜 내가 생각한 게 그대로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거지?!
단순히 루시의 소원만을 이루어 준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내 소원도 이루어 준건가?!
“루시?”
루시의 소망이고 뭐고 최대한 빠르게 환각에서 탈출할 생각이었지만 이럼 좀 이야기가 다르지.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도 오랜만에 정상적인 어투로 말 좀 해보자!
*
“조이! 이번에는 저 빵집에 가보자! 엄~청나게 맛있는 곳이라고 들었어!”
조이는 자신의 손을 잡아끄는 여자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른 영애는 오늘 현장학습이 시작되자마자 숲의 주인 분께서 내리는 시련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그 곳에 들어가면 자신이 간절히 바라는 풍경을 보게 될 건데 그게 환각임을 깨닫고 거기에서 탈출하기만 하면 시련을 통과할 수 있다고.
그를 듣고서 미리 마음속으로 준비를 해두었던 조이는 시련이 시작되고서 얼마 있지 않아 이게 환각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와! 냄새만 맡아도 침이 나오는 거 같아! 어떡하지? 저기에 있는 걸 다 먹고 싶은데 그럴 수 있을까?!”
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 활발하고 친절한데다 순수한 루시 알른이 존재할 리가 없으니까.
하아.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게 솔직하고 착한 알른 영애와 함께 맛있는 빵집에 가는 거라고? 진짜로?
숲의 주인인 리나님. 이게 맞습니까?
지금 저를 놀리고 있는 거 맞죠? 한 사람의 간절한 소원이 이런 것 일리가 없잖아요.
“오오. 이는 위대한 대마법사인 조이 파트란 영애님 아니십니까!”
루시의 손에 이끌려 반 강제로 빵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 안에 있던 종업원이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호응을 하듯이 루시가 목소리를 높였다.
“맞아요. 저한테 과분할 정도로 대단한 친구에요!”
…그러니까 이 환각이 전부 다 진실이라면 나는 알른 영애가 나를 인정해주기를 바라고 나와 격의 없는 친구가 되기를 원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대마법사라 칭송받기를 원하는 거네?
조이는 속으로 그를 생각하다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 내렸다.
너무 부끄럽고 치욕스러워.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는 건 차마 이 환각이 날 모함하는 거라고 소리칠 수 없다는 점이야.
다 한 번씩은 꿈꿔왔던 일들이니까.
하지만 어떡해! 알른 영애가 내 아래에서 순수한 웃음을 지을 때마다 조금 더 즐겨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걸!
이 환각에서 빠져나가면 알른 영애한테 얼빵 영애라 불리면서 여러 놀림을 당하겠지만 여기에선 다르잖아!
알른 영애가 내 손을 잡아 주면서 내 이름을 불러주고 날 친구라고 여겨준다고!
거기에 맛있는 빵까지 있고!
어차피 알른 영애의 말대로라면 마지막에만 환각에서 탈출하면 되는 거잖아. 그 때까지는 즐겨도.
“오셨습니까. 파트란 영애님. 미리 자리를.”
“꺄아아아악!”
순수한 루시나 다른 요소들까지는 이를 악물고서 견디던 조이였지만 자신이 어릴 적에 꿈꾸었던 백마 탄 왕자님이 출현한 순간 그녀에게도 한계가 찾아오고야 말았다.
실시간으로 자신의 흑역사가 살아 움직이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조이는 다급히 환각에서 탈출했고 현실에서 다시금 눈을 뜬 그녀는 거친 숨을 내쉬다 두 손으로 눈을 꾹 눌렀다.
내가 아직도 저걸 바라고 있었다고? 진짜로? 진심으로? 말도 안 돼. 어릴 적의 꿈으로 남겨뒀다고 생각했었는데!
“호오. 빨리 깨어났구나. 좀 더 즐기리라 생각했다만.”
자신의 귀에 꽂히는 목소리에 조이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 곳에는 턱을 괸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숲의 주인이 있었다.
“리나님?”
“그래.”
“혹시 제가 본 풍경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나요?”
“이 곳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두 갈래 머리의 꼬마아이가 제 체격이 걸맞게 순수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 반항적인 것도 좋지만 쾌활한 아이 같은 것도 좋더구나. 정석이 괜히 정석이 아니지. 그리고…”
“거기까지! 해주세요…”
“흐흐흐.”
자신의 흑역사가 실시간으로 중계되었다는 사실에 조이가 치욕스러워하자 리나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는 위엄이 있는 목소리라기보다는 주점에서 음담패설을 늘어 놓는 아저씨가 낼만한 소름끼치는 웃음소리였다.
저 분이 대단한 분이라는 건 알겠지만 조금, 아니 좀 많이 껄끄럽네요.
사교계에서 여기저기에 얼굴을 들이밀면서 여성 분을 유혹하고자 하는 성질 나쁜 귀족 남성 분을 보는 것 같아요.
조이는 리나의 웃음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현장학습을 위한 숲의 한 가운데에 있었는데 여기는 어디지?
“이 곳은 본인의 거처다. 그대들을 흙바닥에 눕혀둘 수가 없어서 내 친히 데려왔지.”
조이가 고개를 돌리기 무섭게 리나가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 후엔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냐고 묻고 싶을 테니 미리 대답을 해주자면 다른 방에 있다. 시련을 방해해서는 안되니 말이다.”
“제가 처음으로 깨어난 겁니까?”
“그렇진 않다. 본인이 여태까지 경험해본 바에 따르면 매력적인 자일수록 욕심이 많거든.”
조이가 리나와 대화를 나누어 본 것 채 몇 마디가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이는 리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감출 생각이 없었으니까.
이 분이 대놓고 매력이 부족하다며 제일 차갑게 대한 사람이 켄트 영애니까 그 분은 깨어 계시겠네요.
알른 영애께 가장 큰 호감을 드러냈으니 그 분은 아직까지 시련을 치르는 중이실테고.
신기하네요. 알른 영애라면 가장 먼저 일어나서 ‘느려터졌네. 얼빵 영애. 미리 알려줘도 못 떠먹는 거야? 허접. 얼빵해.’ 같은 소리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 여기에서 계속 이야기를 나누면 입이 심심하지 않으냐. 내 주인된 도리로써 손님을 대접해주도록 하겠다. 따라오거라.”
“네.”
“혹시 좋아하는 마실거리가 있느냐? 내 그대의 취향을 최대한.”
처음 봤던 그 때처럼 주접을 떨던 리나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무슨 일이 있나요?”
“본녀가 방금 전에 말했던 이론에 예외가 생길 것 같아서 말이다.”
영문을 모를 대답에 조이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리나는 그 이상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
“아카데미의 생활은 어떠니. 즐겁니?”
“좋아요. 무척이나.”
루시의 어머니는 무척이나 밝고 쾌활한 사람이었다. 알른 가문의 수치라는 별명까지 붙었던 루시의 부모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게 루시가 바라는 환상이라는 걸 고려해도 너무 이상적인 부모상이야.
아무리 그래도 성질 더러운 메스가키인 루시의 부모잖아. 베네딕에게서 메스가키스러운 티가 나지 않는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 사람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어야 한단 말이지.
근데 여태까지 본 바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그냥 진짜 착한 어머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냐.
혹시나 성격을 억누르고 있는 건가 싶어서 일부러 도발도 걸어봤음에도 웃고 말더라니까?
대체 주접이 심한 베네딕과 친절하고 착한 이 사람의 아래에서 태어난 아이가 어떻게 그 성질 더러운 메스가키로 태어난 거지? 혹시 크면서 성격이 달라지신 건가?
이건 좀 궁금하긴 하네. 방학 때 알른 가문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면 한 번 확인을 해봐야겠다.
뭐어. 그건 그거고 이제 슬슬 일어날 시간인가.
메스가키 스킬의 영향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단 사실에 기뻐서 있는 말 없는 말을 다 늘어놓긴 했지만 더 이상 늑장을 부릴 순 없어.
이 이상 오래 잠들어 있다가는 그 얼빠 여우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어머. 이제 가야 하는 거니?”
내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자 루시의 어머니가 노골적으로 아쉬운 티를 냈다. 여기에 있는 게 본래의 루시였다면 분명 망설였겠지만 나는 아니다.
내 입장에서 눈 앞의 여성은 연고도 뭣도 없는 예쁜 아주머니일 뿐이니까.
“네. 이만 가볼게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조심해서 가렴.”
환각에서 빠져나온 나는 나무로 된 천장을 바라보다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안녕하세요.’
“안녕. 허접.”
혹시나 싶어서 혼잣말을 해보았지만 메스가키 스킬은 내게 엄격했다.
하아. 그럼 그렇지. 매도 당하길 좋아하는 마조 주신이 이걸 없애줄 리가 없다. 조금이나마 기대한 내가 멍청했어.
긴 한숨을 내쉬고서 시련을 극복했음을 알리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문이 벌컥하고 열리며 조이와 프레이. 그리고 얼빠여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뭐야. 뭐야? 축하해주러 온 거야? 그런 것치고는 표정이 엄청 심각해 보이는데? 조이의 얼굴에 이렇게 금이 간 거 오랜만에 봐.
“알른 영애. 큰 일이 났어요. 페이비가.”
응? 페이비가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