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
포셀이 준비해 둔 실전이라는 게 뭔지 궁금하긴 했으나 먼저 몸을 풀긴 해야 했다.
나는 여느 때처럼 메이스와 방패를 들고 달리기를 시작했다.
체력단련을 시작하고 나서 거의 삼주에 달하는 시간이 흘렀다.
최근 들어서 나는 슬슬 체력이 오르는 속도가 더뎌지는 것을 느꼈다.
레벨 0의 한계치가 다가오는 것이리라. 소울 아카데미의 능력치는 숙련도처럼 레벨마다 어느 정도 한계치가 정해져 있으니까.
여기에서 더 강해지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레벨업을 할 필요가 있었다.
이제 내게 남은 시간은 대략 2개월 가량.
그 동안 수련을 해서 여러 능력치를 올릴 걸 생각해보면 적어도 에반스의 던전에서 레벨 10정도는 찍는 게 좋겠지.
그런데 상태창이 없는 이 세상에서 레벨업을 한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지?
…음. 곤란해졌네.
소울 아카데미에서 최고의 효율을 내기 위해선 어느 정도 레벨업을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무작정 높은 레벨을 찍는다고 능사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난 몬스터를 사냥한다고 해서 레벨업을 했는지 아닌지조차 구분할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이럴 수가. 이렇게 되면 여러 이벤트를 포기해야 하잖아!
그건 곤란해. 내가 본래 살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조차 불투명한 상황에서 챙길 수 있는 건 모두 다 챙겨둬야 한단 말야.
뭐 방법이 없을까. 상태창은 못 보더라도 레벨은 알아내야 하는데.
중대한 문제 앞에 고민을 하던 중 뒤에서 한 발소리가 나를 따라왔다.
“루시 아가씨. 오랜만에 뵙습니다.”
‘안녕하세요. 칼.’
“안녕. 허접.”
칼은 허접이라는 소리를 듣고도 웃음을 흘렸다.
허접이라는 소리가 기껍다는 듯한 반응이 당혹스러웠다.
이제부터 충직한 기사가 되겠다 맹세한 건 알겠지만 그게 허접이란 소리에도 기뻐하란 건 아니잖아.
이제부터 마조히스트가 되기로 한 거야?
“내일이면 던전에 들어가네요. 그 동안 전투는 많이 연습하셨습니까?”
‘물론이죠. 저 많이 성장했어요.’
“하. 당연하지. 허접한 너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성장했거든?”
정확하게 말하면 성장 당한 거지만.
왜 그런 말 있잖아. 안 되면 될 때까지 하면 된다고.
포셀은 반 강제적으로 그 단어를 실현시켰다.
싸움에 능숙하지 않으면 능숙해질 때까지 구르면 된다는 포셀의 마음가짐 덕분에 얼마나 힘들었던가.
덕분에 일주일 전과 비교하면 아예 다른 사람이라 볼 수 있을 정도로 싸움에 능숙해질 수 있었지만 고맙진 않았다.
하루하루가 정말 끔찍했거든.
하르네의 수업 시간이 행복하다 느껴진 건 처음이었어.
“그렇군요. 그럼 던전에 들어갈 때를 기대하겠습니다.”
칼은 그리 말을 하곤 저 혼자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저 무거운 걸 메고 나보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데 어떻게 호흡이 저렇게 안정적일 수가 있지.
진짜 괴물이구나 쟤는.
내가 저 정도 수준에 이르려면 얼마나 걸리려나.
잘 모르겠다. 이건 게임이 아닌 현실이었으니까.
*
달리기의 할당량을 채운 후 훈련장으로 향하자 포셀이 이동식 철창 옆에 서 있는게 보였다.
저게 그 준비했다는 실전의 정체인가? 저 안에 뭐가 있길래. 몬스터라도 잡아 온 거야?
“빠르게 오셨군요. 아가씨.”
‘그래서…’
“그래서 시험이란 게 뭔데.”
“비밀입니다.”
하? 어차피 저기 안을 보면 알게 될 건데 비밀은 무슨 비밀이야.
내가 눈을 치뜨자 포셀이 킬킬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장난을 치겠다 그거지?
알겠어. 어울려 줄게.
‘생긴 것처럼 음흉하시네요.’
“바보 포셀. 생긴 것처럼 음흉해♡”
“아가씨. 생긴 것처럼이란 말은 도대체?”
‘변태같다고요.’
“변태같이 생겼단 거야♡”
“변태라뇨!”
메스가키 스킬을 적극 활용해 도발을 했더니 포셀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하게 변했다.
요 며칠간 포셀과 대련을 하며 메스가키 스킬에 대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메스가키 스킬의 도발 효과는 메스가키 스킬의 도움을 적게 받을수록 효과가 증가했다.
그러니까 내가 애초에 메스가키처럼 말을 하면 할수록 도발이 더 잘 된다는 이야기다.
지금은 아직 선을 남겨두었기에 짜증을 내는 선에서 그쳤지만 진짜 메스가키처럼 말하고 행동하면 포셀도 화를 내더라.
물론 그 이상 도발을 한 적은 없다.
칼이 폭발했을 때만 해도 목숨의 위협을 느꼈는데 포셀이 폭발해 봐.
누가 이 덩치를 말릴 수 있겠냐.
난 아직 죽고 싶지 않단 말야.
한 번 소리를 친 포셀은 내게 당했다는 걸 눈치 챈 듯 몇 번 헛기침을 하곤 말을 바꿨다.
“농담이었습니다. 안을 보시죠.”
포셀은 나를 이끌고서 철창 앞에 세웠다.
철창의 안에는 날짐승의 냄새가 났다.
툭 튀어나온 엄니와 그를 따라 흐르는 질척한 침.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눈동자와 인간의 것보다 훨씬 두터워보이는 거죽.
두 눈으로 보는 건 처음이었지만 그를 보자마자 저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철창 안에 밧줄로 묶여있는 것은 분명 오크라 불리는 존재였다.
오크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짐승에게서 느껴지는 날것의 살의는 내 등줄기를 싸늘하게 만들었다.
“오크입니다. 근처 숲에 사는 것 중 하나를 잡아왔죠. 이게 바로 출정을 나서기 전 아가씨께 드리는 실전입니다. 이 오크를 쓰러트리십시오.”
이걸? 내가?
나는 눈을 끔뻑거리며 철창 안의 오크를 바라보았다.
모니터 속에서 보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게임에서 오크를 만났을 땐 그저 잡몹이란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초반부에 경험치 벌이용으로나 쓰지 나중엔 만나는 것조차 귀찮은 상대라 여겼다.
허나 현실에선 달랐다.
저 오크도 살아 숨쉬는 존재였다.
밧줄이 풀리는 순간 자신의 생존을 위해 모든 걸 해칠 준비가 된 짐승이었다.
“루시 아가씨.”
포셀이 나를 부르는 소리에 등을 떨었다.
‘왜요.’
“왜.”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아가씨가 다칠 일은 없습니다.”
긴장?
나 긴장했구나.
포셀의 말을 듣고 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은 난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하. 오크를 상대하면서 긴장을 하다니. 진짜 답도 없다.
앞으로 소울 아카데미를 이 몸으로 직접 플레이해야 하는데 오크에 겁을 먹어서 어쩌자는 거야.
저 녀석은 초반용 잡몹이잖아. 이제부터 저 녀석보다 훨씬 더 위협적인 상대를 수도 없이 만나야 한다고.
두 손으로 뺨을 툭툭 치고 나서 포셀을 올려다 봤다.
‘준비됐어요.’
“준비 됐어.”
“마음의 준비를 하신 건 알겠습니다만 그 전에 이것부터 입죠.”
포셀은 철창 옆에 내려 두었던 것을 들어 보였다.
그것은 철로 된 갑옷이었다.
평범한 기사들이 입을만한 크기는 아니었고 내 몸에 맘추어 제작된 것이 분명한 자그마한 갑옷 말이다.
“선물입니다. 아가씨를 위해 준비했죠.”
‘언제 만들어 둔 거에요?’
“언제 만들어 둔 거야?”
“얼마 전에 아가씨의 시녀가 치수를 재지 않던가요?”
있다. 분명 포셀과의 대련을 시작한 다음 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때 시녀가 치수를 재야한다면서 줄자를 들고 왔었지.
별 생각없이 어울려 줬었는데 이 갑옷을 만들기 위해서였나.
“너무 혼내진 말아주십시오. 제가 아가씨에게 선물을 드리고 싶다 부탁했거든요.”
내 표정이 살짝 식자 포셀이 당황하며 시녀를 변호했다.
걱정 마. 크게 혼낼 생각은 없어. 그냥 평소보다 조금 짓궂어 질 것 같단 생각을 했을 뿐이야.
말없이 웃어 보이자 포셀이 쓴웃음을 지었다.
“갑옷을 입는 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저택에 있을 땐 다른 이가 입혀줄 터입니다만 아카데미에 들어가면 혼자서 입어야 할 테니까요.”
내 몸에 맞춰서 만들어진 갑옷은 생각했던 것보다 묵직했다.
막 빙의했을 무렵의 루시였다면 이 갑옷을 입은 것만으로 바닥에 주저 앉았겟지.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난 시간 동안 필사적으로 단련을 해 온 나는 이 정도 갑옷의 무게론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내 몸을 감싸는 적당한 무게감이 기분 좋다 생각할 뿐.
“어떻습니까. 몸에 맞으십니까?”
포셀의 물음을 듣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걸어 보고, 가볍게 뛰어 보고, 방패와 메이스를 움직여도 보고.
괜찮았다. 편했다.
‘응. 잘 맞아.’
“그럭저럭 나쁘지 않네.”
“잘 됐군요. 실력 있는 대장장이에게 맡긴 보람이 있습니다.”
게임에선 갑옷을 착용하면 자동으로 몸에 맞춰졌지만 이 세상에선 아니겠구나.
잠시만. 그럼 갑옷 류 아이템을 습득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대장간에 가서 재련을 해야 하는 건가? 근데 미스릴이나 오리할콘 같은 갑옷을 평범한 대장간에서 재련할 순 없을 거 아냐.
이것도 좀 고민을 해봐야겠네.
“착용방법은 어떠십니까. 대충 아시겠습니까?”
‘그건 전혀 모르겠어요.’
“아니. 전혀 모르겠는데.”
전혀는 조금 과장이지만 헷갈린다는 건 사실이었다.
갑옷을 입는 방법이 이렇게 복잡했구나.
괜히 중세의 기사들이 종자를 데리고 다니는 게 아니었어.
혼자하라면 도저히 못할 것 같은데.
“하하. 그게 정상입니다. 아가씨. 갑옷 입는 법이 워낙 복잡하니까요.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전까지 계속 연습을 해 봅시다.”
‘그래야겠네요.’
“그래야겠네.”
갑옷을 완전히 착용한 나는 방패와 메이스를 들고 철창의 앞에 섰다.
“준비되셨습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포셀이 답지 않게 진지한 얼굴을 하고서 철창을 열었다.
철창이 열리자마자 안에 갇혀 있던 오크가 몸을 일으켜 앞으로 달려나왔지만 포셀이 그를 가로 막았다.
“멈춰라.”
그 후 단호히 목소리를 내자 오크가 움직이던 것을 멈추고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저거 분명 위압 스킬이지?
자기보다 일정 레벨이 낮은 몬스터에게 겁을 줘 도망치게 만드는 스킬.
고레벨 때 잡몹을 상대하지 않기 위해 습득하는 녀석.
저거 익히려면 게임 후반대가 돼야 하는데 포셀 이 사람 얼마나 강한 거야?
포셀에게 압도된 오크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벌벌 떨면서 제 자리에 서 있었다.
포셀은 그를 보다 오크의 팔에 묶인 줄을 풀어 준 후 뒤로 물러났다.
“아가씨. 이제 제가 신호를 드리면 오크가 아가씨에게 달려들 겁니다. 저한테서 도망치려면 아가씨를 뚫는 게 편하니까요.”
‘알겠어요.’
“알겠어.”
메이스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포셀은 말했다.
저 오크를 잡아내라고.
그건 저 오크의 생명을 내 손으로 끊으란 이야기겠지.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난 평생을 살며 무언가를 죽여본 경험이 없다시피 했다.
내가 한 최악의 살상은 어디 촌구석에 갔을 때 닭목을 내 손으로 비틀어 본 게 끝이었다.
심지어 그것조차 너무도 역겨워서 그 날 이후로 일 년 정도는 닭에 손도 못 댔던 것 같다.
당연 사냥 같은 걸 해본 적도 없었다. 내게 사냥이라는 단어는 X튜브에서 곰형님이 하는 걸 보며 대단하단 생각을 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런 내가 저 오크의 머리를 깨부술 수 있을까.
“숫자를 세겠습니다. 삼.”
포셀은 내게 망설일 시간을 주지 않았다.
“이.”
할 수 있나?
아니 그게 아니지. 해야만 하는 거야.
앞으로 지겹도록 해야 하는 일이잖아.
“일.”
이건 시작에 불과해.
심호흡을 하고서 메이스를 다잡았다.
“시작하겠습니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