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건물들과 내려앉은 도로, 폐허 속에서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다.
사람을 죽이는 거대한 오브젝트들과 맞서는 손바닥만 한 미니 사신들의 전투였다.
회색 사신을 꼭 닮은 이 미니 사신들은 형편없이 부서진 거리를 뚜방뚜방 돌아다니며 싸우고 있었다.
미니 사신들을 데리고 나타났던 회색 사신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미니 사신의 대적자는 사람은 물론 철근 콘크리트도 케이크처럼 잘라버리는 흉악한 오브젝트였다.
우리 도시에서 저런 오브젝트들이 이렇게나 많이 숨어 있었다니….
오브젝트 사고가 거의 없는 안전한 도시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무색하게도, 저런 괴물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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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색 미니 사신들은 겁도 없는지 저런 흉악한 오브젝트에게 무작정 돌진했다.
흙먼지와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찬 폐허를 총총거리며 뛰어다니며 흉악한 오브젝트와 전투를 이어 나갔다.
연기로 가득 찬 전장은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게 만들었지만, 분명 미니 사신들이 열세겠지.
하늘 위에는 푸른 사신들이 날아오르며, 불규칙한 비행경로를 그렸다.
이들은 미세한 물안개를 뿌려서 화재를 진압하고, 사람들에게 물방울로 만들어진 보호막을 설치해서 위험으로부터 막아주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피난민들 주변에는 커다란 마시멜로 덩어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피난민들에게 푹신한 쿠션이 되어주고, 날아오는 돌덩어리들도 몸으로 막아내는 귀여운 덩어리들이었다.
연기 너머에서는 숫돌에 칼을 갈아내는 소리가 계속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는 저 소리와 함께 휘둘러진 칼날이 버스를 토막 내는 꼴을 봤기에, 절로 소름이 돋았다.
퍽.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하늘에서 황금색이 떨어져 내렸다.
휘적휘적.
공중으로 튕겨 날아가며 팔다리를 파닥파닥하던 황금 사신은 얼떨결에 손을 펼치고 있던 나에게 떨어져 내렸다.
손바닥 위에서도 당황한 표정으로 팔다리를 흔들던 황금 사신은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팔다리의 움직임을 멈추고 배시시 웃었다.
이런 작은 아이가 우리들을 위해서 싸우고 있는 건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어느새 손가락으로 황금 사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헤실헤실 웃던 황금 사신은 표정을 진지하게 고치더니 다시 연기 속으로, 치열한 전장으로 몸을 던졌다.
황금 사신아 힘내!
***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연기 너머.
재와 먼지가 가득한 환경과 대조적인 해맑은 미소를 머금고 뛰어다니는 황금 사신.
반대로 필사적으로 낫을 휘두르며 난동을 부리는 오브젝트.
하지만 오히려 유린당하는 것은 손바닥만 한 황금 사신이 아니라, 황금 사신과 싸우는 거대한 오브젝트들이었다.
황금 사신 측면에서 보면 전투라기보다는 장난스러운 놀이처럼 보였다.
하지만 인간에게 해로운 오브젝트에게는 목숨을 건 전투 상황이었다.
철근도 손쉽게 잘라버리는, 고속으로 휘둘러지는 낫에 맞고 데굴데굴 굴러도 황금 사신은 즐거운 것처럼 웃었다.
몇몇 황금 사신들은 오브젝트가 휘두르는 칼날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마치 놀이공원의 놀이기구를 타는 것처럼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황금 사신들은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이 즐거운 놀이공원의 규칙은 딱 하나.
이 연기로 가득한 놀이공원을 벗어나서 사람들에게 접근하지 말 것.
그것을 어긴 오브젝트들은 스펀지처럼 황금 사신 모양 구멍이 수없이 뚫려서 전장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
분명 폐허가 된 도시를 배경으로 박살 난 도로 위에 서 있었는데!
어느새 주변은 핏물이 발목까지 차오르는 영문 모를 곳으로 변해있었다.
마치 다른 세상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질척거리며 붉고 무거운 빛깔의 하늘이 푸른 하늘 대신 자리했다.
바닥에 깔린 붉고 진득한 액체는 짙은 혈향을 풍겨서, 지금 나는 핏물이 가득한 기괴한 공간에 있음을 상기시켜 줬다.
뜨겁지는 않지만, 끓는 물처럼 보글거리는 핏물은 이유 없는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손바닥 위에서 잠들었던 황금 뿔 사신이도 깨어나서, 긴장한 표정으로 내 뿔 위에 매달려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붉고 어두운 하늘에서는 핏방울이 간간이 보슬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넓은 호수처럼 끝없이 펼쳐진 끓어오르는 핏물 속에서 어린아이 크기의 핏덩어리가 솟아올라서 기괴한 형상을 이뤘다.
팔다리와 이목구비가 악몽처럼 뒤섞여 뭉개지고 섞여 있는 인간의 형상.
전혀 회색 사신을 닮은 것 같지 않았는데, 각도에 따라서는 회색 사신처럼 보이기도 하는 기괴한 형상이었다.
그야말로, 찌그러진 회색 사신!
그리고 그 솟아오른 찌그러진 핏덩어리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작은 목소리로 소근거렸다.
[인간은 신을 죽였다. 그리고 다시 필요로 했다.]
[신은 잔혹했지만, 인간을 지켜주었다.]
아주 작은 소리인데도, 귓가에서 말하는 것처럼 똑똑히 들렸다.
[인간은 신을 죽였다. 그리고 다시 필요로 했다.]
[신은 잔혹했지만, 인간을 지켜주었다.]
언어인 것 같기는 했지만,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한 억양과 발음.
하지만 회색 사신은 왠지 알아듣는 느낌으로 귀찮아하고 있었다.
내용을 모르는 게 아니라, 내용을 이해하기 귀찮아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귀찮아 보이는 회색 사신이 양팔을 벌리고 작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공간이 말려들어 가는 것처럼 찌그러지는 것과 동시에 회색 사신이 양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붉은 하늘이 갈라지고 그 자리를 푸른 하늘이 채워나갔다.
바닥에서 솟아오른 핏물도 찢기듯이 허공으로 빨려 들어갔다.
하지만 찢긴 공간은 순식간에 불길한 붉은 색이 채워나갔고, 끓고 있는 핏물에서는 다시 일그러진 핏덩이들이 솟아올랐다.
***
핏물로 이루어진 찌그러진 덩어리들은 계속 똑같은 소리만 반복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저 말을 계속 반복하는 건가?
귀찮아.
이해하기 힘든 소리를 반복적으로 말해봐야 귀찮기만 할 뿐인데….
더 이상 듣기 싫어져서, 공간을 붙잡고 찢어버렸다.
붉은 하늘은 찢기고, 이상한 헛소리를 하는 핏덩어리들도 갈기갈기 찢어졌다.
하지만 순식간에 하늘은 다시 붉게 물들고, 헛소리하는 핏덩어리들도 다시 솟아올랐다.
역시 파괴 조건이 난해한 오브젝트들은 조건을 채우지 못하면 공간을 잘라도 의미가 없었다.
나는 주변을 ‘눈’으로 둘러보았다.
이 공간의 파괴 조건은 <에너지 고갈 혹은 본체의 파괴.>였다.
양자택일 조건이라.
다행히 둘 다 내가 시도 가능한 방법이었다.
장작을 대량으로 소비할 게 뻔한 에너지 고갈보다는 본체를 우선 찾아보는 게 맞겠지.
본체가 가까이에 있으면 좋을 텐데….
본체를 찾기 위해서 능력을 사용하자, 핏빛 어둠 속에서 내 머리 위의 더듬이가 부드럽고 은은한 빛으로 펄럭이며 북쪽을 향해 빛의 흔적을 남겼다.
더듬이가 본체의 방향을 비추는 것과 동시에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려고 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나를 바라보자, 나도 그를 바라볼 수 있었다.
시야의 한편에 어두운 숲의 모습이 비쳤다.
숲속에 우뚝 솟은 강철탑의 모습을 배경으로 엄숙하게 서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얼굴이 모호해서 알아볼 수 없고, 한 무리의 고풍스러운 램프들을 이끄는 남자.
흔들리는 수많은 램프에서 나오는 불빛으로 남자의 그림자는 춤을 추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흐릿했지만, 그의 시선은 나를 꿰뚫어 보는 것처럼 강렬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눈빛만을 교환하던 남자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기 시작하더니, 생소한 언어가 흘러나왔다.
이해할 수 없는 언어였지만, 딱 한 마디 이해할 수 있던 말이 있었다.
[너는 여전하군.]
남자가 그 말을 하면서 입을 다무는 것과 동시에 세계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핏물을 뿌리는 하늘과 이상한 소리를 하는 덩어리들은 먼지처럼 잘게 부서져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바스러지는 가스램프.
가스램프는 본체로부터의 힘의 공급이 끊긴 것처럼 회색빛 재로 변해 흩어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북쪽을 가리키던 더듬이는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분명 강철탑을 가리키고 있던 더듬이가 그 방향을 잃어버린 것이다.
왠지 낯익은 남자와 의미심장한 이야기들을 잔뜩 들은 것 같은데, 내 감상은 하나였다.
귀찮아.
아마, 왓슨을 만든 것도 그 남자 같은데 다음에 왓슨을 만나면 그 남자를 불러달라고 해야겠어.
핏물로 가득한 공간이 무너져 내리자, 황폐한 폐허가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났다.
드디어 이번 사건의 원흉을 제거한 셈이다.
램프 남자?
그건 나중에 직접 만나고 생각해 보지 뭐.
***
갑자기 오브젝트가 나타나고, 도시가 붕괴해 버렸어도 시간은 흘렀다.
밤의 싸늘한 공기가 내려앉자, 집을 잃어버린 도시 주민들의 마음도 차갑게 얼어붙었다.
“하아, 도대체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누군가의 한숨 소리와 말소리가 모두의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정부에서 자치를 인정해 준 도시라서 그런지, 아니면 단순히 인력이 부족해서 그런 건지 아무런 지원이 없었다.
먼지투성이 천을 끌어안고 누웠지만, 밤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그때 폐허 한가운데서 커다란 불길이 치솟았다.
대형 캠프파이어처럼 커다란 불꽃은 주변 공기를 따스하게 데워주고 있었다.
도대체 뭐지?
궁금증을 안고 도착한 불길의 근원은 커다란 마시멜로였다.
뀨우….
회색 사신이 커다란 마시멜로 오브젝트를 나무 위에 얹어놓고 불을 붙인 것이었다.
요정 같은 푸른 사신들이 날아다니며 빛 가루를 뿌리자,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씩 편안해졌다.
<너무 불안해하지 마세요!>
<분명 좋은 일이 있을 거예요!>
사람들은 잠시 고통을 잊고 캠프파이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따스한 핫초코를 마시며, 황금 사신과 캠프파이어를 쬐었다.
그들은 불안을 잊고 잠시 추위를 이겨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