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이 은은한 빛을 내뿜으며 완전히 무너져 내려 버린 도시의 흔적 위에 고요한 빛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어젯밤만 해도 요정들의 축제 같은 기묘한 모임이 열렸었지만, 핫초코와 과자를 나눠주던 미니 사신의 모습은 깨어버린 꿈의 흔적처럼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캠프파이어의 불씨는 이제 차갑게 식어 보이지 않고, 새롭게 솟아오르는 태양 빛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정말로 꿈이었던 걸까?
어젯밤의 증거는 흔적만 남은 캠프파이어뿐이었다.
하지만 꿈이었어도 상관없겠지.
충격과 슬픔으로 얼룩져 있던 생존자들의 얼굴은 전보다 많이 밝아져 있었다.
도시 전체가 무너져 내리고 집과 가족을 잃은 슬픔에도 불구하고, 미니 사신이 선물한 설명할 수 없는 온기와 희망이 지친 영혼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것 같았다.
마법과도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마법 같은 희망이 있어도, 폐허가 되어버린 도시의 뼈대만 남은 건물들은 사람들에게 막막한 기분을 들게 했다.
그때 한 남자가 캠프파이어 흔적 근처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할 수 있을 겁니다.”
남자의 말은 맥락이 없었지만, 희망을 품고 있었다.
“우리의 도시는 폐허가 되었지만, 다시 한번 재건할 수 있을 겁니다. 원래 이 도시는 폐허에서 다시 세워진 도시니까요.”
남자는 멀쩡한 건물을 찾아내서 임시 숙소로 만들고, 자신들만의 새로운 마을을 만들 것을 호소했다.
“물론 예전 모습을 찾으려면 몇 년은 걸리겠죠. 힘든 일도 많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 건물뿐만이 아니라 삶을 재건할 수 있을 겁니다. 이 황폐한 곳을 희망의 안식처로 바꿀 것입니다.”
남자의 말은 충분하진 않았지만, 미니 사신이 남긴 희망에 불을 지피기에는 충분했다.
사람들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서 남자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수많은 도시가 붕괴하는 이 세상에서 보기 드문 일이었다.
상실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이 폐허가 된 도시에서, 희망의 벽돌이 쌓여나가고 있었다.
남자는 폐허의 커다란 잔해에 새로운 도시의 상징을 새겨넣었다.
마법 같은 희망을 불어넣어 준 어젯밤을 기리는 상징.
불에 타고 있는 억울한 표정의 마시멜로 아귀였다.
***
이른 아침의 부드러운 햇살이 비치는 연구소의 뒤뜰은 고요한 평온함에 잠겨있었다.
갓 다듬어진 잔디 위에는 이슬방울이 작은 보석처럼 반짝였고, 아침 햇살에 닿은 나뭇잎들이 반짝였다.
하늘은 남색에서 하늘색으로 바뀌며, 하루의 시작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침의 쌀쌀한 기운을 막기 위해 연구소에서 들고나온 따뜻한 커피잔을 두 손으로 들고 의자에 앉아, 뒤뜰 한편에 깔린 평평한 대리석 바닥 위에서 놀고 있는 황금 사신이들을 바라보았다.
진한 커피 향이 아침 공기의 흙 내음과 어우러지자, 감각을 일깨우는 기분 좋은 아침의 시작이 완성되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실 때마다 편안한 온기가 느껴졌고, 차가운 공기와는 기분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황금 사신이들이 내는 바스락거리는 색종이 소리가 은은한 배경음이 되어주었다.
사신이가 드디어 돌아온 날의 평온한 아침, 세희 연구소 뒤뜰에는 때아닌 종이접기가 유행하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종이접기를 하는 아이들이 생겨서, 커피를 가지러 가는 김에 색종이도 잔뜩 챙겨서 온 것이다.
자기 몸통보다 커다란 색종이를 온몸으로 꾹꾹 눌러가며 종이를 접는 황금 사신이들.
종이를 다 접은 황금 사신이는 나를 향해 쪼르르 달려와서 뭔가를 바라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마치 먹이를 갈구하는 아기 새처럼 귀여운 모습!
나는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황금 사신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색종이 한 장을 황금 사신이의 머리 위에 올려주었다.
새로운 색종이를 받은 황금 사신이는 방긋 웃으며 만세를 한 채, 머리 위에 색종이를 얹고 후다닥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다시 색종이를 접기 시작했다.
어제 새벽에 돌아온 사신이는 돗자리 위에 이불을 돌돌 말고 누워서 지금까지 취침 중이었다.
사실상 이불 덩어리처럼 보이는 상태였다.
이 이불말이가 사신이라는 증거는 이불 말이 위로 드러난 정수리에서 살랑살랑 흔들리는 안테나뿐이었다.
사신이 근처에는 종이접기에 관심 없어 보이는 황금 사신이 하나가 흔들리는 안테나를 붙잡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후후, 저 흔들리는 안테나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매력이 있지.
만지면 대단히 부드러워서, 두 배로 만족스러운 사신이 안테나.
결국 황금 사신이는 안테나를 붙잡는 데 성공하고, 양손 가득 안테나의 감촉을 만끽했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안테나를 입으로 가져가서 ‘앙’하고 물었다.
그러던 중, 타다닥 하고 미니 아귀가 잔디밭을 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귀의 위에는 황금 사신이가 해맑은 표정으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바람개비!
바람개비를 만든 황금 사신이는 굉장히 즐겁고 신나 보였다.
때찌때찌.
질주하는 아귀와 황금 사신이를 구경하던 도중, 허벅지를 두들기는 느낌이 나서 돌아보니 황금 사신이가 잔뜩 몰려들어 있었다.
자신이 만들던 색종이도 내팽개치고 몰려온 황금 사신이들.
아마 자기도 바람개비를 만들고 싶어서 온 것처럼 보였다.
나는 가방에서 색종이를 꺼내서 황금 사신이에게 한 장씩 나눠줬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연구소 뒤뜰은 신나게 달리는 아귀의 발걸음 소리와 바람개비가 힘차게 돌아가는 소리로 가득해졌다.
***
탐정 사무소에 놓인 TV에서는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쇼 프로그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구석에 자리 잡은 후배 2호는 멍하니 넋을 놓고 그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프로그램의 진행자는 묘한 존재감을 지닌 인상적인 복장의 인물이었다.
짙은 보라색으로 물들인 머리카락을 세심하게 뒤로 넘긴 올백의 머리.
마찬가지로 파격적인 보라색 단색 정장은 그의 머리카락 색과 맞물려 흥미로우면서도 어딘가 약간 이상해 보이는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그 보라색 남자를 보면서 후배 1호는 웃음기를 머금고 말을 걸어왔다.
“선배! 저 남자랑 선배랑 형제 사이 아니에요? 패션 감각이 완전 똑같아요.”
내가 세심하게 고른 정돈된 노란 정장이랑 저런 과장된 보라 정장을 비교하다니, 대답할 가치도 없었다.
후배 1호는 대답을 바라고 말한 것은 아닌지, 킥킥 웃으면서 TV 화면으로 다시 관심을 돌렸다.
[오늘의 손님은 신서울 추진 정책 위원회의 위원장님입니다. 안녕하세요! 위원장님.]
보라색 남자의 힘찬 소개와 함께 약간 어수룩해 보이는 남자가 화면 안으로 들어섰다.
보라색 남자의 억양은 특이했고, 행동은 과장돼서 연극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대화가 진행되면서 여러 가지 주제들이 튀어나왔다.
그러다가 곧 초점은 더 심각한 문제, ‘RS’라는 도시가 최근 파괴된 사건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온 소식으로는 ‘RS’라고 불렸던 도시 하나가 괴멸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죠.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서울 외부를 살펴보면 도시 하나가 붕괴할 정도의 사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요.]
심각한 표정으로 위원장을 바라본 보라색 남자는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도 굳이! 서울을 옮겨야 할 필요가 있는 걸까요?]
위원장은 준비된 자료를 꺼내가며 이번에 일어난 비극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지만, 쇼의 달인인 보라색 남자는 능숙하게 대화를 비껴놓으며 집요하게 서울의 안전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위원장의 발언을 중간중간 끊고 방해하는 행태에 그의 얼굴이 구겨졌지만, 보라색 남자는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사실 보라색 남자의 쇼는 언제나 이런 느낌이었는데, 이런 쇼의 진행 패턴은 그의 의도를 의심스럽게 만들었다.
서울의 안전함을 굳이 저렇게 부자연스럽게 강조할 필요가 있었던 걸까?
그리고 이런 부자연스러운 쇼가 언제나 인기를 끌던데,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왠지 ‘큰 사건’의 냄새가 났다.
쇼가 끝나자, 멍하니 앉아있던 후배 2호는 진지한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탐정 선배! 할 이야기가 있어요.”
심각하게 말할 만한 일이 있었던가?
의뢰 실패 이야기는 신경 쓰지 말라고 했을 텐데….
조용한 분위기에서 이야기하기 위해서 후배 2호와 나는 옥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탐정 사무소가 위치한 건물 옥상, 나는 파이프에 불을 붙이며 후배 2호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할 이야기가 뭐지?”
뭔가 우물쭈물하던 후배 2호는 눈을 질끈 감고 가슴팍에서 뭔가를 꺼내서 내 앞으로 들이밀었다.
손바닥 위에는 잘 봐달라는 듯이 헤실헤실 웃고 있는 미니 황금 사신이 있었다.
“사실 제가 세희 연구소에서 오브젝트 하나를 빼돌렸어요!”
“아, 그 이야기였나. 이미 알고 있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네?”
나름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지, 깜짝 놀란 표정의 후배 2호.
“음, 후배 3호도 알고 있을걸. 아마 망치 말곤 아무 관심 없는 후배 1호를 제외하면 다들 알고 있을 거야.”
당황한 표정의 후배 2호를 보며 하늘을 향해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
잠에서 깨어나 보니 미끼를 문 생선처럼 황금 사신이 10마리나 내 더듬이에 달라붙어 있었다.
가벼운 황금 사신도 10마리나 머리에 달라붙으니까 걸리적거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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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듬이를 힘껏 휘둘러서 황금 사신들을 털어 내버렸다.
애착 인형을 빼앗긴 것 같은 표정으로 튕겨 날아가는 황금 사신들.
으, 더듬이 중독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어.
세희 연구소 뒤뜰은 종이접기 흔적으로 난장판이었고, 내가 잠들 때까지만 해도 옆에 있었던 예린이는 사라진 상태였다.
뚜방뚜방.
예린이를 찾아서, 그리고 재미있는 일을 찾아서 연구소 내부를 돌아다녔다.
“네? 아무리 그래도 미국은….”
그리고 내 격리실 근처 복도에서 대화 중인 세희와 예린 그리고 제임스를 발견했다.
제임스를 만나게 되면 장난치려고 했는데, 직접 찾아오다니!
무슨 장난을 쳐야 재밌을지 생각하며 천천히 살금살금 다가가자, 제임스가 나를 발견하고는 반가운 얼굴로 뭔가를 들이밀었다.
“이번에 새로 나온 ‘대용량 회색 사신 푸딩’이야. 발매하기 전에 미리 주려고 가져왔지.”
제임스는 내 몸통보다 커다란 푸딩을 나에게 들이밀었다.
와, 진짜 크네.
푸딩에서 나는 달콤한 냄새에 나는 넓은 마음으로 제임스를 용서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커다란 푸딩의 포장을 뜯어서 부드러운 푸딩을 숟가락으로 퍼 올렸다.
옴뇸뇸.
아, 행복해.
푸딩은 왜 이렇게 맛있는 걸까?
맛있는 대용량 푸딩을 즐기는 도중 무시하기 힘든 발언이 들려왔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회색 사신을 포함해서 미국에 한 번 오시지 않겠습니까?”
미국?